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 홀린 친일미술 발자취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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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엔 한국화단 장악 …미술사 차원에서 정리해야

해방 46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식민잔재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가, 근자에 친일관계 연구서들이 본격 출간됨에 따라 ‘일제 잔재의 청산’이 새삼 주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지식층의 관심을 환기하는 데 그칠 분 폭넓은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문학이나 현대사 등 여타 분야와는 달리 미술쪽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본격 연구가 없어 친일미술에 대한 연구 활성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미술전문지 《가나아트》7 ·8월호에 소개된 몇점의 작품들은 단편적이나마 매우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전남대 이태호 교수(미술사)에 의해 발굴된 이 작품들은 일제 식민화정책의 주요 기관이었던 조선식산은행의 사보《會心》에 실렸던 삽화들로 당시 친일에 가담했던 대표적 작가들의 활동상을 뚜렸이 보여준다.  표지에 전통 궁중문양을 싣는 등 얼핏보아 조선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듯한 이 은행사보는 실은 경제수탈을 정당화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잡지들에 일반적으로 통용된 수법이기도 하다.

‘皇紀 2603’으로 제작시기 표기
이번에 공개된 7점 가운데 전쟁선양의 시국적 주제를 담은 작품은 김인승(미국에 생존)의 ‘간호병’, 심형구(62년 작고)의 ‘기관총을 쏘는 병사’(68쪽 참조), 김기창(서울에 생존)의 ‘총후병사’등 모두 일제 말기인 1943~1944년에 그려진 것들이다. 김인승의 ‘간호병’은 ‘성전’에 봉사하는 여성 간호병의 결연한 표정이 잘 살아 잇는 작품으로 ‘皇紀 2603’이라고 적힌 제작시기가 작가의 극명한 친일의식을 잘 보여준다.

친일미술인의 총책 심형구는 조선학병을 그린 유화 ‘興亞를 지킨다’로 1939년 善戰(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바 있는데, 이번에 소개된 작품은 한층 적극적인 전쟁찬미의 내용을 담고 있다. 휴식하는 학도병의 모습을 그린 김기창의 ‘총후병사’역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담긴 작품이다. 김기창은 이보다 한해 앞서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68쪽 참조)라는 삽화를 게재한 바 있는데, 이 그림은 입영의 영광을 안은 조선청년이 얼떨떨해하는 부모를 좌우에 두고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밖에 김은호 이상범 박영선의 작품도 소개되어 있으나 이들의 경우는 이미 발굴된 작품들에서 더욱 선명한 친일상을 확인할 수 있다. 빼어난 초상화 실력으로 일본 고관과 매국 귀족들을 그렸던 김은호(79년 작고)는 ‘금채봉납도’(1937 ·69쪽 참조)를 제작하며 친일 미술에 뛰어들게 된다. 최초의 본격 친일미술이라 할 이 작품은 친일파 인사들의 부인회인 액구금채회에서 국방헌금으로 금비녀 등 장신구를 모아 총독에게 바치는 장면을 담은 것인데 작가의 장기인 일본풍 세필 채색 솜씨가 능숙하게 발휘되어 있다.

징병분위기 고취 위한 1백호 대작
이제껏 발굴된 것 중 가장 대표적 친일작품은 朝 ·日 합작품인 1백호짜리 유화 대작 ‘조선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1943 ·70쪽 참조)이다. ‘화필보국’의 취지를 받들어 丹光會 회원 19명이 꼬박 넉달간 공을 들인 이 작품은 당시 서울 ·평양으로 순회 전시되며 지영분위기를 고취하는 데 이용되었다.

일제하 유명 미술인의 친일활동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전쟁선양도를 그리는 데 헌신한 ‘적극적 친일’과 △국방기금 모금전에 참여한 ‘소극적 친일’ △여기에 이른바 ‘왜색풍’이라 불리는 일본적 예술형식의 수용자들을 첨가할 수 있으나, 당시의 불가피했던 미술환경을 고려할 때 왜색풍을 곧 친일로 보기는 곤란하다는 이견이 있다.

일제 말 흔히 다루어진 시국적 주제는 일선 풍경이나 후방의 산업전사, 연성(練成)에 매진하는 학생 등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진실미가 두터운 작품들”이었다. 이와 같은 총후(銃後 ·전후방)적 주제의 작품은 1940년 제 19회 선전을 기해 대거 등장, 전쟁 말기로 치달으며 더욱 기염을 토한다. 이 시기 관민합작의 총력체제인 조선미술가협회가 황민미술 건설의 첨병역을 수행하게 되는데 서양화부 이사 심형구를 비롯, 일본화부의 김은호 이상범, 서양화부의 김인승 배운성, 조각부의 김경승 등이 각 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가운데 시국강연과 논설등으로 맹활약을 한 심형구는 성악가인 아내 김모씨와 함께 부부가 친일에 나선 대표적 사례이며 이상범 이건영은 부자가, 김정승 김인승은 형제가 친일에 가담한 예이다. 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서 특선한 것으로 알려진 이건영은 후에 월북한다. 그런데 이상범(72년 작고)의 경우는 시국 주제의 작품을 그리지는 않았으되 “화풍과 예술의 정신에 있어 누구보다 일제 잔재를 드러낸 화가”로 지적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현재 한국 화가 중 최고의 작품가를 자랑하는 그의 그림들에 대해 “일본몽롱파(안개낀 듯 몽롱한 분위기를 내는 유파)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한 퇴영적 풍경들”이라고 재평가하면서 그의 대중적 인기는 일본적 미감에 대한 향수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후미술전 조선남화연맹전 등이 시국을 주제로 한 직접적 친일행각이었다면, 선전은 ‘일본정서의 침윤’과 ‘조선정조(情操)의 고취’라는 상반된 정책을 병행해 간접적 친일을 조장했다. 그 결과 동야화단에는 일본풍의 강렬한 채색이 지배하게 되고, 서양화단에는 ‘일본식 조선향토색’의 기형아가 태어난다. “당시 봉건사회의 회고 취미와도 잘 맞아떨어진” 이 향토색미술은 선전을 통해 권장되며 이후 한국화단의 주요한 흐름을 이루게 된다.

일례로 42년 선전 특선 수상작인 윤효중의 ‘弦鳴’(국립현대미술과 소장 ·68쪽 참조)은 ‘향토색’이니 ‘민족성’이니 하는 소재들이 얼마나 화려하기 그지없는 논리로 식민지 조선인을 홀렸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 여인의 자태와 의복의 미를 재현한 이 나무조각은 “여성이 각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류에 맞춰 멸사봉공의 대열에 나서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사실상 해방 직후 일제 잔재의 청산은 우리 민족사회 최대의 과제였다.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나 당시 잔재 청산의 합의는 매우 뜨거웠다. 범미술인들의 결집체로서 태동한 조선미술본부는 ‘친일미술가’로 규정된 김기창 김경승 김은호 김인승 심형구 이상범 윤효중 등을 회원명단에서 제외시켰다. 이들 친일인사 중 참회의 고백을 한 이는 매우 드물지만 이상과 절친했던 곱추화가 구본웅이 “나의 뇌수를 청소시키지 않고는 참다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라고 뉘우친 대목은 작가적 양심에서 우러난 솔직한 반성으로 흔히 인용되곤 한다.

83년, 친일 43명 명단 첫 공개
김기창도 1946년 《조형예술》1호에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라는 글을 기고해 “…깊은 뿌리 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조선적, 조선적’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먼저 ?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라고 자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잠깐 숨을 죽이고 있었던 대부분의 친일미술인들은 곧바로 대학에 적을 두거나 국전 심사위원 등으로 참여하며 한국 화단의 실력자로 행세하게 된다. 이들은 철저한 ‘탈정치 ·탈이념’을 표방하며 활동을 재개했는데, 국전이 줄곧 공정성 시비에 시달렸던 것도 이들이 전시회 운영의 중추세력으로 포진했기 때문이라는 비난이 높다. 이 시기 이화여대 초앙 김활란의 총애를 받던 아내를 등에 업고 이대 미대를 창설한 심형구는 ‘옛동지’인 김인승 등으로 교수진용을 갖추고 이후 상아탑에 안주한다.

친일인사들의 득세는 3 ·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3 ·1문화상’의 역대 수상자 중 30% 이상이 친일 이력자라는 조사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60년 이 상이 제정된 이후 미술 분야 수상자로서 친일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사는 이상범 김경승 김은호 김인승 박영선 김기창 등 6명이다.

한편 단독정부 수립 후의 냉전적 분위기 속에서 유야무야됐던 친일미술 논의는 이후 30년의 세월을 미뤄오다가 7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조심스럽게 재개되었다. 그리고 83년, 《계간미술》(봄호)이 43명의 친일미술인 명단을 공개하며 식민잔재의 청산을 본격 거론한 ‘사건’은 화단에 원폭을 던진듯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미협 산하 36개 단체 명의의 반박성명이 나오고 인신공격성 항의가 난무하는 가운데 불똥은 화단에서 미술대학 학장들에게로, 다시 미술평론가들에게로 옮겨붙었다.

당시 무기명으로 의견을 낸 《계간미술》의 필자들은 식민미술의 잔재로 △인상파풍및 향토적 서정주의가 초래한 리얼리즘 작풍의 배제 △민족미감의 상실과 왜색화된 채색 △예술지상주의의 신봉이 낳은 왜곡된 예술관 등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지금껏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군국주의 토양에서 자라난 일본의 미술은 극단적으로 말해 공예적 기교와 형식이 앞선 ‘무내용’의 화풍”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같은 일본풍의 영향이 작품을 소시민화하고 미술을 개인 소유의 장식물로 전락시킨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술계에서 친일미술에 관한 연구는 뒷전으로 밀려 있다. 80년대 들어 일본인 연구자들이 국내 고서를 싹쓸이해간 뒤 자료 수집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연구자들을 토로한다. 또 생존작가들의 이름을 거명해야 하는 어려움, 미술계 안팎의 무관심도 연구를 위축시키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근자에 친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있는 현상과 관련, 반민족문제 연구소 김봉우 소장은 “60년대 이후 정부가 추진해온 대일 경계의식이 ‘무장해제’ 정책이 서서히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경각심을 환기시킨다.

미술계에서는 그간 단편적으로 진행되어온 친일미술 연구가 하루 속히 미술사 차원에서 본격 정리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친일의 구체적 사례도 중요하지만 일본화풍이 국내화단에 끼친 그릇된 영향을 채색과 전통 수묵 양면에서 고루 연구해야 하며, 선전 출품을 위해 국내 유명 작가들이 일본 작가를 모방한 사례도 찾아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같은 작업이 우선될 때에만 해방 이후 지속되어온 소구양식의 무비판적 수용이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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