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야당 추진위 李基澤의원
  • 박중환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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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말까지 창당 완료”

 李基澤의원의 표정은 밝았다. 통일민주당이 자진해산하던 지난달 30일 거대여당에 몸을 담을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을 당시, 그이 초췌했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과거와 다른 새 야당을 만들겠다고 나선 그는 투쟁과 수난, 갈등과 모슨, 분열과 통합으로 점철된 한국야당사를 이제부터 새롭게 쓰도록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가 80년대초 정치활동 규제라는 올가미에 씌워져 있을 때, ‘민주화의 봄’을 앗긴 통한을 삼키면서 펴냈다는 《한국야당사》의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우리 야당의 부끄러웠던 모습은 오늘날 살아 있는 과거로서 우리에게 더욱 큰 교훈과 의미를 준다. 이는 다가올 문민정치의 새시대 개막을 위한 필연적인 형극의 과정이다.” 그이 저적대로 거대여당에 맞설 큰 생 야당이 실현되기에는 앞길이 순타치만은 않을 듯하다.

  한편에서 李의원이 언론이 만든 언어의 유희에 취해 과옥을 부리고 있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국내외의 언론은 그를 김대중ㆍ김영삼 두사람의 정계되진 이후에 야권지도자로 지목해 ‘포스트 2金’이라 칭했고, 이 때문에 정치권내에서 견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6選의원인 그를, 그가 임시 개인사무실로 쓰고 있는 홀리대이 이태원호텔 1200호에서 만나 그이 선택과 도전에 대해 물었다.
 
●새 야당의 창당일정을 먼저 이야기해주시지요

  창당발기인대회에서부터 전당대회까지 50개 지구당을 창당할 계획인데 61일이 소요될 것으로 봅니다. 우리 신아당추진위의 기획단이 창당스케줄을 짜면서 3개안을 놓고 검토했습니다. 民自黨 창당 일정보다 먼저 잡느냐, 비슷한 일시에 하느냐, 아니면 뒤에 하느냐를 검토하다가 비슷한 일정으로 추진키로 했습니다. 맞불작전이지요.

●맞불작전을 펴기로 한 이유는?

  기획단에서 상황분석을 했는데 첫째 임시국회가 열리면 거대여당과 평민당이 싸움을 벌여 우리가 국민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쉽고, 둘째 대학 개하과 함께 만약 3당통합 반대운동이 치열해졌을 때에도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지자제선거가 6월말까지 있을 것 같아 서둘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신야당도 대중집회나 창당대회를 통해 신여당 창당과 맞서서 싸워야 유리하다는 판단입니다. 그러니까 늦어도 4월말까지 창당작업이 완료돼야겠지요.

●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 일단 어렵게 됐습니다. 원내 의석 3분의2가 넘는 거대한 여당이 생겼으니 20?30석 정도의 원대 교섭단체를 구성하더라도 별볼일이 없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은 무의미합니다. 구성이 되면 안된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나 구성이 돼도 별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때문에 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아무 사람이나 끌어모으는 愚를 자초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우리 신야당에는 4대 창당원칙이 있습니다. ①민주세력 대동단결 ②당운영 체질개선③  세대교체 ④야권통합 노력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거 야당의 관행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는 확실한 사람을 영입하고, 둘째 두 김씨처럼 당을 권위적으로 운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 함께 잔류하기로 했다가 민자당에 합류한 인사들에게 할 말은 없습니까?

  스스로 택한 것이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민자당이 창당할 즈음이면 다시 우리에게로 올 분들이 많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신야당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ㄴ디ㅏ. 건전한 민주세력들에게는 말입니다.

● 앞으로 원내대책은 어떻게 세울 계획입니다까?

 13대 국회가 졸지에 거대한 여당과 지역당이라고 하는 평민당으로 나눠져 그 상이에 진정한 야당부재의 空洞이 생겼습니다. 괴상망칙한 정치구도가 만들어졌지요. 이공동을 메울 수 있는 공명정대한 야당이 탄행돼야만 합니다. 그석을 우리가 수임받았습니다. 비록 원내의석이 7석이지만 원내총무 역할을 金正吉의원이 맡고, 구락부도 만들 것입니다.

● 이원은 지난 1월7일 도산아카데미 세미나에서부터 줄곧 지금은 보혁구도를 논의할 때가 아니고 민주화를 완결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며, 민주화가 된 이후 건전한 보수세력이 모여 정국을 보혁구도로 양립시켜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광범위하게 자리한 보스기류는 우선 안정부터 찾아야 된다는 여론을 만들었고, 거대여당의 출현도 정당화시켜주게 된 듯합니다. 그러면 미주화를 먼저 완결하자는 신야당의 주장과 우선 안정되어야 한다는 보스기류 상이에는 현실적인 간극이 생기게 됩니다. 신야당이 이런 틈을 어떻게 좁혀 국민적 지지를 얻을 것인지?

  우리사회의 밑바닥에는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보스기류는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불안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재야ㆍ학생들의 격렬한 투쟁, 이념적 갈등, 계층간의 위화감 등 사회모순이 그 요인이 됐습니다. 여기에다가 盧泰愚정권의 우유부단한 국정운영까지 겹쳤지요. 이런 불안한 분위기속에서 1盧2金이 사회안정의 명분을 내세워 3당통합을 단행했습니다. 일반국민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정치전문가인 우리 입장에 볼 때 그런 약속은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놓은 許術이라고 단정합니다. 국민들은 머지 않아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국민들도 비판세력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진취적인 정책정당으로, 건전한 비판세력으로 그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 신야당은 과거 정당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릅니까?

  우선 나 자신부터 신야당 창당을 주도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회의석상에서도 주로 듣는 쪽입니다. 기획단을 구성하면서 사람 하나 추천하지 않았어요. 언론이 나를 리더로 만드는데 나는 피해가려고 진땀을 흘릴 지경입니다. 나는 신당의 대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이떤 사람들은 신당추진팀들의 면면이 개성이 강하고지난날의 정치적 환경도 달라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것이라 걱정하는데 기우라고 생가합니다. 원칙을 지키고 민주주의의 요체인 다수결을 존중하면서 충분한 토의를 한결과, 합의되는 대로 따르면 극복되리라 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끈질기게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을 기성세대는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을 엉입해 신선한 정당을 만들 계획입니다. 그러면 좋은 정책도 많이 나올 것입니다.

● 당내 민주화를 철저히 하겠다는 뜻인 듯한데 경선제를 도입할 적정입니까?

  나는 우리 신당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득권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지금 50개 지구당의 위원장이 참여하고 있지요. 그들이 모드 위원장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경선을 시켜 결과에 따라야 하니까요. 총재ㆍ부총재 등 선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의원이나 신야당추진팀들은 그동안 金大中 평민당총재의 정계은퇴를 스차례 주장하는 등 평민당과의 관계가 편치 않아왔습니다. 임시국회에서 평민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계획인지?

 그쪽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협조할 일이 있으면 도울 것입니다.

● 진보연합 신당쪽과 통합할 계획은?

 아직 공식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닙니다. 비공식적으로 몇몇 분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연근씨의 영입을 추진하고 있어요.

● 이원은 7대 때 고려대 은사이자 당시 신민당 대표위원이었던 (최종연)박사의 천거로 전국구로 당선돼 국회에 들어갔고, 당시 김영삼의원은 유진산계에 있었지요. 처음부터 계보를 달리 시작했으나 결정적인 시기에 김촟재를 도와준 사실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번 결별선언 때 남다른 회한이 있었을 법한데?

  20년 원내생활중 김영삼총재와 계보를 같이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나는 다른 특정계보에 몸을 담고 있은 적도 없습니다.그동안 독자적으로 정치를 해보려고 했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김총재를 여러차례 도왔습니다. 그것도 결정적일 때 말입니다. 70년9월 김대중씨와 7대 대통령후보 경선 때 김영삼씨를 밀었구요. 79년5ㆍ30 신민당총재 경선 때, 2차투표에서 1차투표 때 나의 지지표를 김씨에게 넘겨줘 그의 당선을 도왔습니다. 79년9월26 김총재가YH사건과 관련해 서울지법의 직무집행정지 판결과 가처분신청으로 맞서 있을 때 김영삼체제지지 서명의원쪽에 섰지요. 나는 김영삼총재에게 도움만 주었습니다. 그에게 빚을 진 것은 없는 셈이지요. 지난해 총무 수락만 해도 당시 당내 야권통합파의 목소리가 높아져 김총재가 어려워졌을 때 부총재였던 나는 총무로 끌어들였지요. 나는 당과 총재를 돕는 정당한 일이라면 자리의 높낮이를 따져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 수락했습니다.
  이번 민자당 불참선언도 김총재가 민주당을 해체하기까지 기다리다가 전당대회 폐회 1시간쯤 뒤에 다른 장소에서 했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김총재와의 관계는 깨끗하게 청산했습니다.

● 성명을 발표한 날 기자회견하는 자리에서, “청와대에 가서 생각해보니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라고 했는데 그때 불찰을 결심했다는 것입니까?

  보수통합은 지난해 盧대통형의 중간평가로 정국이 소용돌이칠 때 내가 김총재에게 중간평가 관철을 주장하며 맨처음 꺼낸 것입니다. 그때 나는 중간평가를 해서 盧정권이 물러난다면 민주당이 주체가 돼서 건전한 보수세력을 규합해 보혁구도로 정국을 재편해야 하고, 만약 노정권이 이긴다 해도 6共은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므로 마찬가지로 민주당 중심으로 보수세력을 통합해 민주화를 완결시키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연말께 공화당과의 합당설이 나돌더니 느닷없이 올연초에 민정당이 주최가 된 보수대연합이 전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5共청산이 안된상태에서, 더욱이 5共연장 정권인 6共과 합당을 해선 안된다고 반대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김총재가 나와 단들이 만난 자리에서 나를 보고 “당신이 보수대연합을 하자고 주장했지 않았느냐”고 했어요. 더욱 서운했던 것은 김총재의 이런 말이 언론에 보도돼 마치 내가 3당합당을 배후에서 추진한 것처럼 몰아세워졌다는 점입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우유부단하다고 욕했어요. 청와대에 따라갔던 일도 원내총무라는 당직 때문에 내 고집만 부릴 수 없어 부득이 했던 일이고…, 아무튼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괴로웠어요.

● 그날 이후 몸을 숨기고 침룩했지 않습니까. 지난번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 ‘7일간의 고뇌끝…, 오해를 사면서까지 침묵해야 할 서정은 무엇이었습니까?

  총무라는 당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일단 당이 해제되기를 기다렸고., 당시 황정주ㆍ신상길의원 등 중진 5명이 행동을 통일하기로 약속이 되어 었어 어쩔 수 없었어요. 4~5일간 의견을 나퉈봤지만 결론이 안나와 혼자 하기로 마음을 굳혔지요. 김종규부총재가 응해 성명발표는 같이 하게 된 것입니다.

● 김영삼총재가 앞으로 민자당내에서 입지를 찾을 수 읶겠느나는 논의가 민자당의 성패만큼이나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며칠전 민자당은 지도체제를 3人합의체로 하기로 결정했지요.
3당합당 발표후 김총재가 우리에게 “국가운영은 노대통령이 맡고, 신당은 내가 맡기로 했다”며 민주당이 신당을 주도할 것이라고 설명한 뒤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며칠되지 않아 3인합의체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민자당의 당권은 3分된 것입니다. 민자당의 주요 정책결정을 놓고 1노2김이 극명하게 대립할 경우 3인중 金鍾泌총재가 과연 어느쪽으로 기울겠습니까. 뻔하지요. 노대통령쪽 아니겠습니까. 여권의 생태를 보면 당의 주위에 청와대ㆍ정부ㆍ안기부ㆍ군부 등이 두러싸고 있는데 김영삼총재가 당권을 쥔다 해도 자기 뜻을 쉽게 펴나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김종태의 민자당내 입지는 국히 좁다고 봅니다.

● 20년간의 의정활동을 통해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기억되는 것은 언제입니까?

 12대말 신한민주당을 깨고 통일 민주당이 창당된 직후 드 김씨가 분당했을 즈음이었어요. 나는 당시 통합을 요구하며 두 김씨가 따로 차린 당의 입당을 거부하고 무소속을 선택했습니다. 이때 야당의 흑색선전이 통합을 주장하는 나를 불선명 정치인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나는 15일간 단식투쟁을 했고, 그동안 민주사상연구회를 통해 이따의 민주화를 위해 나름대로 싸워왔는데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낙인찍어버렸을 때가 가장 어렵고 피로웠습니다. 2년 사이에 그 진실은 밝혀졌지 않았습니까. 이번 3당통합도 잘못된 것이라는 진실이 머지않은 시기에 드러날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민자당 불참선언 때 집안의 반발이 컸다는데?

 말도 마십시요. 그 문제는….

 이의원은 대답을 하다말고 “다음에 또 합시다”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맏누님과 형님이 부산에서 경영하는 泰光산업은 이의원의 파란많은 야당생활 때문에 3共ㆍ유신ㆍ5共
시절 몇차례 세무사찰을 받는 등 애꿎은 피해를 입었다. 이의원은 이를 항상 조스럽게 생각해왔다고 한다. 이번에도 ‘보장된’길을 마다하고 ‘형극’의 길을 잧자 적잖은 논란이 있은 듯했다. 그의 고집은 그의 정치행로에도 나타나 있다.

  1937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부산중ㆍ부산상고를 거쳐 고려대에 입학, 4ㆍ19 때에는 학생위원장 직책을 맡아 혁명에 앞장섰다. 졸업후 곧바로 정계에 투신, 꼭 서른살이 되던 67년 국회에 들어왔고. 8대에 부산 동래구에서 출마한 이후, 정치규제에 묶였던 11대를 제외하면 내리 당선된 6選이다. 그는 76년 신민당 시절 사무총장을 지낸 것을 비롯, 부총재를 4번이나 역임했다. 13대에서 5共특위 위원장직을 맡아 그의 면모를 과시했고, 뒤늦게 원내총무를 거쳤다.

  이런 화려한 경력과는 달리 그의 비중이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한 측근은 一民(이의원의 號을 가르켜, ‘큰산(巨山ㆍ김영삼총재의 아호)에 가려졌던 巨木’이 라 변호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이제 큰산을 떠나 벌판에 따로 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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