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람회에 초대된’ 걸개그림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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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 ‘민중미술 15년전’… 압수·파괴된 작품들도 한자리에



 80년대를 지나오면서 당국으로부터는 탄압을, 제도권으로부터는 소외를, 그러나 대중으로부터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민중 미술이 ‘당국’과 ‘제도권’의 부름을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섰다. 2월5일~3월16일 열리는 ‘민중미술 15년 : 1980~1994’전은 지난 시절 미술관 밖으로만 맴돌며 ‘새로운 미술’ ‘삶의 미술’로서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민중 미술이 미술관 안으로 들어와 공식적인 검증을 받는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그 검증이란 ‘현실과 발언’ 동인이 결성된 이후 민중 미술이 걸어온 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소개하고, 현재의 모습과 90년대 들어 나타난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포괄함으로써 지난 15년의 성과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조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정통 회화 외에 사회·판화도 전시
 엄선주의 원칙보다는 민중 미술의 전체상을 포용한다는 입장을 채택했다는 전시추진위원회의 발표대로 ‘민중 미술 15년전’에는 3백18명이라는 적지 않은 개인과 단체가 모두 4백16점을 출품했다. 전시 작품에는 회화·조각 같은 정통 양식뿐아니라 8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공급·수용된 판화와 사진, 만화도 포함되어 1천6백평의 전시장을 채운다. 각종 시위·집회 현장의 중요한 시각 매체로 활용되면서 80년대 미술운동의 한 성과로 평가되는 걸개그림이 중앙 전시실에 길게 드리워지는가 하면, 각종 현장의 벽면을 장식했던 벽화가 대형 사진으로 복원되어 전시된다.

 특히 86년 작고한 뒤로 공공 장소에서 진품을 보기가 힘들었던 오 윤의 작품과 80년대 불온 작품으로 지목되어 압수 당한 작품들이 특별실로 꾸며진다. 89년에 제작되었으나 압수를 당해 작품의 행방을 모르는 신학철씨의 <한국 근대사-모내기>는 작가가 이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했고, 임옥상·홍성담 같은 작가는 빼앗긴 작품을 되돌려받아 이 전시회에 내놓았다. 89년 한양대에서 파괴·방화되었던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연작 11점은 이번 전시를 위해 <갑오농민전쟁도> <5·18민중항쟁도> 등 4점이 재창작되어 다시 선보인다. 80년대를 지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 가장 적절한 표현 수단으로 통했던 민중 미술이, 벽면을 따라 한번 둘러보는 길이만 해도 축구장 한 바퀴를 도는 것과 같은 방대한 규모로 관람객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90년대 민중 미술, 자기 모색 단계”
 민중 미술 15년전은 8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미술의 여러 경향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큰 전시지만, 이 전시와 현재의 민중 미술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대에 보여줬던 창작의 열기도, 이론의 불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미술계 일각에서는 민중 미술의 변질 혹은 위기를 말하며 심지어 민중 미술 15년전을 ‘과거형’으로 인식하려는 시각까지 비치고 있는 것이다.

 민중 미술 15년전을 ‘현재형’으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시각에 대해 미술 평론가 유홍준씨(영남대 교수)는 “우리의 민중 미술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나 단충적인 조형 사조가 아니다. 군부 독재 타도라는 정치적 과제에 복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차출된 투쟁도 아니고, 사회주의 미술을 동경하여 추종하던 아류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평가하면서, 90년대의 민중 미술이 자기 모색에 들어가 있음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함께 민중 미술은 현장 미술에서 전시장 미술로 복귀했고, 전시장 미술은 80년대의 현실 관계에 집착한 것을 넘어서 현실·인간·자연·역사를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깊은 모색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민중 미술은 소집단 운동으로 출발해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와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이라는 전국 미술인 조직 결성 등으로 확산되고, 90년대 들어 개인전이 늘어나면서 내면화하는 과정에 들어서 있다고 평가된다. 민중 미술 15년전은 이 과정을 개별 작품을 통해 소상하게 소개하면서 ‘새 매체 개발’ ‘미술 언어 확산’이라는 90년대의 특징까지 포괄한다. 광고사진과 문자를 활용해 성의 상품화 현상을 다루는 매체 미술, 환경 오염에 대한 고발과 격렬한 자의식 표출 등이 이 전시회에 담기는 것이다.

 “출품 작가 선정 기준이 넓은 만큼 다양성과 질적 편차의 폭 또한 넓다. 그것은 90년대 민중 미술 진영의 특징이자 한계이며 나아가 한국 미술의 전반적인 한계이거나 혹은 전망 부재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다.” 미술 평론가 최태만씨(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90년대 민중 미술이 전망 상실의 시대에 전망 찾기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 전시가 새로운 전망 설정이라는 대전제나 목표를 담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가장 유효한 종합전 형식을 띤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80년대 사회 격변 과정에서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구실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민중 미술은 ‘당대의 예술 활동에 미학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기구’인 미술관, 그것도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옴으로써 15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대접을 받게 되었다. 관람객들도 시위·집회 현장에서 구호를 들으면서 보거나 또는 다소 긴장하며 보았던 그림들을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편안한 장소에서 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전시회가 ‘미술은 나와 거리가 먼 것’ ‘미술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라는 일반인의 고정 관념을 깨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민중 미술 15년전 전시추진위원장인 작가 김정헌씨(공주대 교수)는 “이 전시회가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문화 충격을 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숙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을 확신한다”라고 밝혔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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