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몰라요 왜 죽는지 꽃가루 날라준 죄밖엔”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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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서 꿀벌 떼죽음…예고없는 과수원 농약 탓


폐수?대기오염에도 무방비…‘꿀벌보호법’ 시급
 “우우웅 우웅 우우웅…” 경북 영덕군 남정면 남정리 박우현씨(65) 집 부근에서는 일벌 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근처 아카시아 숲을 오가며 부지런히 꿀과 꽃가루를 모아 오는 날갯 소리이다. 그러나 꿀 따는 재미에 한창 젖어 있어야 할 박씨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다. 벌통 1백13개가 놓인 마당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장면 때문이었다. 수천마리는 됨직한 벌들이 날개를 떨며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어 여기저기 널려 있었던 것이다.

 

群舞가 아니라 파르르 죽어가는 모습

 “요즘 줄어든 게 이 정도요. 벌써 가마니 두 개에 죽은 벌을 가득 담아 버렸소. 좀 기다려 봐요.”

 박씨가 뒤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떼죽음 당한 벌을 쓸어담은 15kg들이 설탕부대였다. 죽은 벌을 마당에 수북히 쏟아붓고 만지작거리던 그는 “벌농사 20년 만에 가장 큰 피해”라며 허탈해 했다.

 박씨의 벌이 떼죽음당한 것은 지난 5월14일, 근처 ‘메마리’밭에 뿌린 농약 때문이었다. 박씨 말고도 남정리와 우곡리 등 농약살포지역으로부터 2km 안에 있는 양봉 농가 아홉 가구가 큰 피해를 입었다. 남정면사무소와 피해 양봉농가의 집계에 따르면 총 피해액은 벌통 4백개에 1억1천여만원. 그러나 농약을 뿌린 메마리밭 주인은 피해보상을 거절했다. 소규모 농사를 짓는 처지라 보상해줄 능력이 못된다는 것을 빤히 아는 피해 양봉 농가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벌만 바라보고 살다 이번 일로 60여통을 날려버린 우곡리 김정중씨(43)는 5월25일 밤 9시경 비가 내리는 가운데 살아남은 벌통 70개를 차곡차곡 트럭에 실었다. 15년 동안 한번도 이동한 적이 없었던 그는 “농약이 없는 곳으로 가서 올해 생계비는 건져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말을 남기고 충북 보은군의 아카시아 숲을 향해 떠났다.

 국내 꿀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아카시아 개화기를 맞아 전국의 양봉농가가 분주한 가운데 농약으로 벌들이 떼죽음당한다는 호소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요즘사고를 솎아내기 위해 뿌리는 농약 때문에 경북 일원의 꿀벌 피해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북 점촌시 홍덕동에 사는 여성 양봉가 강희남씨(48)는 지난 5월3일 근처 사과밭 주인들이 뿌린 농약 때문에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벌통 80개를 날려버렸다. 사과는 벌이 꽃가루를 매개해야 수정이 되는 작물이다. 그래서 사과꽃 필 무렵인 4~5월이 되면 수많은 양봉가들이 경북 일원의 과수원으로 몰리고 과수원 주인들도 이를 환영한다. 그러나 강씨의 벌통이 놓인 근처 사과밭 주인들은 적당히 수정작업이 이뤄지자 더 이상 결실이 될 경우 솎아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며 일방적으로 적과농약을 살포해버렸다.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과수원을 다섯 분이 나눠 경작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약을 치려면 사흘 전에 통보를 해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세명은 이를 묵살하고 약을 쳐버렸어요. 닷새 동안이나 과수원에 수정을 시켜 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통 안에 수북히 죽은 벌들을 쓸어낸 강씨는 울면서 조모씨 등 세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장을 썼다.

 이처럼 작물 결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꿀벌을 농장 근처에 가져다 놓았다가 농장주의 비협조로 벌이 떼죽음당한 예는 올들어 더욱 늘고 있다. 5월 들어서만 왜관에서 70통의 벌이 몰사했고 경북 영덕읍 신아양봉원 벌통 50개도 이렇게 날렸다. 모두 사과 적과농약 때문이었다.

 이보다 앞선 4월24일에는 전남 무안군 청계면에서 4백55통의 벌이 떼죽음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역시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목포지장에서 예고없이 뿌린 농약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벌만을 추슬러 충남 조치원 근처 아카시아숲으로 옮긴 피해 양봉가 정충채씨(50)는 당시 사정을 이렇게 밝혔다.

 “작물시험장 목포지장에서는 시험포에 재배하던 유채밭 4천5백평에 진딧물이 번식한다고 꽃이 활짝핀 상태에서 예고도 없이 농약을 뿌렸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농민이 그랬다고 해도 지탄받아 마땅한 짓을 국가연구기관에서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1백20통의 꿀벌을 잃어버린 정씨는 “다른 피해 양봉가 4명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벌이겠다”고 말한다.

 농수산부의 집계에 따르면 현대 꿀벌을 치는 농가는 5만가구를 웃돈다. 여기에는 토종벌 20만통(群)을 포함, 총 70여만통의 봉군이 있다. 이 중 2천5백여 가구가 철따라 꽃따라 한라산에서 휴전선 비무장지대까지 이곳저곳 봉군을 옮겨다니는 전문 양봉업자들이다. 최대의 ‘추수철’인 요즘 이동 양봉업자들은 아카시아 밀원을 찾아 북상중이다. 이들에게는 철칙이 있다. 과수원과 고추밭 근처, 그리고 공장이 들어선 곳에는 도시든 농촌이든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다. 대개 수십년씩 양봉업을 해온 그들로서는 환경오염에 극도로 민감한 벌들이 그려주는 나름의 ‘오염 지도’를 갖고 있다.

 

꽃가루받이만 끝내곤 농약 뿌려

 “벌치는 사람치고 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안본 사람이 거의 없다. 농약과 산림방제, 공장?생활 폐수 때문에 갈수록 벌이 줄어든다. 벌을 키우려면 식수가 좋아야 하는데 웬만한 농촌의 하천까지 농약과 생활폐수로 오염돼 어린 벌까지 다 죽어간다.”

 백암온천 근처 아카시아 숲에서 1백70통의 꿀벌을 돌보는 김상덕씨(70)가 하는 말이다. 40년 동안 이동 양봉을 해왔다는 김씨는 이제 어디로 가야 벌이 덜 죽는지 훤히 안다고 한다. 그가 벌통을 싸들고 한해 동안 이동하는 경로는 청도?창녕?백암?철원?곤지암?정선 순이다. 대개 4월부터 8월까지인데 가는 곳마다 농작물과 인가가 드문 산속을 택한다. 이렇게 조심해온 그도 올봄에는 산골 농가에서 볍씨 소독한 물을 버린 개울물에 벌이 날아갔다가 떼죽음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70년대만 해도 벌 한통을 분봉하면 1년에 서너통으로 늘어났으나 지금은 한통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김씨는 전국적으로 오염이 심해 올해는 수입된 호주벌을 90통이나 샀다고 한다.

 농약으로 벌들이 집단 폐사하는 경우 말고도 각종 폐수와 대기오염 때문에 벌의 숫자가 급격히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지에서 만난 이동 양봉업자들은 한결같이 그런 피해를 호소했다. 농약이나 오염된 물에 간 벌들은 벌통 앞에 와서 경련을 일으키며 한꺼번에 수천 수만마리씩 죽어가는 특징이 있어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구별된다고 한다.

 벌들이 떼죽음당하는 환경은 인간에게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서울대 농대 양봉과학연구소 우건석 소장은 “오염된 환경은 보금자리에서 벌과 나비를 쫓아내 ‘생물학적 평형’을 파괴시킴으로써 작물 결실을 급격히 떨어뜨린다.”라고 지적했다. 꿀벌은 꿀 화분 로열젤리 봉교 등 자체 생산물뿐 아니라 농작물의 꽃가루 매개라는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사실을 중시해 꿀벌을 보호하는 법령까지 제정했다. 미국 농무성에서는 전체 양봉산물의 경제적 소득보다 농작물 화분 매개를 통해 얻는 소득이 무려 1백50배나 크다고 평가?보고한 바 있다.

 사단법인 한국양봉협회 유영수 사무국장은 “최근 호박의 결실률이 떨어진다는 농민의 호소가 많은데 농약 때문에 꿀벌이 가지 못하는 탓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작물 중 사과 배 딸기 토마토 호박 고추 수박 등은 반드시 벌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 충매화이다. 농약으로 인한 벌들의 떼죽음이 계속 방치되면 이들 작물에 벌이 가지 못할 것이고, 앞으로 사람들이 일일이 붓을 들고 화분 매개를 시켜줘야 열매를 맺는 사태가 올 것이라는 게 양봉협회측의 주장이다.

 

“꿀에서 농약 검출되는 날 올지도”

 벌꿀이 이미 일상 식품으로 자리잡은 오늘날 환경파괴로 인한 벌들의 떼죽음이 꿀 소비자에게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꿀 채취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가짜꿀이 범람할 소지가 커지고 있다. 얼마 전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는 시중에 나도는 꿀을 성분 조사한 결과 물엿을 섞은 가짜 꿀이 상당수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또 농약이나 폐수 등 각종 오염원이 섞인 양봉샹산물이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보통 문제가 아니다. 서울대 농대 양봉과학연구소 우건석 박사는 “지난해 그런 목적으로 꿀 분석을 국내에서 처음 실시했다. 아카시아꿀 등 시중에 나도는 6종을 표본조사한 결과 개화기에 농약살포가 늘고 폐수오염에 접한 벌이 많아지면 오염된 꿀이 저장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세계 각국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중시해 꿀벌보호법 또는 앙봉진흥법 등 각종 보호법령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제도적 창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솔잎혹파리 방제용 농약을 공중 살포할 때 산림청에서 양봉농가에 알려주는 것과 농민들이 농약을 치기 전에 근처 양봉업자에 통지하라고 권고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양봉업자들은 꿀벌의 경제적 중요성은 물론 국민 건강 차원에서 오염되지 않은 꿀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에서 시급히 보호법을 제정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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