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키운 ‘5대 스승’
  • 정동주 (소설가)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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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남편·브로니슬라브·노동운동·노동자동맹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두서는 청풍 김씨이다. 함경도 경흥 사람으로 1869년 러시아로 갔다. 러시아로 가기 전 몇 년간 간도지방과 훈춘 지역에서 소작인으로 지내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김두서는 러시아에 이주한 뒤 러시아 토호들 밑에서 막노동꾼으로 날품을 팔며 러시아어를 익혔다. 탁월한 어학적 재능이 러시아 관헌이 인정을 받아 러시아 시민권을 얻어 ‘토프랴치크(청부업자)’가 되었다. 그 때 얻은 러시아 이름이 ‘표토르 세쿄노비치’. 그는 두 동생이 있었다. 김흥재(알렉세이 세쿄노비치). 김양재(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알렉산드라는 6남매 중 셋째, 큰 오빠는 ‘새별’이라 불렀는데 어려서 굶주림 속에서 병들어 죽었다. 작은 오빠는 ‘바실리 페트로비치 추푸로프’(추푸로프는 양부의 성이다. 집이 가난하여 양아버지를 정해 집을 떠나서 성장함). 알렉산드라의 어릴 적 이름은 어린네. 여동생은 ‘마리아 페트로브나 채(어린 시절 이름은 오금네). 뒷날 체행길의 아내가 되어 채씨 성을 가졌는데, 알렉산드라의 전기를 쓴 이인섭 선생이 57년 모스크바에서 마리아를 만나 그의 가족사가 완성된 것이다. 남동생은 ’엔 페트로비치 김‘(1914년 1차대전에 참가하여 전사함)이고, 막내 동생은 ’페 페트로비치 김‘이다.
 알렉산드라가 스탈린 시절인 34년 소련 공산당 제14차 전당대회에서 소련공산당 수립의 공로자로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몇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한 인격 형성 덕분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직업과 생애에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이다. 김두서는 ‘식민철도’라고도 부르는 ‘동청철도’ 건설 현장의 통역원이었다. 그곳에는 중국인·한인 등 황색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3개 국어를 구사하는 김두서가 징집된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여러 민족의 노동자 사회를 체험했다. 동청철도 건설 현장은 대러시아 민족주의만을 고집하는 관리 계급, 착취 계급, 노동 계급 간의 계급 토쟁 현장이었고,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따라서 그곳은 무산 계급의 계급 투쟁을 실제로 체험한 산 정치교육장이기도 했던 셈이다.

 둘째는, 1905년 소학교 교사를 그만둔 바로 그 해에 만난 브로나슬라브 필수트스키라는 인물의 영향이다. 그는 폴란드계 혁명가이자 정치범인 유재프 필수트스키의 동생이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학생이던 그는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올라노프가 조직한 ‘나로드나야 불랴’라는 테러 조직에 가담한 죄로 다른 단원들과 함께 사할린에서 15년간 노역선고를 받고 복역중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잠입한 인물이다. 그를 통하여 본격적인 사회주의 수업을 받게 되었다.

 셋째는, 첫 남편 스탄케비치와 헤어진 뒤 우연히 만나게 된 오가이 보리스 바실리예프의 헌신적인 배려와 사랑이었다. 오가이는 포시예트 농민 가정에서 출생하여 카산에 있는 회랍정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샤납스크 인민종합 대학교를 마친 수재이다. 그때 오가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회랍 정교회 신부이자 선진적인 혁명사상가였다.

 넷째는,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체험한 사건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노동운동은, 차르 러시아의 압제에 항거한 민중의 자유화 운동이었다. 산업기지로서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수많은 노동자가 동맹파업 등을 통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알렉산드라도 참여했다. 그는 노동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쫓기게 되자 러시아 동지들과 함께 중국 길림성·산차거우·남가우령·조선인촐으로 피신했다. 이 때는 동청철도 건설 현장에서 함께 지낸 중국인·조선인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고, 그 때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다섯째, 우랄 지방 노동자동맹을 결성하기까지의 여러 체험이다. 알렉산드라가 우랄 지역의 나테진스크로 가서 그곳 노동자들의 대리인으로서 소송을 수행하고, 임금 투쟁을 벌여 수천명 노동자들로부터 존경받게 되는 데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그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랄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유럽 전선에 나가는 러시아 군대에 무기와 군용품을 조달하거나 목재를 공급하는 러시아 관영 공장이 밀집한 곳이다. 그같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예카테린부르크의 책임자는 매우 비중이 높은 사람이었다.

 레닌 · 트로츠키와 함께 3대 영웅으로 추양받았고 레닌의 절친한 혁명 동지이자 소비에트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야코프스베르들로프가 그곳 시위원장 직을 겸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로부터 신임을 크게 얻었다.

 이처럼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크게 영향받은 알렉산드라는 1917년 2월혁명 이후 극동 지역 한인사회 내부에서 심각하게 노출된 계급 갈등, 즉 빈곤한 노동자로 남아 있는 한인들과 부유한 한인들 간의 극한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鄭棟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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