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애국자’를 돌보는 나라
  • 정운현 (친일문제 연구가) ()
  • 승인 1994.03.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적 허위임에도 ‘독립유공자’ 서훈 … 서류 조작해 꿰맞추기까지


지난해 10월18일 민주당 이해찬 의원은 국가보훈처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독립유공자 심사의 난맥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이 날 이의원은 질의에 앞서 보훈처의 무사안일한 업무 처리태도를 강하게 질타한 뒤, 독립유공 수훈자중 2명을 예로 들어 그동안 말로만 나돌던 독립유공자 심사 관련 비리를 공개했다.

 이의원이 거론한 두 사람 중 한 명은 광복회 부회장 李玉童씨 (72)로, 그는 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으로 있다. 이씨는 항일학생운동 공적으로 86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상훈법 개정후인 90년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받았다. 이씨 서훈과 관련한 이의원의 지적사항은, 이씨가 보훈처에 제출한 공적 내용이 사실과 다를 뿐더러 보훈처가 이를 제대로 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훈처가 발간한 공훈록에, 이씨는 일본유학 시절 항일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고 출옥후 다시 도일하여 학병 거부 투쟁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씨는 포상신청 서류로 인물 신변잡기인 《아빠의 일기장》(辛 鎬 저, 1973)이라는 책과 <동아일보> 기사(58.3.17)를 제출했다. 참고로 86년 당시 보훈처가 배포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안내문’에 따르면 공적 입증 서류로 ‘형을 받은 자’는 판결문 등 수형 기록,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형을 받지 않은 자'는 45년 8월14일 이전에 집필되었거나 발행된 문헌을 제출토록 되어 있다. 이는 지금도 보훈처가 근거 자료로 요구하고 있는 서류이다. 결국 이씨가 제출한 서류는 모두 광복 후에 간행된 것이어서 보훈처가 요구하는 서류에 ‘자격미달’이며, 이씨는 수형 경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판결문 등 수형 기록이 없어서 현재로선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입증할 길이없다. 한편 이씨를 두고 일부에서 ‘가짜’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모교인 일본 중앙 대학에 학적을 조회한 결과 ‘학생운동’ 기간 중에 학교에 적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국감 이후 보훈처는 이씨에게 ‘공적 재확인’이라는 공문을 통해 소명할 기회와 함께 추가 자료를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별무소득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획기적인 자료가 나타나서 공적 입증이 되지 않는 한한씨에 대한 서훈 취소는 현행법상 불가피것으로 보인다. 이씨와 보훈당국 모두 책을 면할 길 없으나, 굳이 따진다면 요건 미달인 서류를 제출한 이씨보다는 86년 초심때는 물론 90년 훈격 승격을 위한 재심에서까지 특례를 인정한 보훈처에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자료 확인도 않고 서둘러 포상”
 한편 이씨와 함께 보훈처 국감에서 거론된 이는 白珍守씨와 그의 서류상의 아들 白在鉉씨 이다. 백진수씨는 33년 상해에서 발생한 일본공사 有吉明 암살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한 白貞基 의사의 동생이다. 백진수씨는 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는데 이와 관련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백씨 유족측이 백씨의 공적 입증 자료로 제출한 《수형인명부》와 《수형자색인부》에는 그의 죄명이 ‘통화 위조 방조’로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범죄내용이 언급돼 있지 않아 이를 독립운동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의 수형이 독립운동과 무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명백한 자료 확인을 거치지 않고 서둘러 포상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특히 백씨는 주모자·공범자 4명 중 혼자만 서훈을 받았는데 이는 서훈 형평에도 어긋나는 처사로 지적되고 있다.

 백진수씨의 경우 수권자의 자격과 관련해서도 의혹이 일고 있다. 현재 백진수씨의 유족 (수권자)은 白在鉉로 되어 있는데 1939년생인 재현씨는 생후 27년 뒤인 1966년에 출생신고가 되어 있다. 결국 재현씨는 백진수씨 사후 20년 쥐에 불쪽 튀어나와 자식이 된셈인데 특별히 입양기록도 나와 있지 않아 호적서류가 조작되었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이같은 재현씨의 수권 자격은 현행법상 인정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가 66년에 출생신고와 함께 백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가정해도 입양 시점이 광복 후인데다가 광복후 입양자의 자격 요건인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또는 배우자 직계 존·비속을 부양한 자’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백진수씨 사후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백씨를 부양한 적이 없을 뿐더러 백씨의 부인을 부양한 사실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진수씨의 부인이자 재현씨의 양모인 鄭○○씨가 86년에 사망했을 때 상주는 백씨의 친자이자 백정기 의사의 양자인 白械鉉 현광복회 사무총장 혼자뿐이었다고 당시 상가를 문상했던 인사들은 증언하고 있다. 백총장은 호적상 백정기 의사의 양자로 되어 있으나 지난 90년 광복회 총무부장 시절에 그 자신이 생부 백진수씨의 포상을 신청하였고, 그가 진술한 내용들이 그대로 생부 백진수씨의 공적 내용으로 인정된 점 등으로 미뤄 백씨의 포상과 관련해 그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독립운동가 시치에 파다한 실정이다.

사망일자가 제각각인데도 연금 수혜
 수권자의 자격과 관련한 또 다른 사례로 金羲善씨(80년 독립장 추서) 유족의 경우가 있다. 김씨는 한때 임정시절 이후의 행적과 관련하여 ‘친일 시비’에도 오르내렸었다. 그의 유족(수권자)은 金宗彦씨(66·경기도 남양주 거주)로 김희선의 장손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 따르면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의 경우 45년 8월14일 이전에 사망한 경우에는 손자(단 호주 승계자임)까지 연금수혜 대상자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김희선의 사망 일자를 보면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 가지로 나와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공적심사 업무를 담당하던 내각 사무처에서 작성한 공적조서를 보면 그는 ‘1925년 3월(일자 미상)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 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에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7월6일로 나와 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 후면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 29일 卒’로 되어 있다. 사망일자의 시차가 무려 25년이나 되는데,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새겨진 대로다. ‘25년 3월 전사설’은 그가 25년 11월 7일 고향인 평남 강서 소재 강서교회에서 침례를 받은 사실로, 그리고 45년 7월 ‘광복 직전 사망설’은 ‘단기 4282년(서기 1949년) 在京 義明校友會-同’이라는 설명이 붙은 한장의 사진에서 허위임이 입증된다. 이밖에 그를 광복 이후에도 봤다는 증언자도 많다. 결국 김희선의 손자는 조부의 사망일자를 조작하여 80년 이후부터 연금을 받아오고 있는데 이 역시 보훈당국이 몰랐을 리 없다.

 지난해 보훈처 국감에서 이해찬 의원이 공적심사와 관련된 자료를 요청한 독립유공자54명 중에는 의병활동 공적으로 80년에 국민장(현 독립장)을 추서받은 孫永珏이라는 인물이 들어 있었다. 92년에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인물록》이나 총무처가 발급한 《상훈기록카드》를 보면 그의 본적은 ‘경북 영일군 죽장면 정자리’로 나와있다. 그러나 지난해 국감 당시 보훈처가 이의원에게 제출한 관련자료 증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북 월성 강동 초감’으로 고쳐져 있다. 보훈처가 가짜 독립유공자 손영각에게 잘못 포상된 것을 알고 공적조서를 위조하여 완벽한 진짜 독립운동가로 둔갑시키려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변절 밝혀진 사람이 건국표창 받기도
 78년 이후 16년째 조부의 독립운동 공적을 되찾기 위해 이 일에 매달려온 친손 孫晉太씨(63·서울 성동구 자양동)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사건은 보훈처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행임이 분명하다. 손씨는 78년 5월부터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선친과 조부 (접수번호78-11)에 대한 서훈을 신청했다. 그런데 이해 12월 같은 집안(월성 손씨)거주 孫 晙씨가 동명의 ‘孫永珏’ (포상신청서내용 중 본적은 경북 월성군 강동면 초감리임)에 대해 포상을 신청해오자 보훈처는 손준씨의 신청을 이중접수라며 기각해 반려했다(문서번호:관리 1800-3247). 그후 손 준씨가 이의를 제기하자 보훈처 당국은 신청자양측과 보훈처 당국자, 그리고 문중 종손 등을 참고인으로 입회시켜 대질신문을 벌인 끝에 첫 신청자인 손진태씨의 서류가 정당한것으로 최종 판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막상80년 광복절에 훈장을 받은 사람은 놀랍게도 당초 보훈처가 진짜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손진태의 조부인 손영각이 아니라 손 준의 조부인 손영각이었다. 보훈처 스스로 손진태측에 선언한 ‘판정승’을 번복한 것이다. 한편 보훈처가 작성한 원본 공적조서를 보면 본적은 손진태씨가 제출한 내용을, 생몰 관련 사항은 손 준씨가 제출한 내용을 조합하여 작성한것으로 나와 있다. 손진태씨는 이같은 사실에대해 보훈처측에 수차 해명을 요청했으나 보훈처측은 해명은 커녕 당사자인 그에게 서류열람조차 거부해 왔으며 공적 입증 자료와 관련해서도 굳이 <기려수절> 등 특정 자료만 인정함으로써 손 준씨측을 두둔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같은 사정을 감사원·사정당국에 호소해 보았더니 처음에는 제법 의욕적으로 조사가 진행되다가 무슨 영문지 도중에 감사가 중단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고는 낙심한 나머지 한때 이 작업중단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사건의 핵심은 두 사람 중 누가 진짜 독립운동가 손영각의 친손인가를 밝혀는 데 있는데, 24년에 간행된 이 집안의 족보인 《月城孫氏世譜》를 보면 선산의 위치 등으로 봐 손진태씨가 진짜 독립유공자 손영각의 친손임이 금방 확인된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사가 원칙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임정 요인 출신 南亨?에 대한 포상이 있다. 62년 2월28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는 朴容萬과 함께 변절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포상 직전 대상자에서 탈락한 인물이다. 그러나 남씨는 83년도에 건국표창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보훈처가 그의 ‘변절’을 눈감아준 셈이다. 실지로 83년에 보훈처가 작성한 그의 공적조서에는 ‘변절부’ 난이 빈칸으로 남아 있다.
鄭雲鉉 (친일문제 연구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