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유탄에 무너진 안기부 '옹벽'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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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처벌조항 등 기대밖 성과…여권내 개혁세력과의 사전교감 주효한 듯

우리나라 쌀시장을 열어젖힌 우루과이 라운드 태풍은 엉뚱하게 안기부의 대문도 활짝 열어놓았다. 5·16 국사 쿠데타 이후 32년 동안 정권이 세번이나 바뀌는 속에서도 '정부 속의 정부'로 예외적인 특권을 누려왔던 안기부가 국제 조류에 휘말려 맥없이 빗장을 풀었다.

 지난 7일 여야는 국회에서 안기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 법안의 골자는 안기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통제를 강화한 획기적인 것이다. 항상 인권유린 시비를 불렀던 국가보안법상의 고무찬양과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을 박탈했다. 또 전국 2천여 행정관서에 대한 보안감사권을 폐지했으며, 조직원의 정치 관여를 철저히 차단했다. 정치 관여 행위에 대해서는 5년 이하의 징역, 불법 체포·구금에 대해서는 1년 이하 징역이나 5백만원 벌금 등 엄격한 처벌 조항을 신설했다. 국회에 정보위를 두어 안기부의 모든 예산 집행 내역에 대한 실질적인 심의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번 정기국회 개막을 앞두고 민주당이 올해 예산안 통과와 안기부법 개정을 연계하는 강력한 투쟁 방침을 정했을 때만 해도 안기부법이 이렇게 획기적으로 고쳐지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년 전인 여소야대 시절에도 안기부법 개정이 활발히 논의됐으나 막판에 공화당이 변심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 여대야소인 이번 국회에서는 그 정도까지 깊이 있게 논의가 진전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부측이 내놓은 안기부법 개정안은, 찬양고무죄와 이적표현물 소지 및 불고지죄에 대한 수사권을 부분 혹은 완전 폐지하여 문민 정부로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한 듯한 내용이었다. 민주당도 정치공세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국회에서 이같은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된 것은, 민자당이 올해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하려다 실패하고 쌀시장 개방 문제가 불거지면서부터였다. 특히 쌀시장 개방이 기정사실화하면서 대통령과 정부의 도덕성이 심각한 정치 문제로 도드라지자 정부 여당은 안기부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당초 민주당이 주장한 수사권 축소 외에도 인심 좋게 처벌 조항 신설이라는 보너스까지 얹어주었다.
 안기부는 안기부법 개정에 대해 여야가 합의한 뒤 부랴부랴 조만후 안기부장 법률담당 특보를 국회에 파견해 정치특위를 네시간이나 지연시키면서 거칠게 항의했으나 이미 대세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협상에 몸 단 쪽은 안기부 관료들뿐
 겉으로 보기에 안기부는 이같이 쌀시장 개방이라는 강력한 폭발성 현안의 파편에 맞아 결정적으로 개혁을 강제당하게 됐으나, 협상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크게 보아 이번 안기부법 개정은 정치권과, 비정치권 정부 기구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정치결사로 행세해온 안기부의 한판 승부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동안 정치 발전의 도상에 버티고 서서 정치권의 머리 위에 군림해온 거목인 안기부에 대한 정치원의 도끼질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특히 상대적으로 공장 정치의 피해를 많이 입은 야당의 집념은 대단했다. 또 사사건건 정치에 간여해온 안기부에 대해 여당 정치인들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해온 게 사실이었다. 정치권이 권위중의 시대를 청산하고 제대로 굴러가면 안기부는 언젠가는 반드시 변화를 맞아야 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쌀시장 개방은 정치권의 도끼질 속에서 쓰러져가던 안기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을 뿐이다.

 사실 이번 안기부법 협상 과정에서 몸이 달아 뛰어다닌 것은 안기부 관계자들뿐이었다. 민자당 의원들은 야당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안기부법 개정을 적극 반대하지도 않았다. 팔짱만 끼고 있었을 뿐이다. 민자당의 정치특위 위원 가운데는 안기부법 개정이 확정된 뒤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조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세하게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88년부터 6년간 끈질기게 안기부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여당과의 협상을 도맡아온 민주당 정치특위 간사 박상천 의원은 "협상 통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여권 내부 개혁 세력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박의원이 접촉한 여권 인사는 김덕룡 정무정관,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 박희태 민자당 정치특위 간사 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의원은 "그밖에도 여권의 많은 사람과 의견을 나누었다"라고 얘기했다. 민주당이 이번 국회에서 안기부버 개정을 자신있게 무기로 들고 나온 것은, 여권 내부의 개혁 세력과 사전에 상당한 교감이 있었던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구체적인 공조 약속까지는 없었더라도 민주당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으리라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권 내부의 보혁 노선 갈등과 관련해 개혁 세력과 안기부를 중심으로 한 우파 세력간의 신경전이 점차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흘러나왔다. 특히 국회 예결위에서 민주당 이부영 최고위원이 안기부 이동복 특보의 훈령 조작 사건을 터뜨리고 난 후에 려권 내부의 갈등은 외부에서 봐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졌다. 훈령 조작에 대한 자료가 외부에 유출된 경위를 조사해야 한다는 얘기가 여권 내부에서 강도 높게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즈음해 안기부에서 여권내 개혁 세력의 전력과 최근의 일거수일투족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매우 그럴듯한 소문까지 돌았다. 개혁 세력에 대한 안기부의 대반격이 시작됐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이번 안기부버 개정을 둘러싼 공방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야 간의 공방인 것 같지만 내용은 여권내 개혁 세력과 안기부 관료들 간의 싸움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소문에 불과하지만, 안기부법 개정 공방에서 여권이 왜 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일면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 떄문에 안기부 관계자들은 민주당 못지 않게 민자당에도 거침없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민자당은 안기부법 개정에 대한 당내 전략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 쌀시장 개방으로 곤경에 처하자 너무나도 어이없이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 민자당은 여당도 아니다"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어찌 됐든 안기부법 개정안은 통과됐고 안기부는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민주당 박상천 의원은 "이번 협상 과정에서 안기부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실감했다. 그들에게는 민자당은 말할 것도 없고 청와대의 얘기도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안기부는 국내 정치를 주무르던 좋았던 시절의 향수를 버리고 경제전쟁 시대에 국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첨병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국내 정치판에서 골목대장 행세를 하기보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얘기이다. 박의원은 "과거 냉전체제에서 우리나라는 국제 정보 수집을 미국 중앙 정보국에 의존했으나 이제 미국과 우리나라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이번 쌀 협상에서도 보듯이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좋은 친구는 아니다. 안기부가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안기부내 개혁세력의 힘 빼앗아갔다”
 안기부법 타결 직전 국회 정치특위에 뛰어 들었던 조만후 안기부장 법률담당 특보는, 전화 인터뷰에서 정치권의 논리에 따라 안기부법이 개정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조특보는 “야당의 박상천 의원과 수도 없이 접촉했다.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야당도 안기부에 대한 통제는 강화하더라도 고유 권한을 위축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공감했었다. 그런데 정치 상황이 바뀌자 오랫동안 같이 고민해왔던 사실은 모두 잊어버리고 정치적 전리품을 얻는 데 급급했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또 안기부 내에서 “세월이 변하고 자세가 변해도 안기부에 대한 대접은 달라지는 게 없다”는 분노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면서 “야당은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얻는 데 급급해 김 덕 부장 등 개혁 세력이 안기부의 내부 반발을 무마하면서 혁신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갔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조특보는 “국가 정보기관은 정확하게 적시에 일을 처리해야 하며 비밀이 생명이다. 민주적 잣대로 정보기관을 재는 것은 무리이다. 그것은 半처녀가 되라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안기부측 얘기에도 일리는 있다. 국가 정보기관에 사사건건 민주적 잣대를 들이대면 업무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전혀 잣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지금은 우선 잣대를 만들고 지키는 게 중요하다.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원칙이 서고 난 다음의 일일 것이다. 안기부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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