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앞 벽보논쟁 시끌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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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총학생회의 '금연·정숙'운동에 반론·재반론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이다. 그런데… 앗! 우리 대학은 심장병에 걸렸어요."
 지난 4월 중순 연세대 총학생회가 도서관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도서관 안에서 '금연·정숙·청결·1인1좌석제'의 실시를 계몽하기 위해 교태 곳곳에 붙인 포스터 문구이다. 지난해 말 선거 당시 소음과 먼지, 자리부족으로 허덕이던 도서관의 환경개선을 약속한 임헌태(국문 4) 총학생회장이 공약실천을 위해 펼친 첫 사업이었다.

"사라져야 할 것은 집회소음이다"
 그런데 총학생회의 도서관 개혁운동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토목4'라고 밝힌 한 학생이 '총학생회는 무엇이 니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제목의 소자보에서 "연세대 도서관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은 담배연기도 잡담소리도 아닌 총학생회의 집회 소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박과 재반박의 소자보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이다.
 
단순한 찬반 의사표시부터 나름대로 내리는 진단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의견은 다양했다. 법대 85학번이라고 밝힌 한 학생은 '신인류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글에서 "토목공학과 84학형의 논리는 일본에서 만연했던 신인류의 논리와 똑같다"고 전제한 뒤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농민더러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 가서 시위하라는 것과 같은 억지"라고 꼬집었다.

 또 자신을 고시준비생이라고 밝힌 한 학생은 "전에는 도서관에 있는 학생과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이 서로 걱정했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 없이 각자의 길을 갈 뿐"이라면서 "단절의 시대가 되어버린 90년대"를 개탄하기도 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다섯번이나 매달려 기도하며 귀찮게 한 아브라함은 존경의 대상이지 나무람의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을 선지자에 비유한 학생도 있었다. 반면에 "2백명도 안되는 소수의 운동권을 위해 4천명이 넘는 도서관의 학생들이 피해를 입을 수는 없다" "찬반투표나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르자"는 주장도 있었다.

 사태가 이처럼 '벽보논쟁'으로 번지자 연세대 총학생회는 4월23일 대자보에서 "얼굴없는 벽보싸움이나 편을 가르는 찬반투표가 아니라 직접 만나 솔직한 심정을 터놓는 일이 중요하다. 소자보를 붙인 학우와 관심있는 연세인이 모여 공개토론회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벽보논쟁의 참여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공개토론회는 무산됐다.

 이 노쟁 자체를 '새로운 현상'으로 진단하고, 이를 계기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대학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전 연세대 도서관장 이재철 교수는 "도서관 앞 집회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열려왔지만 집회에 반대하는 학생은 얼마 전까지 자기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해다"면서 "학생들의 의식구조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운동의 명분에 눌려 지내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스스럼없이 자기 견해를 표명하는 풍토가 마련되었다는 얘기다.

"학생운동 공감대 되찾기 계기"
 88년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를 지낸 강호국(국문 4)씨는 "그동안 총학생회의 집회가 너무 잦았던 철저한 준비와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분열상을 극복 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학원총학생회 송근호(27) 회장도 "벽보논쟁의 발생원인은 학생운동을 정서적으로 지지하던 공감대가 깨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논쟁 자체를 학생운동에 대한 공감대를 되찾는 계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는 "이번 벽보논쟁은 대학사회의 단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사회의 억압구조에 대항하던 학생운동이 또다른 '억압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교수는 그동안 대학에서조차 토론문화가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합리적인 계약의 원리를 배운 젊은 세대의 등장은 올바른 토론문화의 정착과 궁극적으로는 운동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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