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테랑 10년의 힘 ‘현실주이’
  • 파리.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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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회당정권 ‘시장경제’ 채택으로 장기집권…사회주의의 본질 변색

‘10년이면 족하다.“ 이것은 1968년 집권 10년이 가까워졌을 때 드골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프랑스 청년들이 외친 시위구호였다. 드골은 그 때 국민투표에서 실패하자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그러나 5월10일 집권 10년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런 구호가 나오지 않고 있다.

 프랑스 역사상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정부는 1936년부터 2년간 통치했던 레옹 블럼의 국민전선이 유일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파를 제치고 사회당이 집권하게 된 것만 해도 놀라운데, 10년이나 정권을 유지했다는 것은 미테랑이 정치역량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고 있다. 현행 제5공화국 헌법(58년 제정)에 따라 대통령 임기는 7년이며, 81년에 당선, 88년에 재선된 미테랑의 임기는 95년까지 4년을 남기고 있다.

 미테랑을 격렬하게 지탄하는 소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10년이나 장기집권을 하다보면 국민들이 일종의 권태감을 느낀다는 소리가 자주 들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론조사에 나타나는 미테랑 지지도도 작년에 30~40% 안팎을 맴도는 저조함을 보였었다. 그러다가 걸프전쟁을 계기로 60% 이상으로 뛰었으나 선거자금 비리 등 국내 문제 때문에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고 있다. 4월25일자 〈르 피가로〉지 보도에 따르면, 미테랑 지지도가 3월에서 4월에 걸쳐 10%나 떨어져 55%를 나태내고 잇다.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는 여론은 49%에서 58%로 늘어난 반면, 만족을 느낀다는 여론은 44%에서 36%로 내려갔다.

 이같은 분위기를 타고 야당인 우파는 정치적 공세를 펼쳐나갈 것이지만, 중도적 온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걸어온 미테랑 · 로카르팀이 쉽게 무너질 긴박한 상황은 전혀 아니다. 미테랑 정부의 인기가 비교적 낮아지기는 했지만, 미테랑 · 로카르 두 사람에 대한 지지도는 다른 정치가들, 예컨대 우파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 전 총리 등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다. 프랑스혁명 2백주년을 맞은 89년 로카르 총리가 한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프랑스가 오늘날 원하는 정치 스타일은 여유있는 스타일이다. 덜 교조적이며, 덜 흥분하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정치는 겸손해야 한다.” 의회를 대하는 로카르의 태도는 매우 점진적이며 타협적이다. 개혁을 추진하되 강요는 않는다는 자세이며, 그것이 프랑스의 정국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개혁 추진하되 강요 않는다
 이러한 자세는 10년 전 미테랑 집권초기의 사회당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 때 미테랑의 측근이며 현 문화 · 커뮤니케이션 장관인 자크 랑은 “프랑스 국민은 밤과 낮을 가르는 경계선을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얼마나 환희에 찬, 의욕에 가득찬 시기였는지를 느낄 수 있다. 미테랑은 공약했던 대로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사회복지와 산업국유화 정책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샹제 라 비’(국민의 인생을 바꾼다)가 구호이자 정책목표였다. 5개의 대기업과 41개의 은행이 국유화되었다. 최저임금이 오르고, 유급휴가가 늘고, 주당 근무시간이 줄었다. 고소득층의 세금은 늘었다. 81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사회다운 대승하여 절대 과반수를 차지했으므로 개혁입법 추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당정부의 이러한 경제개혁 조처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실업자가 늘고, 생산이 줄고, 수출이 안돼 무역적자가 늘어났다. 미테랑정부로서는 뼈아픈 일이었으나 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현실주의자들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이때 현실주의를 내세운 각료 가운데는 현 총리로카르(당시 농부장관)와 현 EC의장 자크들로르(당시 재무장관)도 들어 있었다.

 미테랑정부는 그때 서방진영의 테두리에 들어 있는 프랑스로서는 대세를 따르는 이외의 선택이 없으며,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실주의가 마르크스이론에 따른 이론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러한 우경화는 미테랑 집권 5년중에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때문에 사회당이 공산당과 가졌던 공동보조도 끝이 났고, 따라서 집권초부터 내각에 영입되었던 4명의 공산당 각료도 떠나버렸다.

 사회당은 정책전환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다소 회복하였지만, 86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유지에 실패함으로써 우파와의 동거시대를 맞이했다. 미테랑 대통령의 동거 상대가 된 자크 시라크총리는 29개의 국영기업ㅇ르 팔아(총액 2백13억달러) 민영화하는 등 우파의 정책을 과감히 추진했다. 미테랑은 매사에 간섭하는 자세를 피하고, 점잖게 지켜보다가 가끔 자기주장을 세워보임으로써 국민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러나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좌우 동거시대는 어차피 지나가버릴 막간 상황에 불과했다. 88년 대통령선거에서 미테랑은 바로 시라크를 누르고 재선되었을 뿐 아니라 그여세를 몰아 하원선거에서 사회당 의석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그때 당내 라이벌 이기도 했던 로카르를 총리로 끌어들인 미테랑은 계산은 뚜렷했다. 온건한 사회당원인 로카르를 기용해야 하원의 중도파 군소 세력과 필요에 따라 제휴하는 데 힘이 덜들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시라크가 총리시절에 민영화시킨 기업을 다시 국유화하지는 않을 작정이고 보면, 로카르를 통해서 기업가 계층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려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외교 · 문화분야 치적 높은 평가
 결국 미테랑의 10년은 프랑스 사회당이 현실에 적응하여 계획경제보다는 시장경제를 택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어버린 시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념적 변화를 확인하려는 듯, 로카르내각은 중도파 인사 몇 명을 입각시켰다. 또 최근에는 국영 기업체가 민간자본을 소수 자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트겠다고 발표했다.

 사회당의 이러한 변화와 병행하여, 지난 10년간 일반 국민의 정치이념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근 시사주간지《렉스프레스》(4월18일자)가 실시한 여론조사 통계에 따르면,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고 자처하는 응답자가 81년 2월에 20%였던 것이 91년 4월에는 30%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좌파로 자처하는 응답자는 81년에는 40%, 91년에는 36%로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고, 우파라는 응답자도 30%에서 28%로 줄었다.

 표정이 근엄하고 빈틈이 없어보이는 미테랑 대통령은 74세의 나이만큼 늙어보이지만, 말씨는 정정하여 정력적인 지성인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국민들은 그를 “통통”(tonton : 아저씨0이라고 불러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정치가로서 여러 고비를 넘겨왔으며 필요에 따라 이재를 활용하는 미테랑의 솜씨는 탄복할 만하다.

 정치 · 경제분야에서는 으레 논란이 많게 마련이지만, 미테랑의 외교와 무화분야에 있어서의 치적은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EC통합을 추진하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서유럽의 정치통합, 동유럽의 앞날을 내다보는 데 있어서도 항상 선도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해왔다. 걸프전쟁 대는 이장을 선명히 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구르드 피난민을 구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일 먼저 한 선진국 지도자도 미테랑이었다. 또 냉전 후 세계질서의 재편을 계기로 요즘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테랑 정책은 프랑스 외교의 큰 변화를 뜻한다.

 문화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예술활동이 전개되는 지방도시의 문화예술센터 설립을 큰 치적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또 널리 알려진 루브르박물과 개수공사와 현대 감각을 살려 설계된 그랑드아르시 건물, 아랍세계연구소, 재무성 건물, 바스티유오페라 등 색다른 건물, 바스티유오페라 등 색다른 건물의 신축은 문화유산을 빛나게 함과 동시에 시대의 변천에 걸맞는 도시건축미를 살리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사회당 자체의 장래를 살펴볼 때 미테랑의 10년은 두가지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 하나는 사회주의 이념 포기에 대해 반발하는 당내 세력 때문에 생기는 사회당 내부의 긴장이다. 또 하나는 1995년 대통령선거 대 당을 대표할 후계자 문제이다. 로카르는 마땅히 유력한 후보이겠으나, 과연 누가 후보가 될 것인지, 또 그 후보중심으로 결속이 잘 이루어질 것이지가 주목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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