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정치 가로막는 ‘가십란’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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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위주의 우리 정치기사 가운데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이 ‘정치가십’이다. 정치권의 이면에서 이뤄지는 정치인들의 언행이 샅샅이 보도되는 정치가십은 그 ‘읽는 맛’ 때문에 가장 독자가 많은 난이기도 하다. 비단 독자만이 아니다. 당사자인 정치인들도 “다른 정치기사는 안 읽어도 가십은 읽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반응이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가십(gossip)은 신(god)과 일가친척(kinsman)의 합성어이다. 어원상으로만 따지면 영세받을 때의 대부모처럼 친근한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뜻이 전화되면서 인간적 사실이나 정서적 사실을 습관적으로 폭로하는 인격체자체, 더 나아가 어떤 특정 사태를 놓고 친근한 사람이 퍼뜨리는 뒷말이나 뜬소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정치 가십란에 독자들이 유독 흥미를 느끼는 것도 흥미를 느끼는 것도 정치인들의 언행을 비교적 ‘가볍게’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인 듯하다.

  신생 일간지까지 포함, 우리 일간지들은 예외없이 2·4면 혹은 5면에 가십란을 고정 배치하고 있다. 대부분 익명으로 보도되는 기사의 꼭지수는 4~5개로 거의 일정하지만, 정총리 폭행사건 등 특별한 정치적 사안이 발생할 때는 정치권 전방의 반응을 취재한 ‘확대가십’등이 실리기도 한다.

  외국 일간지의 경우 일본을 제외하면 정치가십란이 없다. 다만 《뉴스위크》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등 주간지에 인물란이 있을 뿐이다. 이 경우에도 인물을 다룬다는 점만 같을 뿐 우리의 가십란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인물 정치기사’의 전형인 가십란의 효시는 동아일보의 ‘단상단하’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단상단하’ ‘기자석’ 등 50~60년대에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가십란은 지금처럼 정치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닌, 특정 주제나 사안과 관련된 칼럼적 성격을 띠었었다.

  가십란은 특히 모든 정치정보가 통제된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 아래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과거 야당시절 김영삼씨의 23일간에 걸친 단식이 정치면 본기사에 단 할줄도 비추지 못했을 때, ‘정치현안’ 등으로 언급됐던 것도 바로 가십란이었다. 강력한 언론통제하에서 그나마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게 이 가십란이었고, 국민들도 ‘행간을 읽는’ 이 난을 통해 진실의 편린을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문화가 이 정도 수준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한 것은 신문의 정치가십 때문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의 언동 하나하나를 세세히 보도함으로써 오히려 이 가십란을 십분 활용하는 ‘가십 정치인’을 만들어냈고, ‘가십정치’를 지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여당 중진의원은 가십용 고사성어 사전을 가지고 다니는가 하면 아예 가십용 기사를 불러주는 야당 의원들도 있다. 각 정당이 상대 정당에 대해, 혹은 한 계파가 상대 계파에 대해 상호 비방전을 가십란을 통해 주고받는 일도 많다.

  또 “…라고 비아냥” “…라고 신경질적인 반응” “…라고 얼굴 붉혀” 등 가십란 특유의 주관적 해석이나 분위기 전달, 어미를 생략하는 독특한 서술 방식 등은 정치를 지나치게 희화화하는 측면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지난해 가십란을 폐지했던 ㄱ신문은 독자들의 성화와 경영진의 주문으로 다시 부활시켰고, 아예 가십란을 두지 말 것을 검토했던 한 신생언론사도 결국은 “가십란이 없어선 안된다”는 여론에 굴복하고 말았다. 현재 가십란을 두지 않은 일간지는 없다. 가십기사를 궁극적으로 줄이거나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는 언론계 일각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가십란은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이며, 경제·사회 등 다른 지면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다만 <한겨레신문>의 경우 가십란의 기사 마무리도 다른 일반기사와 마찬가지로 “…했다” 형태를 취함으로써 자의적인 주관성이 끼여들 여지를 줄이고 있을 뿐이다.

  정치인의 이면을 짐작케 하는 가십의 감칠맛과 순기능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십이 큰 정치를 가로막고 있는’ 역기능도 한번쯤 짚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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