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받을 것 없는 日本型 ‘보수대연합’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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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黨 35년 집권에 파벌싸움, 금권정치 ‘못고칠 병’으로 민자당 정무조사회제 도입 검토에 자민당식 ‘정경유착’우려

 가자미도리(風見鷄).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바람개비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일본 自民黨내에 커다란 파벌을 형성하고 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會根康弘) 전총리의 별명이기도 하다.

 나카소네 전총리는 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와 후쿠다 다케오(福田糾夫)가 총재 자리를 놓고 ‘角-福전쟁’을 벌였을 때, 처음에는 후쿠다를 지지하기로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다나카에게로 돌아섬으로써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나카소네의 변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說이 있었으나 일본의 ≪文藝春秋≫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카소네는 처음 후쿠다 진영으로부터 현금 1천만엔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 다나카로부터 7억엔을 받고나서 태도를 돌변했다.”

 소위 ‘10년 전쟁’이라 불리는 후쿠다와 다나카의 파벌대결, 그 와중에서 나카소네가 보여주는 금권정치는 단적으로 일본 정치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自民黨의 35년 역사가 만들어낸 ‘이지러진 얼굴’이기도 하다.

 이달 18일 衆議院 총선을 치르는 일본에서 모든 야당과 노조들이 나카소네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카소네의 지역구인 群馬縣에 대항 후보를 옹립, ‘나카소네 타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리쿠르트 스캔들등 정경유착의 의혹에 대한 책임을 묻는 상징적인 인물로 나카소네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마저도 비슷한 한국의 民自黨이 오는 15일이면 깃발을 올리게 된다. 일본의 自民黨이 민정 · 민주 · 공화를 한데 묶어놓은 ‘보수대연합’의 모델이 됐다는 정황은 여러군데서 발견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지난 88년말 공화당의 金鍾泌총재가 비밀리에 나카소네 전총리를 만나 ‘보수대연합’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으며 나카소네도 보수통합을 권유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한 “한국의 보수신당이 일본의 자유민주당의 이름을 뒤바꿔 민주자유당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만 보더라도 30여년간 장기안정 집권을 계속하고 있는 자민당을 모델로 한 단적인 예”라고 밝혔다.

 현재 민자당 추진위가 일본 自民黨의 幹事長이나 政務調査會 체계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幹事長은 우리나라의 사무총장에 해당하나 그 권한이 훨씬 강화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政務調査會는 정책의 조사 연구 및 입안을 담당하는 부서로 우리나라의 정책위원회와 비슷하지만 黨>政>官으로 이루어지는 상하체계가 우리나라의 경우보다 훨씬 밀착돼 있고 잘 짜여진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민자당 추진위측은 경제인들과 직능별 전문가들을 정책위의 각 분야에 대폭할당, 실질적인 정책 입안이나 해당 분야의 여론 수렴을 하는  동시에 ‘정 · 재계의 밀착’이 공식화되는 政務調査會 체계의 원용을 연구하고 있다.

파벌간 대립으로 분당위기도 여러차례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정치는 일본의 自民黨에서 비롯된 파벌정치나 금권정치를 그대로 따라가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自民黨이 출범한 지 35년이나 지난 후에 생긴 民自黨의 탄생은 자칫하면 현재 자민당으로 인해 일본 정계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 고질화된 파벌 싸움, 음성적인 정치자금의 만연, 계파간의 이합집산에서 나타나는 금권의 개입이나 고위관료직의 나눠먹기식  분배 등을 바로 직수입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 현재와 같은 파벌정치가 시작된 것은 자민당이 생긴 직후부터이다. 55년 11월 자민당 초대 총재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가 각 파벌을 고루 안배한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1년만인 56년 10월에 은퇴하자 새 총재자리를 놓고 기시(岸信), 이시이(石井), 이시바시(石橋)의 3인이 경쟁을 하게됐다. 결국 이 총재선거가 自民黨의 35년 역사를 온통 얼룩지게 한 파벌, 금권, 밀실정치의 출발이 됐으며 수면 밑에서 부유하던 각 파벌이 이합집산을 거듭, 8개 사단으로 등장하게 됐다. 이들 파벌은 64년 사토(佐藤)내각이 출범하면서 5개파로 정비됐으나 2년마다 실시되는 총재선거를 전후로 제휴를 하기도 하고 각 파벌간에 심각한 대립을 하기도해 자민당이 분당될 뻔했던 사태가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이 분당의  위기를 넘기고 오늘날까지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과 밀착된 일본 보수진영의 본산인 財界의 거센 압력과 당직 및 각료직의 철저한 안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일본 각료들의  평균 임기가 1년, 길어야 2년인 것은 각 파벌의 의원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편법의 결과로 이런 나눠먹기식 안배가 결국 일본정치를 타락으로 이끈 주요인이 된 것이다.

 자민당이 장기집권으로 인해 리쿠르트 스캔들, 빠찡꼬 스캔들 같은 대형 부정을 노출시켰고 그것이 결국은 參議阮 선거에서 자민당의 참패와 오는 18일 실시되는 衆議阮 선거에서의 고전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권에도 하나의 他山之石이 될 듯하다.

 자민당의 파벌정치를 가져온 56년의 총재경선에서 정치자금을 동원, 막후 협상을 벌이고  당직과 각료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남발했던 이시바시(石橋)가 2대 총리로 등장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선거 후유증으로 인해 집권 5개월만에 결국 도중하차하고 경쟁자였던 기시(岸信)에게 총리자리를 넘겨줘야 했던 일화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한국의 민자당이 자민당의 전철을 밟을 것이냐는 것은 아직 미지수이다. 보수 신당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대통령 중심제의 나라이고 일본과 비견될 만한 파벌도 아직은 형성되지 못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3당 통합이 핵심인사인 민주당의 黃秉泰 총재특보는 “일본 계보정치에는 仁義와 義俠이 제일 기본적인 요소인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는 이런 측면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면서 “앞뒤가 다른 정치인들이 어떻게 일본과 같은 계보정치를 할 수 있느냐”고 강한 의구심을 보이기도 했다.

 민자당의 역학구도에서 민주당이나 공화당계열의 의원들이 민정당 계열에 흡수될지 아니면 역으로 민정당 세력이 민주당이나 공화당에 분산될지 현재로서는 예측불허의 상황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3개당의 어느 세력도 군소파벌로 전락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민정 · 민주 · 공화의 3개 세력은 서로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同床異夢을 하고 있는 셈이다.

 民自黨은 5월 전당대회 이전까지 盧泰愚, 金泳三, 金鍾泌 3인에 의한 공동대표체제가 될  것이므로 그 계파도 일단 민정파, 민주파, 공화파의 3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전의 당을 중심으로 한 계파분류는 점차 흐릿해지고 각기의 이해에 따라 그야말로 ‘헤쳐 모여’식의 새로운 계파가 형성될 것이 예상된다.

정치자금 · 정보기관 장악이 필수 요소

 이 경우는 당 중심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될 것이고, 파벌 형성의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누가 정치자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핵심 요소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특수한 정보’가 현실 정치에 상당한 ‘개입’을 했던 것이 사실이므로 이들 정보기관의 장악 여부도 당권 획득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민자당내에서 金泳三씨가 권력장악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김씨가 전적으로 정치자금 확보와 정보기관 장악에 얼마나 수완을 발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와 관련,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최근 민자당에서 과연 어느 세력이 당권을 잡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추측하면서 집권 경험의 유무는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집권당의 실무 경험이야말로 당내 혹은 행정부내 실질적인 파워를 형성하는 데 가장 기본적 요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체권력구조의 맥을 잘 알고 그 메커니즘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자만이 최후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권력장악의 교두보를 먼저 차지하려는 민자당내 각 세력의 치열한 각축전은 그것이 바로 한국 정치가 본격적인 파벌정치와 금권정치로 접어드는 길목이기도 하다는 진단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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