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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시대에는 상형 문자를

강태진 (한 컴퓨터 연구소 소장) ㅣ 승인 1992.06.1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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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백만명이 넘는 우리나라 개인용 컴퓨터(PC) 사용자들은 대부분 문서 작성이나 각종 정보를 습득·관리하는 도구로서 컴퓨터를 쓰고 있다. 그 정보의 대부분은 문자 형태로 입출력된다. 타자기와 컴퓨터가 일반화된 미국 등에서는 영문 필기체가 사라져가는 대신 컴퓨터 화면이나 인쇄기 같은 디지털 출력기를 위해 ‘루시다’ 등 새로운 서체가 개발되고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의 특성에 따라 문자 모양이 바뀌는 것은 잘 아려진 사실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썼던 쐐기 문자가 각이 진 모양인 것은 진흙판이 마르기 전에 막대로 긁어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즘 같은 컴퓨터 시대에 걸맞는 문자도 따로 있지 않을까.

 문자는 배워서 익히고 사용하기 쉬워야 한다. 변천 과정을 보아도 상형문자에서 음절 문자, 음소 문자로 변해왔다. 그러나 음소문자가 반드시 음절 문자보다 배우기 쉬운 것은 아니다. 음소리는 단위가 추상적이어서 글자 수는 적어도 원리가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7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글라이트먼과 로진은 30여개의 단어도 채 읽지 못하는 국민학교 상급생들을 모아 놓고 한자를 가르쳐 큰 화제가 되었다. 일부 학자는 일본 중국 한국 등에 비해 미국 영국 캐나다의 초등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문맹률이 높은데, 그 원인의 20%는 알파벳에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교육에 대한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제쳐 두더라도 이 동양 3국은 모두 음소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글은 또 음소문자와 음절 문자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자는 복잡하여 배우기 어렵다고들 하나 초등 교육을 받은 중국인 가운데 신문을 읽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다.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자같이 복잡한 문자가 처음에는 익히기 어려워도 한번 익힌 후에는 다른 자와 구별해내기가 오히려 쉽다고 한다.

 

글자 모양만 보고도 뜻 손쉽게 파악

 물론 분별하기 쉽다고 해서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읽을 수는 있어도 쓰기가 어려운 한자 때문에 애먹은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글 세대는 한자 사용을 기피하기도 하는데 요즘 컴퓨터 사용자들은 다시 한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워드 프로세서가 한자 변환을 손쉽게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우리의 생각을 수학 기호와 같이 정의할 수 있다면 좀더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2차대전 칼 블리스라는 사람에 의해 ‘블리스 심볼릭’이라는 상형 문자로 구현되었다. 블리스는 전쟁의 원인이 국가 간에 서로 다른 언어를 써 의사소통이 단절되는 데 있다고 보고, 평화를 위해 자신의 상형 문자를 세계 공통 문자로 사용하자고 주장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중 80년대 초 캐나다의 특수교육 전문가들은 이 문자가 다른 방법으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뇌성마비 환자에게 훌륭한 의사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몸의 마비 정도가 심해 수화조차 불가능한 장애자도 컴퓨터와 조이스틱(컴퓨터 게임기의 작동 손잡이) 혹은 머리에 부착한 광선총 등을 이용해 블리스의 상형문자를 가리키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여년 동안 의사표현이 불가능했던 소녀가 표현의 자유를 얻은 기쁨을 상형 문자로 쓴 시는 읽는 이들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블리스의 상형 문자는 결국 이러한 특수교육용 이외에는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 통신이 일반화된 요즘 이러한 상형 문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미 매킨토시나 윈도우즈로 대표되는 컴퓨터 운용환경에서는 문자로 입력하는 명령어 대신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그림들이 상형 문자처럼 사용되고 있다. 세계를 시장으로 상품을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당연히 다른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없는 아이콘 사용을 반길 수 밖에 없고, 사용자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전문 용어에 비해 그림 모양으로 직관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콘은 앞으로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될 전망이다. 여기에 명령어뿐 아니라 데이터도 상형 문자로 입출력한다면 우리는 미국에서 구축된 데이터 베이스를 번역 과정 없이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의 언어 습관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에스페란토 같은 국제어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쓰기는 동일하게 쓰고 읽기는 저마다의 소리로 읽는 것은 가능하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 3국이 각기 다른 소리로 읽는 것처럼 말이다. 이젠 컴퓨터가 등장함으로써 쓰기 힘들다는 상형 문자의 단점이 사라져버렸다. 과연 라이프니츠와 블리스의 꿈이 이루어질 때가 온 곳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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