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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난 해방운동사 잇자” 연변대 박창욱 ·고려대 강만길 교수 / “좌 ·우 통일전선 인정이 핵심”

창간 4주년 특별 ‘역사 대담’

정리.성우제 기자 ㅣ | 승인 1993.10.21(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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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대 朴昌昱 교수(66)와 고려대 姜萬吉 교수(60)는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워했다.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민족해방운동사가 공통된 연구분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통일된 역사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사명감에 두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제205 ·206호 커버 스토리로 ‘민족 통합의 노래, 김산의 아리랑’을 게재한 데 이어, 국토뿐만 아니라 역사마저 반토막 나있는 우리 민족사의 비극적 현실을 진단하고 그 극복 방법을 찾고자 두 학자의 대담을 마련했다. 지난 10월5일 서울에 온 박창욱 교수는 고려대 연구실로 강만길 교수를 찾아가 연변과 한국의 연구 현황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편집자>

박창욱 : 연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사 연구를 58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조선사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다가 58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전체 56개에 달하는 중국내 민족의 역사를 밝혀야 한다는 방침을 정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전체 56개에 달하는 중국내 민족의 역사를 밝혀야 한다는 방침을 정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북경 대학, 국가사회관학원, 연변 대학이 함께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항일 운동을 대대적으로 연구했는데, 거기에는 민족주의 계열을 홀시하는 결함이 있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문혁 10년 동안 연구가 중단되고 말았지요. 문혁이 끝나고 조선족사를 다시 연구하면서 전면적으로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80년부터 민족주의 계열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부분이 아주 늦었습니다. 지금은 민족주의 계열에 대해 비교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강만길 :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만족 사회는 민족해방운동사를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 역사를 정리하고 가르쳐서 식민지 시대에 침체되었던 민족적인 자존심 같은 것을 회복하는 학문적 노력을 무엇보다 선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광복 이후 남쪽 학계에서는 식민지 시대 해방운동을 연구할 만한 연구자들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 시대에 우리 역사를 연구한 분은 더러 있었지만 이 분들이 근 ·현대사는 거의 다룰 수가 없었으니까요. 50년대는 거의 전쟁의 시대였고, 60년대에 들어서서 광복 후에 배출된 학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이라는 개념에서보다는 독립운동사라는 개념에서 연구를 시작했지만 우익 쪽의 이야기만 주로 한 셈이죠. 3 ·1운동 연구는 이데올로기 문제가 없으니까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임시정부에 대한 바른 연구도 늦은 셈입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 세력이 여기 들어와서 다 숙청을 당했으니까요. 70년대 들어서면서 좌익전선운동에 대해서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역시 반공주의라는 것을 바닥에 깔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민족해방운동사의 일환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 운동사라고 한정해놓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연구는 그 뒤로 젊은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만, 개인이 좌익전선운동사를 제목으로 잡아서 연구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아니었습니다. 시대사에도 넣을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80년대 후반 들어오면서 세계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또 연변이 열리면서 연구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성 역사학자들이 좌익전선운동을 연구하는 경향은 없었고 완전히 새로운 젊은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지금 그들은 기껏해야 30대 후반 정도밖에 안되는 사람들인데 대단히 열성적으로 연구했습니다. 90년대 들어와서는 업적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좌 ·우익 전선을 다 넣어 민족해방운동사를 쓸 수 있을 정도가 된 게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조선의용군 역사 적극 밝혀야 한다
박 : 어느 한쪽을 뺀 채 조선 역사를 다루면 반쪽역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후예들한테 혁명 전통의 진정한 전모를 계승 못하게 됩니다. 지금은 비교적 괜찮다고 봅니다만 그래도 제한성이 있기는 합니다. 남북 정황을 놓고 보면 역사 분야에서 와전되었거나 편향된 것이 있습니다. 전면적인 연구는 지금이 시작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조선민족해방운동사야말로 남북한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어쨌든 민족은 하나니까 역사도 하나가 되어야 하지요.

강 : 남쪽에도 아직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젊은 학자들의 연구가 나오면서도 민족해방운동사를 보는 경향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3 ·1운동까지는 우익운동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고, 20년대 들어와서는 좌 ·우익 운동이 공존했고, 30년대 이후에는 주도권이 좌익전선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면서 민족해방운동사 전체를 정의하려는 경향입니다. 또 하나는 우익운동사는 종래 해놓은 대로 따로 있고, 거기에 좌익운동사가 연구되면서 그것은 그것대로 나누어진 채 서로 합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해방운동사 전체를 엮어야 할 때 한 부분은 완전히 우익운동사로만 엮어놓고 또 한 부분은 완전히 좌익운동사로만 엮어놓고, 두개를 모아 이것이 민족해방운동사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증적인 연구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민족해방운동사 전체를 보는 안목이 세워질 때라야 가능한데, 과거에 우익운동사만 연구한 사람들에게 그런 안목을 찾아내기는 어렵고, 젊은 학자들에게도 아직까지 그런 조건이 성립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민족해방운동사의 양쪽이 다 연구는 되면서도 전체로는 아직 분단된 상태인 셈입니다.

동북항일연군 1 ·2군은 ‘조선의 역사’
박 : 우리쪽 연구에서 안되고 있는 가장 큰 부분은 이동휘 계열과 초기 공산주의운동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25년 이후의 만주총국계열이 누락되어 있어요. 그걸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과거에는 그것은 무원칙적인 파쟁이라고 자꾸 얘기했거든요. 그렇게 한 뭉텅이로 묶어서 없앨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엄중한 결함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 운동이 없다면 후기 운동이 어떻게 발전되어 나왔겠습니까. 지금 20년대 부분이 연구되지 않은 것이 첫번째 문제이고, 그 다음은 민족유일당 문제입니다. 지금 연구를 시작하고 있는데 복잡합니다. 좌익 내부도 그렇고 우익 내부에서도 그렇습니다. 당의 건립 과정, 토론 과정, 마지막 분열 과정, 여기에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잘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 조선의용군 문제입니다. 저희 역시 북의 영향을 받아서 잘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쪽에 조선의용군에 계시던 김학철 ·최 재 ·문정일 씨 같은 분들이 열분 남짓 계시고, 북에서 문제가 있어서 중국으로 오신 분들도 많습니다. 조선의용군 역사를 적극 밝혀야 할 것입니다.

강 : 여기서는 지금 초기 공산주의운동, 고려공산당 ·한인사회당 이런 쪽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쪽의 자료가 나오지 않고는 어렵거든요. 요사이 젊은 사람들이 러시아에 가서 자료를 조금씩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이번에 <고려공산당 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어요. 그리고 남쪽에서는 우익운동 쪽의 경우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견해가 많이 다릅니다. 종래의 역사학에서는 임시정부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민족해방운동 전체의 전통성을 거기에다 놓아야 할 것처럼 했지요. 그런 부분이 있는가 하면 젊은 역사학자들은 임시정부의 위치를 그렇게 높이 평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실증적인 바탕 위에서 객관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임시정부는 처음에 민족적인 여망을 가지고 성립된 것이거든요. 더구나 이동휘를 비롯한 노령쪽 사람들도 참가했었고, 그게 깨지면서 침체되지 않았습니까. 그랬다가 중일전쟁 이후에 강화되는데, 강화한 것도 중요하지만 임시정부가 마지막에 가서는 연합정부 형식을 통일전선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42년 중경에서 조선 민족혁명당과 연합하고 무정부주의자들도 가담했습니다. 회고록적인 자료입니다만, 임시정부에서 연안에도 사람을 보냈어요. 연안에서도 중경에 가려 했고, 임정에서 간 사람은 장건상씨죠. 그는 거기에서 연합전선을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임시정부를 놓고 아주 일방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완전히 약화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대해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박선생님하고 의논하고 싶은 부분은 30년대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을 우리 역사에 얼마만큼 넣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란 물론 앞으로 통일된 후까지 생각해서 남북한 전체를 통틀어 하는 얘기입니다. 처음에 유격대 부분도 그렇고 동북인민혁명군도 그렇고 연합전선 ·항일연군으로 가면서도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까. 동북항일연군이 12군까지 있었고 각 군마다 우리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는데, 이를 우리 역사 속에 얼마만큼 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박 : 중국 학계에서 토론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최근의 중국쪽 결정에 따르면 1군하고 2군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2군은 완전히 조선인민혁명군으로 하고, 1군도 일부는 그렇게 쓰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해 활동했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고 동북항일연군 전체가 다 조선혁명만을 위해 활동했다고 하면 맞지 않습니다.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함께 목표로 했으니까요. 2군과 1군이 합쳐져 일로군이 되었으니까 2군하고 일로군은 조선의 역사로도 취급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은 대내적으로는 공산당하고 다른 세력하고의 연합, 대외적으로 보면 중국하고 조선하고의 중 ·조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김 구는 ‘민족주의 좌파’인가 ‘우익’인가
강 : 중국 쪽에서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군요. 그것은 아주 새로운 정보입니다. 지금 민족혁명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또 하나 잘 되어 있지도 않고 자료를 구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민족혁명당까지는 연구를 해서 우리 역사 속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가기 이전에는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20년대 말 30년대로 들어오면서 조선 공산당이 해소된 뒤 1국1당주의 원칙에 의해 동북 지방에 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광동코뮨 ·해륙풍 등에서 많이 활동했습니다. 그 문제를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국 쪽에서 나온 《조선혁명열사전》에는 김 산, 이철부(한위권), 양 림도 들어가 있는데 대부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람만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조선의용군 연구를 하게 되면 그런 문제가 나올 것입니다.

박 : 중국의 조선 사람들은 한몸에 두개의 사명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30년 이전까지는 민족주의 운동도 공산주의 운동도 모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중국내 조선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기네 향토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중국과 공통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맨 처음 올린 깃발은 조선혁명입니다. 30년대 중국공산당 가입 이후에는 공개 깃발은 중국의 해방이었습니다. 비록 그렇게는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조선 독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와서 그 인물들을 조선에서는 조선 역사로 쓰고 중국에서는 중국 역사로 써야 할 것입니다. 이철부는 원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었지만 28년 상해에 와서 활동하다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습니다. 43년 중공 중앙에서 그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거기에 ‘조선공산당의 창시자이며 중국 공산당 화북성 서기’라고 씌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중국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 : 김 산도 동북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직접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직 좌익전선의 연구가 일천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우리 역사 속에 거의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당연히 넣어야지요.

박 : 당시는 국제주의 노선에 따라 중국혁명을 함으로써 조선혁명을 한다는 이념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한몸에 두가지 사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포된 함의는 조선혁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조선족 역사를 쓸 대는 꼭 이것을 포함시킵니다. 조선족만의 특수한 부분이지요. 지금 우리쪽의 결함은 임시정부에 대한 연구가 적은 것입니다. 과거의 영향도 있고 해서…

강 : 여기서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우익 세력을 대체로 민족주의 좌파였다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민족주의 세력이 20년대 신간회 활동에서부터 좌우파로 나뉘어지고, 신간회에서 활동한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을 민족주의 좌파로 보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민족유일당 운동과 같이 20년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일어났고 거기서 활동한 민족주의 세력을 그런 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혁명당이 성립되는 과정을 보면 우익과 좌익이 함께 참가하고 있습니다.

박 : 우리는 자산계급 좌익 또는 소자산계급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구 쪽은 여기서는 비타협적이라서 민족주의 좌파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익으로 봅니다.

‘연합정부’가 해방 조국에 왔다면 분단 없었을 것
강 : 민족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떨어져나간 세력이 나중에 김 구 세력과 합쳐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임시정부의 여당이 됩니다. 국내에 있던 우익은 광복후 한민당이 되는데 이들과 놓고 보면 정강정책에서 상당히 좌파적인 데가 있습니다. 토지국유화라든지 중요 산업 국유화를 주장하는 면에서요. 임시정부도 그랬습니다. 건국 강령에도 다 나오고. 그래서 이를 민족주의 좌파라고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박 : 광복 이후의 정황을 놓고 보면 이승만 우파가 있으니 다른 문제가 됩니다. 이것까지 합치면 새롭게 봐야 합니다. 과거에는 김 구를 우익으로, 민족혁명당을 좌파로 봤습니다.
강 : 그런데 사실 민족혁명당을 주도한 사람들, 가령 김원봉 윤세주 윤징우 이런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등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밝혀지면 이런 문제가 모두 해소되고 체계가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도 논문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박 : 과거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임정이 과연 무슨역할을 하기는 했는가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견해가 좀 달라졌습니다. 42년 이후의 연합정부를 높이 평가해야겠다는 것이지요. 만약 연합정부가 해방된 조국에 왔다면 지금처럼 분단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임시정부를 경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임정의 초기와 후기는 많이 다릅니다.

강 : 우리 민족해방운동사를 어느 시기까지는 우익 중심이었고, 어느시기부터는 좌익 중심어었다라는 식으로 보는 견해와, 좌익과 우익이 민족해방운도전선 내에서도 분리되어 있기만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연구가 덜 된 때문입니다. 35년간 지속된 민족해방운동 전체를 좌우의 통일전선운동 중심으로 엮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1운동 이후 좌 ·우익 전선이 생겼지만 임시정부가 성립된 것 자체가 좌 ·우익 전선의 협력에 의해서 가능했습니다. 20년대 들어 우익전선의 일부가 타협주의로 떨어져 나가니까 국내외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좌익전선이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움직임이 신간회 ·민족유일당 운동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것의 줄기를 잡아 민족해방운동전선을 엮을 수 있습니다. 30년대 들어와 국외에서는 해소되었지만 곧바로 해외 전선, 특히 중국 관내 전선에서는 32년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35년에 민족혁명당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나중에 조소앙 세력 등이 떨어져나가지만 조선 민족전선연맹이 이어집니다. 우익은 우익대로 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모였다가 그것이 다시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해 7당회의로 갑니다. 이후 41년인가요. 중경에서 김 구와 김원봉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그 다음 42년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일단은 민족전선연맹과 광복전선이 합치게 되고 그 여파가 연안에까지 퍼졌습니다. 물론 일본의 만주침략 대문에 전선이 분리되기는 했지만 만주지방에서도 조국광복회가 생기면서 이것도 분명히 통일전선 노선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자산계급과의 연합도 천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앞으로 우리 민족해방운동사를 정리하고 체계를 세울 때는 좌 ·우익 전선의 활동을 각각 구명하되 그런 통일전선운동을 핵으로 삼아 엮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광복 후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지만 적어도 8 ·15 이전까지는 전체 노선이 그렇습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운형 중심의 건국동맹 활동 등을 들 수 있지요.

박 : 하나로 통일된 역사를 써야 합니다. 연합정부가 건립된 후 조선의용군도 임시정부를 숭배했습니다. 김구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습니다. 연합정부가 확실히 작용해 그때는 단일된 형상으로 나타났지요.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전혀 연계가 없던 동북항일연군입니다.

강 : 41년 무렵에 조선의용군 쪽에서 동북 쪽과 연계를 짓기 위해 사람도 파견했지만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소련으로 갔기 때문에 연결이 안됐지요.

박 : 시기마다의 운동을 실사구시적으로 밝혀 통일적이고 유기적이 역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도 민족주의를 계승해서 나왔지요.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계승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20년대에는 좀 싸우기는 했지만 민족 모순이 주요 모순이라는 전제에서 연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이라는 대국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으니까요.

강 : 그러니까 민족해방운동 과정이 광복 이후의 분단 이념으로 이해 그 자체가 소급해서 분단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물론 양 전선이 대립해서 싸우기도 했지만, 결합하려는 움직임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버리고 대립한 것만 강조한 셈이지요. 광복 이후의 분단 상황이 소급해서 역사를 분단시킨 것입니다.

이철부 ·이 용 ·김규광 ·김 산의 역사 밝혀야
박 : 그렇게 분단된 역사를 써서는 안됩니다. 분단된 역사에서 매몰된 인물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철부는 중국공산당 역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3차 중국공산당 노선인 왕명 노선을 반대한 사람이 이철부입니다. 모택동이 이철부에게 직접 얘기했습니다. “북방의 철부노선 남방의 라명 노선, 좌경을 막아내는 데 당신네들이 아주 수고했다.” 이철부가 그때 하북성위와 당 중앙에 제출한 문헌이 있는데 왕명 좌경노선은 실패 노선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철부의 사상이 통일전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추세로 보면 통일전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자꾸 공산주의라 얘기하지만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을 많이 했습니다. 동북 정황을 놓고 보면 공산주의자가 더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무장투쟁도 강고히 하고. 이것을 그저 공산주의라고 무시해버리기만 한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 : 이철부의 국내 활동, 곧 전반부와 후반부인 중국에서의 활동을 합쳐서 전기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철부는 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 : 물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철부뿐만 아니라 김 산과 이 준의 아들인 이 용 등 훌륭한 활동을 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분들의 역사를 마땅히 연구해야지요.

강 : 여기에 돌아와 사망한 김규광도 완전히 매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상당 기간 그가 《아리랑》에 나오는 김충창인 줄 몰랐습니다. 김규광은 글을 많이 썼는데요.

박 : 국공내전 때 그의 처가 홍콩을 거쳐 피난갈 때 일기를 포함해 그의 글을 모두 가지고 갔었답니다. 월남으로 나가다 땅에 파묻었는데 그걸 끝내 그걸 잃어버렸습니다.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강 : 저런 저런…. 김규광의 글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김규광은 일류 이론가지요. 김 산을 사회주의자로 만든 것도 그인데….

박 : 김 산은 원래 중산 대학 의학원에 들어갔다가 법학원으로 옮겼습니다. 김규광이 법학원에 있었거든요.

강 : 그런 역사가 전부 묻혀버렸어요. 지금 강의를 하면서 그 얘기를 하지만 학생들은 다 모릅니다. 김 산이 죽을 때 그 죽음을 증언한 사람이 정율성인데, 정율성이 《아리랑》에 나오지 않아요.

박 : 정율성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니까요.

강 : 약산 김원봉이 중경에서 왜 태항산으로 가지 않았는지 궁금해요.

박 : 조선의용군 가족 문제도 있었지만, 하나는 통일전선 때문입니다. 주은래 ·동필무가 “여기에 다 오지 말고 거기 있으면서 임정 사업을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통일전선 정책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마지막에는 장개석도 연합하라, 통일하라고 했고 중국공산당도 연합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경에서 중국공산당과 임정의 관계가 괜찮았습니다.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강 : 그런 사실들을 밝혀주십시오. 그걸 밝혀야 임시정부의 위치와 여러가지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 역사 인식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는 나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제 해야 할 과제는 구체적으로 있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해서 분단국가주의적 인식을 넘어서서 통일민족주의적인 역사 인식으로 돌아설 때 비로소 옳은 역사가 밝혀지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다소 객관적인 처지인 연변 역사학회의 연구가 기대됩니다.

박 : 그것은 결국 여기 계신 연구자들이 해야 합니다. 저희는 시집간 사람들입니다. 역사는 본가에서 써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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