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토사구팽에 중견간부 서럽다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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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50대 실업 급증… 사회 불안 요인

서울 서초동 법원 근처에 있는 한 건물 5층에는 지난 4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모여 남몰래 고통을 삭이는 중년 신사 65명의 사무실이 있다.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하나같이 수심 가득찬 얼굴로 신문을 펼쳐보고 있거나 구석구석에 2~3명씩 둘러앉아 진로에 관해 얘기를 주고 받는 이들은, 지난 5월 동부그룹 산하 (주)한국자동차보험에서 사실상 정리해고 대상이된 간부사원들이다. 6개월 전만 해도 본사 부장 · 차장 · 과장, 전국 대도시 영업소 지점장 등 굵직한 직함을 갖고 있던 이들은 벌써 1백20여일째 이곳 임시 사무실에 모여, 평생을 바쳤던 회사의 처사를 원망하며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46세에서 53세에 이르는 이들 관리직사원에게 회사측이 강제 사직, 또는 유령 보직 · 지방 보직 발령을 내어 사실상 정리해고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은 지난 2월이었다. 87년부터 내린 5년간 흑자 가도를 달리던 이 회상의 경영사정은 92년 들어 처음으로 악화되면서 3백65억여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 회사측은 경영난 타개책으로 관리직 사원 대량감원을 구상했고, 지난 2월 간부사원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동부인 육성 특별교육’ 참석대상에서 전체 관리직 사원의 3분의 1에 달하는 1백30여 명의 3급 이상 간부들을 배제함으로써 이들이 정리해고 대상자임을 예고했다.

 이후 교육에서 제외된 일부 지점장에게는 정식 직제에 없는 보좌역 · 조사역 등 이른바 유령보직 발령이 내려졌다. 나머지 직급 간부들에게는 5월부터 퇴사 종용이 시작됐다.

 정리해고 대상이 된 1백30여 간부사원은 회사측에 ‘퇴직금을 동결하고 임금 삭감으로 경영 적자의 고통을 나눌테니 일자리만은 뺏지 말아달라’고 연명으로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60여 명이 실의에 빠져 집단 사직했고 나머지 42명은 끝내 사직을 거부했다. 결국 회사측은 사직에 응하지 않은 42명에게 유령 보직, 무연고 지방 영업직 발령 등을 내는 방법으로 맞섰다. 본사 부장급인 1급 갑의 경우 전영춘 · 신정순 · 손진우 씨는 각각 광주 · 부산 · 포항 지점의 손보영업담당(평사원급)으로 발령을 냈다. 이 세곳 지점장은 모두 본사 차장급인 입사 후배들. 게다가 발령지에서는 책상도 업무 배정도 해주지 않았다.

중년 65명의 ‘명예회복’ 절규
 견디다 못한 42명은 7월 14일자로 사직서를 제출한 채 함께 임사 사무실에 모여 명예회복운동에 나섰다. 이미 사직 종용에 응한 간부들 중 25명도 뒤늦게 이들과 합세했다. 이들은 아직까지 퇴직금과 8~10월분 급여를 받지 못한 채 회사를 상대로 기약 없는 원상회복 노력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40대 후반 ~50대 전반이 대부분으로 83년 자동차보험 다원화 때 다른 회사의 집요한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한 채 오직 회사 발전만을 위해 10~30년씩 장기근속한 자들로서,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데다 자녀들이 대학에 다니거나 결혼적령기여서, 사회적으로 명예가 목숨보다 소중하며 경제적으로 가계지출이 많은 연령입니다. 또한 이제 직장을 떠나면 재취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회사밖에 모르는 성실한 근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2~6년씩밖에 남지 않은 정년을 앞두고 명예회복과 원상회복을 통해 남은 기간이나마 회사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퇴직을 강요받는 직원 일동’이라고 끝맺은 이러한 메아리 없는 절규를 임시 사무실 벽에 붙인 채 이들은 초조한 모습으로 오늘도 구제를 호소하고 있다.

 적게는 10년에서 많게는 30년까지 직장에 몸바쳤던 40 · 50대 중년층이 회사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것이다. 산업구조 조정기에 오랜 경기침체까지 겹쳐 감량 경영과 조직 개편에 나선 기업들이 감원의 칼날을 중간관리층인 40 · 50대에게 집중적으로 들이대는 경향이다.

 평생을 통해 가장 안정된 수입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한 시기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중년층은 그러나 말이 없다. 임시 사무실을 내서 집단적으로 자구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한국자동차보험 관리직 사원들은 극히 예외에 속한다. 대부분의 40 · 50대 실직자들은 ‘사회 불안’의 불씨가 되어 묵묵히 사회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 ㄷ그룹 건설회사에서 50대 초반의 동료 사원 1백30여명과 함께 최근 정리해고된 박만수씨(54)는 인생이 송두리째 파괴됐다는 좌절감에 잠 못이루는 나날을 보낸다. 63년 입사해 30여 년간 국내외 건설현장에서 근무해온 그는 지난 83년 회사측으로부터 1년간 중동 근무 발령을 받았을 때 아내를 잃었다. 그 기간에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고 어렵게 마련한 집까지 팔아 도피해 버린 것이다. 귀국후 그는 아내를 법정에 세웠고, 85년에 합의이혼했다. 그는 전세방을 전전하며 맏아들을 대학에 보냈으나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둘째아들의 진학은 포기할 지경이 되어 해직과 진학포기라는 고통으로 부자가 눈물을 삼켜야 했다.

 고려화재해상보험에서 과장으로 일하던 박완순씨(51)는 얼마전 정리해고를 당했다가 충격을 못이겨 정신질환으로 기독교 계통에서 운영하는 한 정신요양원에 수용된 경우이다. 현재 박씨의 부인은 남편이 졸지에 정신병자가 된 것은 회사의 정리해고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회사측을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다양한 감원 프로그램 등장
 최근 번지고 있는 감원 바람은 대기업 ·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눈치 보지 않고 가릴 것 없이’ 진행되는 양상이다.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체들은 임원직은 15%, 관리직은 5~10% 정도를 감축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두고 지난해 말부터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감원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감원 사태는 제조업체를 낀 대기업 사무관리직 외에, 신분보장이 비교적 잘 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융기관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상업 · 한일 · 서울신탁 등 대다수 시중 은행은 올 들어 각각 1백~2백명대의 40 · 50대 관리직을 대상으로 감원 작업을 벌여왔고 11월부터 새로운 퇴직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감원 방식도 다양하다. 직권해고 · 권고사직 등 ‘거친’ 방법이 동원되는가 하면 명예퇴직 · 희망퇴직과 같은 ‘신사적’ 방법을 쓰는 회사도 있다. 최근 금융계에서는 안식휴가제도가 감원의 한 방식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지난해 상업은행에서 40 · 50대 장기 근속자를 대상으로 실시해 일부를 퇴직으로 연결시킨 이 제도를 신탁은행도 금년 11월부터 도입했다. 근무 경력 20년 이상, 직책 3급(차장)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이 휴가에는, 회사측이 근무 능력이 저하됐다고 판단하는 대상자들에게 직권으로 6개월간 ‘장기 명령휴가’를 준 후 태도에 따라 휴직시킬 수 있도록 해 감원의 길을 터놓고 있다.

 이처럼 최근 확산되고 있는 40 · 50대 관리직을 상대로 한 감원 선풍을 두고 ‘중간관리자 수난시대’라는 신조어가 나돌기도 한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 동향 구조에 따르면 40 · 50대 실업자는 7만8천여 명으로, 갈수록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 사회에서 40 · 50대가 감원의 집중표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 전문가들은 이 연령층이 60~70년대 고도성장기에 기업들이 한창 부피를 키우던 때에 입사해 절대 인원 자체가 워낙 많았다고 강조한다. 성장이 둔화한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이들이 설 땅이 좁아지는 데다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으로 승진할 기회는 한정돼 있어 심한 병목 현상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감원 대신 조업단축 택한 폴크스바겐사
 결국 기업처지에서는 불황 탈출을 위해 신기술 · 신경영기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를 중용하려는 추세이다. 말하자면 40 · 50대 관리직 수난의 다른 한편에는 이들이 노동조합원이 아니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실제로 감원ㄴ이 진행되는 기업들 중 일부 보험 · 금융업계를 제외하고는 노조가 이 문제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결국 ‘기업이 살려면 40 · 50대를 집중 감원할 필요가 있다’는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경제 회생 논리와 함께 기업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40 · 50대 감원 선풍이 중요한 사실을 미처 보지 못한채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이들은 대부분 고학력자인 데다 고도성장기의 주역으로 일했던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이들을 무위도식하도록 내쫓는 것은 국가적 낭비일 뿐만 아니라, 가족 부양 책임이 가장 큰 가구주이자 사회지도적 연령층인 이들의 방황이 사회 불안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 박영기 교수는 “기업은 경기가 어렵다고 고용 자체를 부담으로 보는데 고용을 유지하는 것은 생산을 위해서만 아니라 유효수요 창출 기회라는 점에서도 기업에 이롭다. 경쟁력 제고를 강조하지만 사회안정이 전제되지 않은 경쟁력 제고란 있을 수 없다. 흔히들 서독 경제를 모델로 얘기하는데, 그들을 경쟁에서 따라잡으려면 고용 문제도 그들의 예를 따라잡아야 한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인 폴크스바겐사는 최근 경기가 어렵자 기업주가 노조에 대량해고와 조업 단축 중 택일을 요구했고, 그들은 조업 단축으로 고용을 유지한 채 같이 살아 남았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전개된 40 · 50대 관리직 감원 바람만으로도 유형 무형의 사회적 문제점이 상당히 심각하게 파생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한창 일할 나이의 40 · 50대 가구주들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 대도시 동시상영 극장이나, 공원, 다방 같은 곳에서 대낮에 배회하는 모습이 부쩍 늘었다.

 40 · 50대 실직 문제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보이지 않는 부작용이 더욱 많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대부분 가구주인 이들은 아무런 예고도 준비도 없는 가운데 실직을 당해 하루아침에 회사 · 사회 · 가족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다.

 40 · 50대 가구주의 실직은 남 모르는 가운데 이처럼 가족 구성원들의 실의 · 좌절로도 연결되어 사회불안 요인을 가중시키고 있다. 실직된 가구주 당사자는 화병 · 불면증 · 우울증 같은 신경 계통 증상에 시달리며 병원문을 두드리는 예가 많다. 이른바 ‘실직증후군’이라 불리는 이런 증상은 40 · 50대 실직자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신경정신과 민성길 과장은 “50대 전후에 직장을 그만둔 뒤 화가 치밀어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 대개 회사에 배신감을 느껴 우울증세가 나타나야 이곳을 찾으므로 그 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고통을 참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직이 원인이 된 증세인 만큼 최대한 빨리 새출발하는 것만이 완쾌하는 지름길이다”라고 밝혔다.

단순직 택할 수 없는 현실
 건강은 물론, 그에 앞서 가족부양을 위해서도 40 · 50대가 새출발의 길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이들의 최대 고민과 관심사도 새로운 일자리이다. 그러나 40 · 50대 실직자는 젊은 층이나 정년퇴직한 60세 이상 고령자들보다도 새 일자리를 찾는 일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젊은 실업자의 경우 전직할 기회도 많은 편이고 가족부양 부담도 40 · 50대보다는 덜하다. 또한 대개가 중견간부 출신인 이들은 고령자가 노후 소일을 위해 큰 부담없이 들어가는 단순직 같은 곳은 현실적으로 택할 수 없다. 40 · 50대 실직자들로서는 곧 ‘최소한 기존의 안정된 수입원에 버금가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일이 관심사인 것이다.

 그러나 전직하려 할 경우 경리직 · 전산직 · 설계직과 같이 특별한 경륜이나 기술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대수준’에 걸맞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대기업 자재 부서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 지난 3월 회사측의 부서통폐합 조처로 실직한 권재만씨(44)는 전직을 원하지만 아직까지 새 직장을 못 구한 고충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회사에서 16년간 배운 기술은 결국 그 회사를 떠나니 무용지물이었다. 채용 계획이 있는 중소기업체들을 찾아가 16년의 자재분야 노하우를 설명해도 받아주질 않았다. 퇴직금 이라햐 구멍가게 하나 꾸릴 것도 못돼, 시간을 허송하느니 사업자금 마련과 식구들 끼니라도 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얼마전부터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당 3만원을 받고 일하고 있다.”

 이같은 전직의 어려움 때문에 대다수 중 · 장년 실작자들은 전문기술자격증 취득이나 개인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퇴직이 예고된 것이 아니라서 준비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외국계 회사처럼 퇴직 때 특별 보너서(전별금)를 듬뿍 얹어 받은 사람들은 가게라도 번듯한 곳에 구할 수 있지만, 중도퇴직금 외에 통상 3개월 임금 수령으로 끝내는 대부분의 국내 기업 실직자들은 사업을 선택할 폭이 그만큼 좁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과 학원 , 자동차 정비학원, 디자인 학원 등을 찾아 뒤늦게 기술 전선에 뛰어들려 하고 있다.

 기업들의 40 · 50대 관리직 감원 바람은 지난 호황기에 정부와 기업, 근로자 모두가 아무런 예측도 준비도 하지 못했다가 불황이 닥치자 기업측이 일방적으로 사용하고있는 자구책이다. 고용 전문가들은 번져가는 감원 선풍이 경쟁력 제고와 생산성 향상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려 섞인 진단을 내린다. 한국노동연구원 김태기 고용동향분석실장은 “기업이 생산비 절감 효과를 대량 해고를 통한 인건비 감축에서 찾으려 한다면 단기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경비절감 효과가 나타나겠지만, 길게 보면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낼수  있다. 실제로 감원 정책을 쓴 기업들을 조사해본 결과 당장 사내분위기가 흐려지고 근로 의욕이 매우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40 · 50대 관리직원 중 기업이 무능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1차적으로 재교육 훈련 대상이지 해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훈련 후 전환배치 등을 통해 생산성 향상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김수곤 교수(경희대 · 경제학)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그동안 값싼 인건비 덕택에 고용합리화에 대한 개념이나 장기 인력수급대책, 재교육 프로그램도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써오던 폐단이 최근 중년층 실업증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동안 수혜자였던 기업측이 앞장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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