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묶고 입은 풀어야 한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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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도 선거법 개정 방향 확정 … ‘부패 방지’에만 역점

정치 개혁, 선거 개혁을 향한 정치권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올해 안에 정치관련 법안을 개정하기는 어렵다’고 공언해 오던 여야 정치권이 제도 개혁을 향한 발길을 분주하게 떼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개월여의 작업 끝에 통합선거법을 제정하자고 의견을 내놓은 것은 지난 달 20일. 하지만 정치권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국회 정치관계법특별심의위원회(정치특위)는 발족한 지 1백일이 넘도록 이 문제에 관한 한,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金泳三 대통령의 ‘영국식 선거 제도 검토’ 발언와 함께 ‘금융실명제에 이은 다음 개혁 수순은 정치 혁명이다’라는 청와대의 입장이 확인되자 정치권의 흐름은 일순 돌변했다. 여권은 ‘공직자 재산 공개’ 파문으로 정치권이 술렁이던 지난 9일, 청와대 관계자들까지 참여한 심야 당정회의를 열어 선거법과 정당법·정치자금법 개정 방향을 논의했다. 다음날인 10일 당무회의에서는 개정의 기본 방향을 확정지었다. 심야 당정회의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청와대측 의견이 대부분 반영된 결과라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민주당도 같은 날인 10일 사흘째 열린 정치개혁특위에서 정당법·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마련했고, 멀지 않아 선거법 개정안도 확정지을 예정이다.

민자당 안 ‘선거운동 자유’는 미흡
 민자당의 선거법 개정 방향은, 통합선거법의 명칭인 ‘공직자 선거 및 부정방지법’에서 암시되듯이 한마디로 ‘돈 안쓰는 선거’와 ‘선거 부정과 부패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요약된다. 그 점에서는 선관위의 개정 의견보다도 강화한 측면을 보이고 있다.

 우선 민자당은 선거 관련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는 10년 동안 피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을 상실하도록 개정 방향을 잡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10년이면 현실적으로는 선거에 세번 참여하지 못하게 되므로 사실상 선거사범을 정치판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라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민자당은 이밖에도 금품 관련 선거법 위반죄는 돈을 준 후보 진영은 물론 돈을 받거나 요구한 일반 유권자도 처벌하는, 이른바 쌍벌죄를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이러한 민자당 안은 중앙선관위가 지난 20일에 내놓은 개정 의견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중앙선관위 안에는 선거사범으로 벌금·집행유예를 받을 경우 선거권·피선거권을 각각 2년~6년 동안,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에도 형집행 종료 뒤 4년~10년씩 제한하도록 되어 있다.

 한편 민자당은 ‘연좌제’에 있어서는 중앙선관위 안을 수용한다는 방침이다. 중앙선관위는 이번 개정안에서 ‘당선인은 물론이고 선거 사무장, 선거연락소장, 회계 책임자 또는 후보자의 가족이 당해 선거에서 매수 및 이해 유도죄, 기부 행위 금지제한 위반죄 등 부패와 관련된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선거 사무장 또는 회계 책임자가 선거비용 한도액을 초과 지출한 경우에는 그 후보자의 당선을 무효로 한다’는 강력한 연좌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관심을 모으게 될 후보의 법정 선거 비용 한도액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바 없지만, 민자당 안팎에서는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4천만~5천만원선’으로 결정되리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그러나 청와대 일각에서는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변화를 실감토록 하려면 1천만~2천만원선으로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중앙선관위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후보 개인이 부담하는 법정 선거비용을 전국 평균 6천7백만원(최고 9천3백만원, 최소 5천만원)으로 잡고 있음을 감안하면, 민자당 안이 선관위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상정될 가능성이 높다.

 돈과 조직으로 움직여온 집권당이 더 강력한 처벌, 더 낮은 수준의 선거 비용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민자당의 주장대로 ‘집권당 프리미엄’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선거 운동의 자유’에 관한 한 민자당의 개정 방향은 매우 제한적인 자유만을 허락하는 쪽으로 잡혀 있다. 이 점에서 선거 전문가들은 중앙선관위 안이 훨씬 진보적이라는 의견이다.

 우선 중앙선관위는 이번 개정안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법이 허용한 사람 외에는 일체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현행 선거법의 ‘포괄적 제한 규정’을 삭제하는 대신, 미성년자와 선거권이 없는 자, 공직자 등 당원 자격이 없는 자와 통·반장, 향토예비군 소대장급 이상의 간부 외에는 누구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후보자들이 횟수 제한 없이 거리에서 연설·대담할 수 있고, 시민단체들은 후보자를 초청해 옥내에서 후보자의 정견, 정당의 정강 정책에 관해 대담과 토론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돈 덜 쓰는 선거를 만들면서도 자기를 알릴 기회는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개정안을 마련했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중앙선관위 안의 또 다른 특징은, 입후보자가 한번에 맡은 유권자를 접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선거는 물론 각종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은 일간신문에 홍보에 필요한 광고를 할 수 있도록 하고(대통령선거 때는 1백50회 이내, 국회의원선거 때는 3회 이내, 시·도 지사선거 때는 5회 이내),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연설(지역구 의원의 경우 후보자가 1회 3분 이내에서, 시·도 지사의 경우 1회 10분 이내에서 각 1회씩)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합동연설회 개최 비용, 방송 연설 비용, 경력 방송 비용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 단체가 부담하도록 규정함으로써 후보 개인의 ‘재력’에 따라 선거 홍보력이 좌우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민자당은 거리 연설을 허용하지 않고 합동연설회를 폐지하는 대신, 개인 연설회를 무제한 허용하는 쪽으로 선거운동의 방향을 확정지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선거 외의 선거에서 신문·방송의 활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결국 민자당 안대로 한다면 개인 연설회 외에는 후보가 유권자를 향해 ‘돈 안드는 방식으로 자기를 알릴’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게 된다. 민주당 李海瓚 의원은 “민자당의 개정 방향을 그대로 적용하면 정치세력 교체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오히려 이미 지역사회에서 지명도가 높은 기성 정치인들만 유리하게 된다”라고 지적한다.

새로운 정당 출현 가능성
 청와대와 민자당이 선거법 개정 방향을 잡는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었다는 영국의 선거법은 ‘선거 부패에 대한 엄격한 감시·처벌’과 함께 ‘선거기간에 호별 방문까지 허용하는 거의 완벽한 선거운동의 자유’를 축으로 하고 있다. 현재 민자당이 확정지은 선거법 개정 방향은, 집권당으로서는 분명히 획기적인 발상이기는 하지만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정치 제도와 문화, 정당 정치의 큰 틀에 변화를 가하는 제도 개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비단 선거법만이 아니라 정당법·정치 자금법에도 큰 변화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선관위·민자당·민주당 모두가 정당 설립 요건 완화를 기본 입장으로 정하고 있는 데다, 득표 비례 전국구 제도가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진 만큼 새로운 정당들이 출현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공직자 재산 공개’로 두번째 사정 회오리 바람이 부는 가운데, 물밑으로는 제도 개혁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徐明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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