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시인들의 생명선언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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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인 ‘생태환경시집’ 나와 …고발에서 희망까지 제시

지구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한 형제’이다. 환경운동과 생태환경문학의 대표적 이론으로 꼽히는 가이아論과 분자생물학의 생명표어들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수단화할 수 없다는 이 전언들은 서구의 이분법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다.

인간/자연이란 이분법에 바탕한 서구문명은, 김용옥씨의 지적에 따르면 풍요라는 욕망 혹은 환상의 충족 과정에 다름 아니다. 풍요를 위해 현대문명은 지구상의 모든 것을 이용해왔고 에너지의 쓰레기인 엔트로피만을 증가시켜온 것이다. 위의 두 이론과 더불어 서구의 한 종교인이 쓴《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강조하는 “욕망에 대해 게을러라”는 경고도 생태환경문학의 또 다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다산글방’에서 곧 나올 시인 22인의 생태환경시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고진하 ·이경호 엮음)는 생태환경시에 관한 국내 최초의 엔솔로지로, 위와 같은 근거들을 환기시키지만 무엇보다 먼저 “환경문제의 가장 큰 적인 환경에 대한 불감증을 치유해야 한다”는 동시대 시인들의 절실한 환경선언이다.

“환경불감증이 가장 큰 환경문제”
고은 천상병 정현종 김지하 신경림 이형기 김광규 등 ‘큰 시인’들에서 부터, 김명수 이하석 최승호 장석주 김신용 고형렬 고진하 이승하 등 70~80년대 시인들, 그리고 최계선 정인화 유하 함민복 허수경 박용하 등 90년대 젊은 시인들이 참여한 이 시집은, 앓고 있는 지구에 대한 ‘문병’에서 시작해 ‘무뇌아를 낳는’공장지대의 종말론적인 풍경들, 겉으로는 아직 멀쩡해 보이는 녹색의 자연에 대한 마지막 친화력의 확인을 거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그 한줄기 희망’의 끈을 놓칠 수 없다는 시인들의 전망까지 모두 6부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의 근황을 묻는 시인들은 쓰레기통 그 자체인 도시와 그 속의 눈먼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 관찰은 안타까움이다. 이형기씨는 “미처 다 소비하기도 전에/쓰레기통만 가득 채우는 시대” 위로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전천후 산성비를 절망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장석주씨에게 이제 하늘은 인류의 거대한 무덤이다. 장씨의 시 <밤하늘은 아름답다>는 밤하늘이 찬란한 까닭이 하늘로 올라간 중금속 때문이라는 반어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환경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이다.

생태시 연작을 발표하고 있는 정현종씨는 死神으로 둔갑한 문명 속에서 “우주가 거품을 물고 쓰러”짐을 보면서 “모든 게 어긋나 있잖어?”라고 캐묻는다. 문명은 이제 사신이어서, 인간과 어긋나 있어서, 시인에겐 아스팔트 위의 닭도 ‘생명의 꽃’으로 확대되어 보인다. 죽음을 향해 발전하는 문명에 대한 절망인 것이다. 실제로 무뇌아 사건이 터지기 전 시 <공장지대>에서 무뇌아를 예감한 바 있는 최승호씨는 도시문명의 그로테스크함을 포착해낸다. 그 배정형의 전율스러움은 물론 일그러진 생태환경 탓이다. 그는 시 <밤의 폭풍우>에서 도시의 “우울한 정신병의 영혼들”에게 퍼부어지는 “미친 폭풍우”를 배경으로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미리 전해주는 것이다.

무제한으로 뿌려지는 농약과 산성비 때문에 “이대로 가면 10년도 못 가/어린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죄와 벌뿐”이라는 고은씨의 <첫눈>이나 ‘온산병’으로 허물어져가는 온산공단 주민들과 정부당국의 회유와 협박을 전하는 정인화씨의 <여기는 온산> 그리고 일제 때 남편을 원폭으로 잃고 그 ‘원폭배냇병신’과 살고 있는 ‘원폭모녀’를 그린 허수경씨의 <원폭수첩 ·6>등은 생태환경문제에 대한 ‘보고서’들이다. 특히 고형렬씨는 지난해 핵문제에 관한 장편서사시와 지난 봄 환경문제에 관한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를 펴냈다.

이 시집을 역은 문학평론가 이경호씨는 유하씨의 ‘압구정동에 관한’ 시편들을 분석하면서 현대문명은 생활의 안락함이란 미끼로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진단하다. 욕망은 인간의 주체적 의지와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나 추구돼야 할 환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욕망에 대해 게을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욕망에 순치되는 과정이 곧 지구를 망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라는 이 시인들의 질문은 ‘인류는 언제 지구에서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곧 대치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지하씨가 시 <생명>에서 “어미가/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는 그런 “생명의 슬픔/한줄기 희망”을 믿고 있는 것처럼, 시인들의 캄캄한 절망은 결코 버릴 수 없는 희망에의 강조법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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