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북·재망명 파문 吳吉男씨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2.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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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씨가 입북 권했다”



 22년 동안 독일에서 반체제 활동을 하던 吳吉男씨(50)는 지난 85년 12월13일 “반쪽 조국 북한의 경제발전과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겠다”는 각오로 부인 신숙자씨(50·전 간호원), 딸 혜원(16)·규원(13)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칠보산 연락소 <민중의 메아리> 대남 방송요원 생활과 재독유학생 이모와 박모를 코펜하겐에서 유인하라는 임무에 환멸을 느껴 86년 11월21일 코펜하겐공항 출국 심사대에서 극적으로 탈출한다. 그후 북에 남아있는 가족의 송환을 위해 수용소 생활까지 하던 오길남씨는 4월10일 ‘간첩’으로 한국에 자수하고 5월22일 귀국했다. 69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70년 2월 독일에 유학한 오씨는 반체제 조직인 민주건설위원회(민건) 부회장을 지냈다. 81년의 한국적 상황을 견디지 못해 독일로 망명한 오씨는 85년 브레멘대학에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입북했다. 한편 오씨는 입북을 “尹伊桑·宋斗律씨가 주선했다”는 안기부 발표에 대해 재독작곡가 윤씨는 언론사에 서한을 보내 “현정부의 파렴치한 모략”, “두 사람에 대한 인격 모독”이라고 항의했다.

‘객기·격정·파토스’라고 자신의 과거를 정의 했는데 …또 다시 꼬치꼬치 과거사를 묻지 않을 수 없어 송구스런 마음까지 듭니다.

 괜찮습니다. 옛날을 상기한다는 것, 북한에 있었던 사실, 사실 괴롭긴 해요. 제 자신의 선책이었으므로 다 애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확하게 양심껏 말씀드리겠습니다.

 윤이상씨는 86년 11월 오선생이 북한에 탈출한 후 전화를 할 때까지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도 가까이 만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허허) 그렇게까지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그분이 연로해, 제가 작년 1월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건강이 많이 악화돼서 그런가 봅니다. 저도 아주 우스웠어요. 사람을 그렇게 욕해서야 되겠습니까. 사실만을 얘기하겠습니다.

 윤이상씨가 91년 1월 중순에 북한에 다년온 후에 오선생에게 가족 사진과 녹음테이프를 전해주었는데 이때 오서냉이 사진을 보고 “왜 아이들이 못났는가”했고 두딸의 애절한 소리에도 “감각이 없었고 히히덕거렸다”고 했습니다.

 두 딸애가 한국말을 잘 못했는데 그동안 배웠는지 한국말도 잘했고. 그냥 울지 않았어요. 그분이 “다시 돌아가서 통일운동도 해야 애들도 빼올 수 있지 않느냐”하더군요. 당시 그 사람은 고대광실에서 살던 사람이고 나는 부서질 대로 부서진 인간으로 처참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애들 사진을 보고 못났다고 한 것은 사랑의 반어적 표현 아닙니까. 자식이 아무리 못생겼어도 정말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북쪽에서는 그분에게 빨리 나를 돌려보내라고 한 모양이었는데 내가 5년 동안이나 폐절된 상태로 있으니 아마도 내 말이 횡설수설로 들렸을지도 모르죠.

 오선생의 입북을 윤이상씨가 주선했다는 안기부 발표는 “두 사람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현 정원의 파렴치한 모략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윤이상씨가 정말로 입북을 주선했습니까?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동안 나의 입북 경위에 대해서는 몇 사람에게만 애기했을 뿐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무말로 안 했습니다. 85년 7울에 박사학위 논문 (브레멘대학에서 일본인 수리경제학자 오키시오 교수의 지도로 <마르크스경제학에서의 가격문제 접근>으로 취득) 한권을 윤이상씨에게 증정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윤이상씨를 애국적 지도자로서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써서 논문과 함께 보냈습니다. 회신이 왔는데 “공생 끝에 학위 받은 것을 축하한다. 그 해박한 지식으로 북한에 들어가 경제발전과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는 일에 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81년부터 85년까지는 논문 쓰느라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는데 아마도 당시 내가 처했던 어려움을 그분이 송두율씨 등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잘 알고 있었고요. 안정된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었던 심정도 있었을 겁니다. 집사람에게 그 말을 다 했습니다. 그 편지가 계기가 됐죠. (당시 간호원으로 그를 뒷바라지하던 부인이 택시를 들이받아 4천마르크를 송두율씨에게 비렸고, 논문 출판 비용 1천5백마르크는 오씨를 북한 연락관들에게 직접 소개한 金鍾煥시(성균관대졸·야채상)로부터 비렸다. 또 부인이 B형 간염을 앓고 있어서 부부 관계도 못할 정도였다 한다.)

 그 편지 지금 가지고 계십니까?

 북한에 갈 때 가지고 갔어요.

 오선생을 북한 연락관과 직접 연결시킨 김종환씨를 만난 것은 그 이후였나요?

 모든 것이 동시에 진행됐어요. 자세한 애기는 그동안 피하고 싶었어요. 아무리 그 사람들이 권유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안 가겠다고 했다면 누가 뭐라고 했겠어요. 말려들어간 내가 잘못이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어요.

 송두율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나와는 아주 친한 사이입니다. 나이는 그 사람이 두살 위인데 학교는 나보다 일년 늦게 들어왔어요 (송두율씨는 서울새 철학과 63년 입학). 그 사람은 워낙 인생을 굴절없이 순탄하게 지냈고 곱게 책만 읽은 선비인 데다가 좌파 지식인으로 제가 선망하고 존경했습니다. 나한데 섭섬한 점도 있었지만 내 성격이 워낙 좌충우돌격이라. 85년 8월 둘째 주인가 송두율씨 가족과 함께 킬 근처의 한 휴야도시로 놀러간 적이 있어요. 그때 난 “아, 돌아가야겠다.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경북대학교에서 말이 있었고, 한신대에는 강동규 교수가 있었고, 한양대에는 죽마고우인 반성완이가, 인하대에는 이영희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자리가 잘 안됐고 또 한국에서 친구 한명이 내게 전화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도 우리는 갈 곳이 있다. 기댈곳(북한)이 있다”는 애기를 했습니다. 이창균이라고 ‘흉노’라는 별명을 가진 서울대 철학과 출신도 북한에 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공모라고 해도 되고 아니라고 해도 됩니다.

 송두율 교수가 북한에 이미 다녀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 몰랐어요. 그 점은 송두율도 아주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윤이상씨나 송두율씨는 둘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거든요. 송두율은 서울대학교 다닐 때부터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박사학위도 아주 젊었을 때 받았고, 그러면 누구나 다 야망을 갖게 돼요. 남북한이 공동위를 구성하게 되면 자기가 한 20년 동안은 남쪽 대표가 될거이라면서… 누구나 다 어린애 같은 때가 있어요. 85년 11???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는 “나의 권유를 받아 입북을 결정해줘서 고맙다. 북한도 좀 변해야 한다. 경제학자로서 활약을 해 민족자주통일을 앞당기는 일을 해주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때 준·린이 엄마(송두율씨의 두 아들 이름이 준과 린)가 울면서 “그곳에 필요한 물자가 있을테니 윤이상씨를 통해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로 친했는데, 그래서 더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85년이면 남한과 북한의 실상이 유럽에도 많이 보도됏을덴데, 정확한 실장을 잘 몰랐습니가?

 그 전에 연세대에서 신학박사를 한 독일인 친구 게하르트 브라이덴스타인이라는 친구 있었어요. 한국에서부터 친했는데 유신 이후 말을 잘못해서 70년에 한국에서 쫒겨났어요. 그 사람이 화가 나서 그랬는지 북한에 가서 2년간 공부를 하고 남북한의 경제 비교 같은 논문도 썼어요. 북한에 가서 뭘 보기나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 영향이 컸습니다. 나는 70년 10월 중순 독일에 간직후부터 사회당원으로 반체제 운동을 하다가 81년에는 독일로 망명했습니다. 일종의 객기였죠. 한국적인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어요. 한국에 돌아오기도 힘들고… 북한에서 나를 “모셔간다”고 생각했죠. “책을 다 가지고 와라”하는 말도 나를 유혹했어요.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데모도 많이 하셨나요?

 많이는 안했습니다. 지금은 죽은 조영래하고 데모하다 유치장에 함께 들어가곤 했어요. 난 지도자는 못돼요. 뒤에서 자문하는 타입입니다.

 사회주의자이십니까?

 독인 사회당원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경제학 이론을 공부했으니까요. 사회주의에 대한 경외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단지 마르크스경제학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마르크스경제학도 학문으로서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또 마르크스주의 결함도 알고 있고, 이것이 아니면 정치경제학 전체가 수립될 수 없다고 봐요.

 북한에서의 생활을 한다미도 표현한다면?

 가자마자 산 속으로 끌려갔으니 살얼음판을 걸었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무서웠고, 계속 죄어든 느낌 속에서 그 좁은 울타리에 갇혀서 뛰어넘을 수도 없었어요. 한국이라면 조직이라도 해서 뛰어넘을 방도를 찾았을텐데….

 윤이상씨는 오선생이 북한에서 차관 대우를 받았다고 하던데….

 살던 집으로 보나 생활비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 수준 정도는 됐으리라는 생각은 합니다. 그 수준을 넘었을 수도 있고.

 북한 지도자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김종인과 대외연락부장 이창선을 만났고 공작기구 강 부부장과 선전부 부부장을 각각 서너번식 만났습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일일이 다 기억나지 않으나 그들은 모두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한두번 만나서 내 진심을 다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고, 여기서도 다 얘기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럴때 나는 얼렁뚱땅주의니까, 밥먹고 술이나 먹었죠.

 북한 경제의 실상을 볼 기회가 있었는지요.

 연구를 해볼 수도 없었고 경제연구소나 대학을 구경시켜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어요. 우선 무서웠습니다. 초대소로 끌려갈 때부터요. 산속에 데려다 놓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방속국일을 시키리라고도요. 정말로 야비한 짓을 시켰지요. 초대소에서 3월20일에 나와 직장(방송국)에 다닐 때 샅샅이 뒤져보려고 애썼습니다. 농촌을 여러곳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금요농장에 가거나 걸아다니거나, 버스나 지하철 등을 일부러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은 관찰했습니다. 그곳에 관한 자료는 아무것도 정확한 게 없어서 밖에서도 자료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1년 동안 읽다가 한국으로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관련자료들을 모아 연구하려고 합니다.

 북한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노예체제 반, 봉건체제 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방식은 아직도 수공업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무기 제조능력을 제외하고 하는 말입니다. 한없는 정체의 울타리 속에서 그곳 사람들은 5천년 전과 똑같은 농법으로 김매고 밭갈고 하더군요. 방송일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농촌에 가서 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거죠.

 북한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 있다고 보십니까?

 우선 묶인 사람을 풀어놔야 합니다. 그래야 요동치는 화력이 생깁니다. 자유 없이 경제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체제를 바꾸기 전에는 안됩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썩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관적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도 사람들은 저렇게 굶어죽어가면서도 모질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현재 부인과 두딸이 어떻게 지내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평양시 동홍동 1반(중구역구)에 살았는데 북한 최고위층이 사는 곳입니다. 지금은 형제산에서 살고있다는데 그 곳이 어데인지도 모르고.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신발을 구할 수가 없어서 떨어진 독일 신발을 신고다녔어요. 그곳 애들과 어울리다보니 새 독일 신발을 신고 싶지가 않았던거죠. 나는 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제 신발을 살 수는 있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으십니까?

 앞으로 10년, 15년간은 일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정치나 경제학 같은 것은 내년부터 하기로 하고 지금 1년 동안 러시아어 동사사전이라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런 욕심뿐이나 그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장기적으로 경제학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교단에 서기에는 얼굴에 상처가 있고 또 수줍어해서 성형외과 의사인 친구 백세민(백병원 소속)을 한번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기도 하고, 그러나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고 근 6년 동안 어떤 말도 안하고 살다가 다시 말을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이곳에서 또 대북방송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웃음) 그곳에서도 알고있으므로 대북방송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북방송하라고 하면 또 도망갈 겁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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