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재벌 손잡고 ‘경제 대통령'창조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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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경제 활성화 등 신경제 돕기 적극 나서

한국 어린이들에게 金泳三 대통령의 인기는 어느 정도일까, 아마도 그리 큰 점수는 나오지 않을 듯싶다. 왜냐하면 김대통령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에다 특별소비세 10%를 부과해 그만큼 초콜릿 값이 올라가게 했기 때문이다. 소주를 즐겨 마시는 애주가도 마찬가지일 성싶다. 고급 위스키에 붙는 주세는 150%에서 120%로 내려간 반면, 소주에 교육세가 10%추가된다는 사실은 일반 서민 주당들에게 결코 반가운 일일 수 없다.

 물론 이는 단순한 우스갯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초콜릿이나 소주 같은 단순 기호 식품에서 벗어나 법인세나 부가가치세 같은 세제의 핵심 내용에 이 잣대를 적용해 보면 어떨까. 결코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각종 개혁 조처와 공직자 사회에 대한 사정.숙정 바람에 지금은 거의 잊혀지고 있지만. 김대통령이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취임 초까지 가장 강조한 것은 '정치 대통령'이 아니라 '경제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담화가 경제 소생과 새로운 도약을 호소하는 신경제 관련 담화였다는 사실은, 김영삼 정부가 경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김대툥령은 3월19일 담화에서 '신경제 1백일 계획' 및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비장한 각오''경제를 되살리는 일이 대통령으로서의 역사적 사명''엄숙한 민족 생존의 문제'같은 말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경제 전쟁에 뛰어든 경제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으나, 북한의 핵금조약(NPT) 탈퇴로 인한 안보위기상황과 1차 재산공개에 따른 정치권 파동을 거치며 겨엦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는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다. 아마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김대통령 모습은 한동안 더 묻혀져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실명제 실시조차도 경제 우선 논리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비판론이 강했다. 민자당의 민정 .공화계는 이를 실명제가 가진 경제적 명분을 이용한 정치적 '친위 쿠데타''무혈 쿠데타'라고까지 생각했다. 민주계 또한 실명제 실시에 정치적 의도가 짙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청와대의 한 실무 관계자도 "실명제 실시에 정치적 의도가 강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고도성장 정책 포기한 것인가
 실명제가 지닌 정치적 의미는 결국 경제적 의미로 귀납할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계의 한 중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통령의 지금까지 면모는 정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대통령은 실명제라는 카드를 던짐으로써 경제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경제에 대한 이상과 현실, 제도와 철학의 문제가 지표 위에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실명제 실시는 국민으로 하여금 경제 문제에 대한 집단적 문맹 현상으로부터 상당수가 눈을 뜨게 되는 상황으로 바꿔 주었다. 이는 국민 쪽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경제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청와대와 경제팀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경제 지표를 주목하는 국민의 눈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영삼 신경제가 구체적으로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92년 11월16일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후보는 민자당 국책연구원이 주최한 '경제 개혁의 바람직한 방향'을 주제로 한국민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행정.재정.금융 제도 개혁 △경제 행정조직 개편 △전국민의 의식 개혁을 통한 신경제 구상을 밝혔다. 아울러 그는 "신경제를 실현할 경우 우리나라는 앞으로 5년간 연평균 7~8%의 성장, 94년 이후 물가상승 3% 선 억제, 국제수지 흑자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또한 98년에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서 1인당 국민소득은 1만5천달러에 이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몇 달 동안 3% 선의 물가상승률과 7~8%의 경제 성장률은 김영삼 신경제를 나타내는 대표적 경제지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 관계자는 물론 경제 관련 부처의 어느장관도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4% 정도의 경제 성장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튀어나오는 형편이다.

 李經植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비롯한 몇몇 경제 각료는 지난 9월23일 MBC 텔레비전이 주최한 경제대토론회에 나와 "선진국의 예를 보아도 4% 선의 경제 성장이 더 안정적이고 바람직하다"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같은 자리에서 반박당했다. 이 날 토론회에 참석한 대우그룹 金宇中 회장은 "경제 수준이 다른 선진국과 한국을 어떻게 똑같은 기반 위에서 비교하느냐, 선진국은 이미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바탕 위에서 4% 정도의 안정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인데, 중진국인 우리가 4%의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면 언제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청와대가 최근 들어 신경제 1백일 작전의 성과에 대해 말하기를 피하는 것도 이런 기류를반영한 것이다. 최근 청와대의 한 실무관계자는 김영삼 정부의 3대 기조를 다음처럼 설명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 경제 정책의 최대 목표이자 결실은 낙후된 한국 경제의 구조 조정에 있다. 지금은 구조 조정기이다. 현정부 정책의 골격은 첫 단계가 정치.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다. 그 다음이 경제 개혁의 밑바탕 위에서 경제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 다음이 통일정책 추진이다."

 청와대가 현정부 경제 정책의 우선점을 구조 조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고도 성장 정책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한 이는 신경제 1백일 작전이 성급한 의욕에 의한 낭만적 발상이었다는 점을 사실상 시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관계자는 또 "경제 지표에 너무 민감하다. 그것에 일회일비하지 않는 국민적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청와대의 후퇴 기류는 내년 예산에도 잘반영돼 있다. 예년처럼 13.6%의 평범한 증가율을 보인 43조2천5백여억원 규모의 이번 일반 예산은, 개혁적 예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예산의 25%를 차지하는 국방비, 25%를 넘는 교육비.인건비등의 경직성 경비가 대종을 이루었다. 이에따라 경제구조 조정에 필수적인 사회간접자본투자(SOC)에 쓸 돈을 구하기 위해 재정투융자특별회계가 올해보다 무려 60% 이상늘어 5조원대로 짜여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공공부문에서 돈을 풀겠다는 경기 측면과, 물류 비용을 줄여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측면이 동시에 작용했다.

"총수님들이 나서서 투자해 주셔야..."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이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물론 금융실명제로 인한 경제 인식의 변화, 현정부에 대한 지지도를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는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적 평가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재계는 9월14일 전국 경제인연합회 회관에 崔鍾賢 전경련 회장 주재로 범재계 회의를 가졌다. 이 날 회의에서 의결한 사항 가운데 핵심은 무역수지 흑자 1백억달러를 조기에 달성하기로 목표를 설정하고 수출 증대에 총력전을 펼치기 위해, 범경제계가 참여하는 '국가 경쟁력 강화위원회'를 9월중에 전경련 상설 기구로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30대 그룹 기조실과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수출 전략 대책회의'도 가동할 방침을 세웠다. 이 날 회의는 더 나아가 국내 경기를 민간이 주도하기 위해 자율적인 투자.수출 증대 운동도 펴나가기로 했다. 경기 활성화는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팀이 모토로 삼고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던 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날 회의의 결정 사항은 청와대와 정부 경제팀들의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으로만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장길에 나선 朴龍學 무역협회 회장을 제외한 경제 3단체 회장을 제외한 경제 3단체 회장과 李健熙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具滋暻 럭키금성그룹 회장, 丁明植 포항제철 회장 등 15명이 참석해 국내 경제계가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모두 발벗고 나선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경제계의 모습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기민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경식 부총리는 16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빠르면 내년중 여신관리 대상을 30대 대기업에서 10대 대기업으로 축소 △10대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군에 대해, 현재 여신관리제도에 의해 구제하는 기업투자 및 부동산 취득의 사전 승인제도를 폐지하고 △주력업종 선정 문제는 기업의 자율적 판단에 일임한다는 등 기업인들의 입맛에 맞는 대책을 선보였다. 이런 내용들은 대기업군에 대한 정부의 집권 초기 방침에 비해 태도가 상당히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14일 전경련 확대 회장단 회의와 16일 이부총리 발언은 정부와 재계사이의 충분한 사전교감 아래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 날 회의의 구체적 안건은 최종현 전경련 회장이 선경그룹 회장 자격으로 김대통령을 개별 면담 (9월6일)한 직후 결정된 것이다. 최회장은 14일의 범 경제계 방침이 대통령에게 '화답'하기 위한 무리한 투자와 수출증대 독려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아부라 하더라도 국가에 대한 아부라면 아부가 아니다. 대통령도 수출증대를 위해서는 정경유착도 좋다고 했다"라고 답했다.

 경제 대통령으로 전환하기 위한 첫걸음이 대기업 총수들과의 유화국면 조성에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약간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김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대기업군에 의한 경제력 집중에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왔고, 김대통령의 측근 인사인 韓利憲 공정거래위원장 또한 대기업을 규제하는 데 앞장서 왔다. 이 때문에 새 정부와 재벌들과의 관계는 한동안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8월17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의 단독 면담을 시발로 △기아 金善弘 회장(25일) △럭키금성 구자경 회장(31일) △포철 정명식 회장(9월2일) △대우 김우중 회장(3일) △한진 趙重勳 회장(4일) △선경 최종현 회장(6일) △동아 崔元碩 회장(8일) △효성 趙錫來(9일) △코오롱 李東燦 회장(11일) △金相廈 대한상의 회장(15일) 등과 연쇄 접촉함으로써 청와대와 대그룹 사이의 냉기류는 상당히 완화되었다. 재벌 총수들과의 만남은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요청도 있었지만, 김대통령 특유의 밀어붙이기가 전형적으로 발휘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투자 활성화와 국가 경쟁력 개발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대기업 총수들과의 개별 면담이지만, 따로따로 만나야 동기 부여가 생기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대통령은 뛰어난 전문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문민 정부가 되면서 재벌에 대한 영향력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과거와 달리 대기업의 영향력이 커져 있는 상태이다. 장관들도 '총수님들이 나서서 투자를 해주셔야 경제도...'라고 깍듯하게 존칭어를 붙여 말하는 형편이다"라고 말해 새 정부의 경제정책 추진 역시 대기업의 협조 없이는 힘들다는 사실을 자인했다.

"청와대.대기업 관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청와대와 재계와의 관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론도 만만치 않다. 5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전경련 확대 회장단 회의에서 1백억 무역수지 흑자를 빨리 달성하자고 의결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각 대기업이 올해에 이미 추진하는 것들을 묶어 종합적으로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청와대와 대기업 사이가 바깥에 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전경련의 '국가 경쟁력 강화위원회'가 정부의 강력한 경제 정책에 맞서기 위한 대응 단체로 변하거나, 정부에 대한 요구를 앞세우는 압력 단체 성격을 띨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이제부터 경제 문제에 집중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명제 실시 시기로 여러 말을 들었던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청와대에서 가장 빨리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곳이 바로 경제수석실이다.

 청와대는 지난 20일 '신경제 추진위'16명의 인선을 확정했다. 이는 대통령선거 당시부터 발표한 사항이 지금껏 늦춰진 것이다. 아울러 신경제팀에 관여했던 학자 중심으로 13명의 신경제 전문위원도 위촉했다. 청와대는 또 신경제추진위와 전문위원, 경제 각료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회의를 매월 정기적으로 열 계획이다. 여기에는 사안에 따라 대기업 관계자들도 참석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0월 초가 되면 국민들은 정치 대통령이 아닌 경제 대통령 김영삼의 모습도 아울러 보게 될 것 같다.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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