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 이윤삼 편집국장 (yslee@sisapress.com)
  • 승인 2006.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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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총리가 인사 청문회를 통과했을 때 꼭 이런 느낌이었다. 2000년 린 헌트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느낌과 같았다. 헌트는 프랑스 혁명을 여성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했다. 대혁명(Great Revolution)이라고 부를 정도로 인류사에 큰 흔적을 남긴 프랑스 혁명이 사실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박애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여성’이 빠져 있으며 그 이면에는 철저한 가부장적 남성주의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존 해석과는 전혀 달라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이 책을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가 영화·책 등을 통해 돈벌이에 눈이 벌건 유대계 미국인들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 책 <홀로코스트 산업>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나의 느낌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명숙 총리의 등장을 환영하고 있는 듯하다. 포용과 화합, 청렴의 리더십 같은 주문도 봇물 터진 듯 쏟아지고 있다. 여성 총리의 등장은 여성의 능력을 폄하하는 갖가지 편견을 걷어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해소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경계할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참여에 대한 구조적 한계이다. 지난해 유엔개발기구(UNDP)가 발표한 한국 여성의 권한 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는 세계 59위였다. 여성 권한 척도는 여성 국회의원 수, 행정관리직, 전문기술직, 그리고 남녀 소득차를 기준으로 여성의 정치·경제 활동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참여도를 측정하는 수치이다.

특히 기업의 성 차별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윤송이 SK텔레콤 상무처럼 파격적으로 발탁된 인사도 있으나 상징성 차원에 그치고 있다. 삼성그룹의 여성 임원 비율은 1%에도 못미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여성의 68%가 직장에서 성 차별을 느끼고 있다. 

평범한 우리 주변의 여성들에게 눈을 돌리면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번듯하게 대학 교육도 받았고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해 한숨 쉬는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 심지어 우리는 얼마 전 서울구치소 여성 재소자 성추행 자살사건을 접했다.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 폭력에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여성마저 적지 않은 것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한명숙 총리의 등장은 ‘허스토리’뿐만 아니라 ‘히스토리’ 진전의 신호탄이다. 그의 기용이 정치권의 양성 평등 이미지 구축에 도구로 사용되는 등 상징성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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