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토가 전쟁터
  • 정용진 (삼성물산 자그레브 지점장) ()
  • 승인 1992.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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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이 피난민


한국 대사관은 세르비아, 무역진흥공사는 슬라보니아에
 “모스타르에서 전화왔습니다.”
 지난 4월 중순 어느날 아침, 비서의 말에 나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남서쪽 1백30km에 자리잡고 있다. 깊은 계곡을 딸 네레트바강이 흐르고 그 위로 5백년 터키 지배의 흔적인 독특한 석조다리가 가로질러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다. 사라예보와 모스타르가 세르비아의 공격을 받아 통신이 두절되어 그동안 거래선 T사장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미스터 정, 이곳은 전쟁터가 됐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오늘 아침 회사문을 닫고 피난가기로 결정이 났어.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 동서남북 모두 길이 막혔어. 내가 살아남는다면 다시 전화를 하겠어.” 다행히도 모슬렘인 T사장은 지금 살아남았다. 세르비아인 아내 덕분에 처가가 있는 니쉬까지 바져나갔으므로.

 그러나 T사장처럼 운좋게 빠져나간 사람은 많지 않다. 그곳의 한 거래선은 이렇게 말했었다. “사라예보에서는 모슬렘과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안인이 한 동네에서, 한 아파트에서, 한 집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 수백년의 전통이다. 가족끼리 총들고 싸운단 말인가. 전쟁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같은 생각으로 남아 있던 시민 30만명은 벌써 80일이 넘게 포위망 속에 고립되어 있다. 사라예보뿐 아니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전국토(51.129㎢)가 전장이고 전국민(4백30만명)이 피난민이다. 빗나간 민족주의의 거대한 파도에 평화공존의 모자이크는 산산히 부서졌다.

 91년 6월 말, 슬라보니아에서 시작된 전쟁은 우려했던 대로 9월에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까지 번졌다. 거듭 울리는 공습 경보와 총격전 때문에 학교는 문을 닫았다.

 석달반 만에 다시 문을 연 외국인학교의 개교 첫날 돌아온 학생은 30명 중에서 3명뿐이었다. 그 3명 모두 한국 학생이었다.

 지금 슬라보니아에는 평화가, 크로아티아에는 유엔군이 왔다. 류블리아나와 자그레브에는 인근 국가의 대사관이 들어섰고, 외국인들도 돌아오고 있다. 외국인학교의 학생도 이제 13명이나 된다. 9월의 새 학기에는 30명이 넘을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평화공존의 모자이크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은 크다. 상호의존적이던 산업은 분리독립과 전쟁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세르비아의 원료를 가져다 공산품을 만들어 되팔던 슬라보니아의 기업들은 원료공급선도, 제품시장도 잃었다. 전쟁과 세르비아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로 교통·통신이 끊긴 자그레브-베오그라드는 서울-평양처럼 가깝고도 먼 도시다. 한때는 모두 유고슬라비아에 주재했으나, 이제 한국 대사관은 세르비아에, 무역진흥공사는 슬라보니아에, 상사 지점은 크로아티아에 주재하고 있다. 유고연방을 대상으로 했던 ‘국내교역’이 ‘국제교육’으로 대체되어 혀지에 주재하는 한국상사에게는 시장개척의 기회가 넓어졌다. 또한 일부 부문에서 한국의 경쟁자이던 유고의 소멸과 경쟁력 약화로 한국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모스타르에서 아드리아해쪽으로 30km를 가면 ‘메츄고리에’가 있다. 1981년 6월말 성모마리아의 발현이 알려진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톨릭 성지가 된 곳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전쟁이 터졌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발칸의 비극은 그칠 줄은 모른다. 이 작은마을의 언덕에서 발현하신 성모마리아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평화였다. 평화. 세계 도처의 편협한 민족주의가 평화를 위협하는 오늘, 평화는 얼마나 절실한 메시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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