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대북 수교’연막 속 실속 챙기기 분주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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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내세워 ‘전후 배상’ 흥정 … 자본 … 기술 진출 추진

일본 외무성은 얼마전 93년 외교를 결산하고 94년 외교 목표를 밝힌 보고서 ≪국제정세의 회고와 전망≫을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금년도 최대의 외교 과제로 미 ·일 관계개선과 북한 핵 문제에의 대응을 꼽고 있다. 특히 미 · 북한 협상에서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완전한 사찰을 수용하는 데 동의할 경우 92년 11월의 제 8차 일 · 북한회담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북경에서 실무 접촉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91년 1월에 시작된 일 · 북한회담은 전후보상 등 수교에 앞서 필요한 문제들을 논의해 왔는데, 제8차 회담에서 일본측이 이은혜(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로 알려진 일본 여자) 문제를 거론하자 북한측이 자리를 박차고 나감으로써 중단된 뒤 아직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그 후 일본은 여러 차례 북한측에 대화 재개를 제안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해 왔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일본 소식통은 “북경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북한대사관 쪽으로 자주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하지만 북한측이 계속 거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인맥 형성해 발판 마련
 지난해 7월 북경에 취임한 한 일본 외교관은 아직까지 북한 쪽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북한이 한국도 배제하고 미국만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회담 재개를 서두르지 않고 미 · 북한 협상을 지켜보는 자세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일본 쪽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히타 쓰토무(?田孜) 일본 외무장관은 작년 12월 28일 전후처리 문제를 돌파구로 삼아 북한과의 협상을 재개할 의사를 밝힌 데 이어 지난 1월 9일에는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가자회견을 갖고 회담 재개를 북한측에 공개 제의했다. 전후처리 문제란, 북한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불법성을 거론하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데 비해, 일본은 합방은 합법적이며 다만 미지급된 노임과 예금에 대한 재산권 · 청구권은 인정하겠다고 주장함으로써 생겨난 문제이다.
 일본은 그동안 회담이 난항을 겪은 이유는 북한 핵 문제 때문이며 북한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일본이 진정 북한과의 수교 회담을 성사시키려 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일본 북규슈 대학 金鳳珍 교수의 주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최근 민족통일연구원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 · 북한 수교 협상의 최대 의제는 과거청산 문제이다. 북한이 회담을 거부하는 이유는, 일본이 핵문제와 같은 외적 요인을 내세워 전후 배상 같은 내적 과제들을 의도적으로 소홀히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또 김교수는 “일본은 냉전적 사고에 기초하여 미국의 북한 정책의 약점과 한계를 이용해 자국 이익을 최대화하려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일본의 처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대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핵개발을 막겠다고 제재를 가하면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니 대책이라도 반듯하게 마련하자는 논리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한반도 위기설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일본이 이처럼 한가한 결론을 내린 이면에는 그들 나름의 독특한 계산이 있다. 핵개발 ‘대비책’차원에서 일본이 추진하는 것이 바로 전역미사일방어계획(TMD)이다. 일본은 이것이 북한의 노동 1호 미사일 요격체제라고 주장하지만, 한국 전문가들은 일본이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핵무기 운반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북한 핵 문제가 걸려있을 때는 핵문제를 이유로 일 · 북한 수교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면서 군비증강을 도모하고, 핵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이행하면 다시 전후청산론으로 선회하여 경제 진출을 추진하는 등 탄력적인 현실 적응ㄹ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실리 외교의 실체이다.

 통일원이 지난해 국정감사 때 내놓은 자료 가운데는 ‘일 · 북한 경제교류 현황과 전망’이라는 보고서가 있다 이에 따르면 전후 일본의 한반도 정책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틀 안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이후 ‘북한과의 전후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남북한 등거리 외교 원칙에 따른 실리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일본의 한반도 전략이 2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단계에서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한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제 2단계에서는 ‘자본과 기술에 의한 경제침투 도모, 동북아 질서 재편과정에서 주도권 장악’을 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수교라는 공식 관계정상화를 제외하면 북한과 일본의 관계는 사실상 복원된 상태나 다름 없다. 92년 일 · 북한 협력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 각지를 조사하고 돌아온 정부 시찰단은 깜짝 놀랄 만한 보고서를 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일본 기업들은 산업현황파악, 북한내 주요 거점 프로젝트 조사, 투자여건 조사 등 기획 및 조사 단계를 이미 마친 상태이다. 거물급 인맥 형성은 물론 도당 관계자나 지방공단 책임자 등 중견 인사들과 인적 관계 형성까지 끝낸 것으로 판단된다. 일 · 북한 수교시 북한 경제의 일본 종속화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 정보 누설에 신경
 일본 동아시아무역연구회와 일 · 조무역회는 91년 4월과 92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공동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개발수입 희망업종을 협의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50~60년대 대련 · 홍콩을 매개로 북한과 일본을 이어주던 ‘교역의 3각 루트’가 ‘투자의 3각 루트’로 복원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일본은 핵문제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북한에서 일본 국익을 확대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은 일본이 핵문제와 남북문제에 대해 협조하는 한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고 있다. 신년초 韓昇洲 외무부장관은 북한이 미 · 일과 수교할 경우를 대비하여 다각적 외교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에 주재하는 한 외교관은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려면 한국과 미국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 북한도 이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 장관의 수교 지원 발언은 핵 협상 막바지에서 일본 카드로 북한을 회유하려는 것일 뿐 진짜로 수교를 도와주겠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 핵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곧 또 하나의 외교 전쟁이 시작됨을 뜻한다. 한국 지도자들이 언제 재개될지도 모를 남북대화의 단꿈에 빠져 있는 동안 일본은 벌써 새로운 한반도 책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28일 일본 사회당 중앙원회 조직국장 겸 일 · 조우호촉진연맹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후카타 하지메(深田肇) 의원을 단장으로 한 일본 사회당 대표단이 북한 노동당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외교가의 관심을 모았었다. 후카타 의원은 90년 9월 28일 당시 가네마루 자민당 부총재와 함께 방북하여 3당 공동선언을 성사시킨 일본의 대표적인 친북파 정치인이다. 그는 12월 30일 黃長燁 노동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을 만났다. 황장엽은 최근 북한이 미국 · 일본과의 수교를 앞두고 노동당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특별 공작반에서 대일수교 분야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후카타의 방북은 한국과 일본 언론에서 아무런 눈길을 받지 못했다. 연립 여당의 장래가 불투명한 상태여서 사회당 정치인의 방북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지만 별다른 사항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은 연립 여당의 대북 정책에 상당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 친북노선을 견지해 온 사회당이 집권당이 됐고, 신생당의 실력자 이시이 하지메 의원은 90년 국회방북단 사무국장이었으며 내각의 정보조사실 외정심의실 안전보장실 등 핵심 부서를 총괄하는 가지무라 관방장관도 방북단 사무차장으로 일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외무성 당국자는 일본 언론과의 회견에서 “호소카와 정권의 인맥은 대개 북한에 가깝기 때문에 정보 누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일본 외교는 관료들이 움직인다. 이와 관련해 한 일본 관측통은 92년 7월부터 한국주재 일본대사관 공사로 일하다 지난해 11월 한반도 외교정책의 사령탑인 외무성 아주국장으로 취임한 가와시마 유타카(川島裕 · 51)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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