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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 과학수사 길 없나

첨단장비도 보조수단일 뿐…‘경찰개혁’ 선행돼야

정기수 기자 ㅣ | 승인 1991.04.25(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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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수사가 아니었다면 9번째 ‘화성연쇄살인’으로 기록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88년 12월16일,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사랑리 소남산에서 심하게 부패한 변사체로 발견된 한 여자 어린이의 신원이 새로 들여온 과학수사장비로 쉽게 밝혀짐에 따라 범인을 2달만에 검거한 사건이다.

유골만 남은 변사자의 소지품 가운데 신원확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감정자료라고는 썩은 청바지에서 발견된, 무엇인가 적혀있는 종이쪽지 하나가 유일한 것이었다. 경찰은 쪽지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연구소는 거의 형체가 사라진 문자라도 적외선 필터를 이용해 간단히 현출해내는 고정밀 비교 확대 투영기를 82년부터 가지고 있었다.

 감정결과 쪽지의 내용은 “1)음악, 2)줄넘기카드, 3)일기쓰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에 따라 변사자는 국민학생이며, 살해당하기 직전 담임선생님이 위 3가지 숙제를 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수도권·중부지역 2천여개교를 뒤지고 보니, 서울 구로구 시흥동의 ㅌ국민학교 5학년 1반에서 그해 6월말 줄넘기 등의 숙제를 내주었으며 김모(12)양이 7월1일부터 결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양의 사진을 구한 경찰은 화성에서 발견된 시체와 동일한 사람인지를 밝히기 위해 사진과 유골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슈퍼임포즈’이용. 2달만에 범인 검거
 여기에서 85년 일본에서 들여온 ‘슈퍼임포즈’란 과학수사장비가 한몫을 했다. 이 장비는 컴퓨터 촬영장치가 들어 있는 기기 속의 받침대에 두개골을 올려놓으면 두개골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 화면은 회전 확대 축소 등이 자유로워 두개골의 각도와 크기를 사진의 모습과 똑같이 맞출수 있다. 이렇게 만든 화면을 필름으로 뽑아 사진위에 포개면 눈·코·입 등의 위치가 일치하는지 여부, 즉 사진과 유골의 임자가 같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광주 주남마을에서의 대량 유골발견 같은 경우의 신원확인에 이 ‘슈퍼임포느’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김양의 사진과 유골의 필름을 포개본 결과 정확히 일치했다. 경찰은 곧 김양의 계모(47)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계모는 남편(48)의 학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어린 의붓딸을 살해하게 됐다고 범행동기를 털어놓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놀이터에서 녹고 있던 김양을 친정에서 가까운 사체발견 장소로 데려가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사체를 주위의 솔가지로 덮어놓고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이다.

 ‘과학수사의 개가’로 불린 이 사건의 해결로 경찰은 잠시 기를 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국민들로부터 갈수록 신뢰를 잃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화성연쇄살인이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껏 범인의 윤곽조차 잡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첨단과학 수사를 동원해야 ‘화성’을 풀 수 있을 것인가. 이같은 ‘수수께끼 사건’이 선진 외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 경찰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의 개혁(28~29쪽 관련기사 참조)과 아울러 과학수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3일 발생한 화성연쇄살인의 10번째(공통점이 있는 것으로는 8번째) 희생자인 권순상(69) 할머니의 사건사례를 통해 우리 과학수사의 현주소를 찾아보자. 현장에서 채증된 감정자료는 손가방 1개, 족적 2점, 종이조각 3매 등. 다른 채증물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정밀검사한 결과 피해자의 것이 아닌 머리카락과 혈흔이 발견됐고 사체의 질내에 집어넣어져있는 피해자의 양말 한짝에서 미량의 정액이 검출됐다.

 이들 유류품에서 경찰이 얻어내려고 모든 감식능력을 집중하는 것은 지문이다. 목격자나 주민의 신고가 없는 상태에서 지문만이 현재로서는 가장 빨리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낼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문이 범죄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을 범죄꾼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요즘의 범죄현자에서는 지문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피해자의 수많은 소지품을 포함해 모두 80가지를 감정했으나 명함 한 장과 시외버스 시간표 메모지에서 피해자 것과 다른 지문이 단 2개 검출됐다. 지문의 일부만 나온 이것으로는 검퓨터조회를 통해 임자가 누구인지 찾아낼 수 없다.

과학수사의 혁명 ‘DNA감식법’
 범인이 장갑을 사용하면 무용지물이 되다시피하는 첨단장비가 레이저 지문검출기이다. 사람의 땀에 리보플라빈, 아미노산 등 5~6가지의 형광물질이 있는 점을 이용, 레이저광선을 쬐어 종래방식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섬유 피혁 등에 잠재한 지문을 찍어내는 기계인데 치안본부 감식과에서는 85년부터 도입해 쓰고 있다. 피해자의 가방 스타프 손지갑 등을 이 방식으로 실험해보았으나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다.

 따라서 남은 증거물, 즉 머리카락 혈흔 정액 등으로부터 범인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야만 한다. 이런 경우를 위해 선진 외국에서는 DNA감식법을 연구해 실용화하고 있다. 흉포·지능·광역·스피드화라는 특징을 나타내는 현대범죄와의 전쟁에서 DNA감식법은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고 있다.

 85년 영국의 제프리 교수가 다른 실험 도중 우연히 알아낸 이 방법의 원리는, 세포의 핵에서 발견되는 디옥시리보핵산(DNA)은 염기(base)라 불리는 4개의 기본조직군의 배열로 나타나는데 그 배열 순서가 사람마다 거의 무한정으로 다르다는 데 있다. 각 개인의 고유한 특징을 알아낸 다음 컴퓨터로 코드처리해 지문처럼 입력해놓으면 사건현장에서 얻은 증거물에서 추출한 DNA로 용의자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DNA감식법의 개발은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법의학적 가치, 즉 범인을 조기에 발견하고 또 그것이 1백%에 가까운 고도의 정확성을 가져 지금까지의 방법 중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두사람이 우연히 같을 확률은 수십억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일란성 쌍생아만이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같이 거의 완벽한 개인식별성이 지문과 다름없다고 해서 DNA특성을 코드화한 자료를 ‘DNA지문’이라고도 부른다.

 DNA는 또 강력범죄 사건의 현장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증거물로부터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범죄꾼들은 지문을 남기지 않을 수는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신이 모르는 새에 떨어뜨리게 된다. 피해자가 반항할 때엔 혈흔이, 강간사건 때엔 범인의 체액이 피해자 주변 어딘가에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위의 증거물이 주변환경에 의해 심하게 오염되고 고온으로 훼손되지 않는 한 DNA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까지(약2년) 추출이 가능해 수사관들에게 매력을 더해준다.

 미국은 지난 89년부터 연방수사국(FBI)을 중심으로DNA감식법이 본격적인 실용화단계에 들어가 있는 나라다. 여기에서 ‘화성’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초동수사단계의 채증물이 우리와 똑같고 주민의 제보도 없다고 전제할 때, 이들은 DNA분석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일차적 결론을 내리고 수사를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10번의 사건 중 동일범 소행이 몇 건이고 그 범인은 모월모일 다른 주에서 일어난 강간사건의 범인과 동일하다.” 또는 “이번 사건의 범인은 지금까지 발생한어는 강력사건 범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지문과 같이 모든 사람의 DNA특성을 자료화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고 또 인권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현재 강력사건의 범인과 수감자들에 대해서만 형기를 감량해주는 조건으로 DNA를 채취하고 있다. 다라서 아직은 사건현장에서 얻어진 DNA가 곧 범인검거와 직결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며 당분간 큰 진전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시 우리 실정으로 돌아와서, 머리카락 혈흔 정액 3가지 증거물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혈액형밖에 알 수 없다”이다. 혈액형은 범인을 가리는 데 가치가 매우 낮은 자료일 뿐 아니라 엉뚱한 용의자가 우연히 같은 혈액형일 경우, 증거 하나가 더 보태져 진범으로 섣불리 단정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혈액형밖에 알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3~4년 늦었을 뿐이지 벌써 DNA감식 기술과 장비가 들어와 관련 연구기관에서 실험작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화성’과 같은 사건의 수사에 적용할 만큼 정확한 법의학적 가치가 있는 결과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으나 내년 안으로 실용화하게 될 것이라고 연구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현재 국내 DNA감식 연구진 가운데 가장 앞서 있다고 학계에서 인정하는 곳은 고려대 의대 법의학교실이다. 이 교실을 이끄는 교수는 황적준 박사, 황박사는 지난 88년 1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화학1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오프 더 레코드’ 약속을 어긴” 취재기자의 기사화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박종철군 사인변경 압력사실’을 적은 자신의 일기가 공개됨으로써 연구소를 그만뒀다. 황박사는 미국에서 DNA감식법을 배워온 뒤, 89년 고려대에서 국내 최초로 논문을 발표했으며(고려대 문국진·연세대 김종열·건국대 박선우 교수와 공동), 현재는 탐식자(DNA-probe)와 완충용액(buffer solution)을 값싸게 개발하는 연구를 계속중이다.

 고려대 법의학교실의 뒤를 쫓고 있는 곳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인데, 고려대의10배인 2억원의 예산을 들여 DNA분석실(가칭)을 설치하고 연구소 인원을 FBI에 연수시키는 한편 5~6명의 박·석사 전문인력 확보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분석실 준비를 맡고 있는 최상규 박사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한 상태에서 한국 실정에 맞는 실험조건을 설정하고, 이것을 늦어도 내년 안에 실용화하기 위해 반복실험주이다”라고 말한다.

 두 연구진 외에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이정빈 박사). 그리고 이 교실과 연구제휴를 하고 있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유전자감식반을 설치해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예비실험을 마쳤거나 자료검토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과학수사연구소와 대검이 각각 2억원씩 쓰면서 서로 등을 돌리고 독자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복투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박노해는 잡아도 ‘화성’은 못 잡는다”
 범죄의 공포에 시달리는 국민으로서는 예산을 한군데서 몰아 쓰는 두군데서 나눠 쓰든 연구만 잘 한다면 그것을 탓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DNA감식법이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수단 중 가장 첨단의 수사기법이란 것이지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데 있다. 지금으로서는 DNA지문이 용의자가 범인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대조용’으로만 유용하기 때문에, 경찰이 그럴듯한 용의자를 잡아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박노해는 잡아도 화성연쇄살인범은 못 잡는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시국치안과 민생치안의 비중이 왜곡돼 있는 현실, ‘주재소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전근대적인 경찰제도 등의 구조적인 개혁이 요원한 실정에서 DNA지문을 논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과학수사’라는 말은 ‘첨단기술과 장비뿐만 아니라 경찰의 개혁’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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