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 우여곡절 ‘끝' 남북관계 이제부터
  • 편집국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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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외교 결실 거뒀지만 북한 더 경색될까 걱정

총체적 난국 희석 노린 ‘정치외교’지적돼야
盧·고르비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은 성공사례로 치부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단순한 외교관계의 수립이나, 양국 정상들이 서울?모스크바를 상호방문토록 유도해낸 회담의 합의사항을 두고 이르는 말은 아니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정부의 북방외교가 2년 남짓의 開化기간을 거쳐, 이번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동을 통해 滿開의 절정을 이뤘다는, 한마디로 노력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충분히 자축할만한 성공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은 대신 여유를 지닌 성공은 되지 못했다.

 회담을 마친 양국 정상은 회담장소인 페어몬트호텔의 별실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표명했다. 기자의 뇌리에 불현듯 89년 10월 서울을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수사의 고뇌에 찬 모습이 떠올랐다.

 ≪시사저널≫창간을 기념키 위해 서울을 찾았던 브란트씨는 텔레비전에 출연, 사회자로부터 20여년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됐던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때 질문을 받은 브란트씨가 고뇌에 찬 눈매로 답변한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소련을 상대로 독?소기본조약을 체결하는 여러해 동안, 또 그 기본조약이 체결되는 바로 그날 그 시점까지 우리는 동독측과 통독협상을 계속했답니다. 그 과정에서 동독측으로부터 당한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억지를 부려 협상을 결렬시키거나, 턱도 없는 부당한 요구를 해오기 일쑤였습니다.??

서독의 통일정책에서 배울 점
 굳이 동서독관계를 이번 새프란시스코 회담에 대입시킬 필요는 없다. 같은 분단국의 입장이지만, 한반도와 동서독은 분단극복의 상황이나 시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접근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만 통독의 주역 브란트가 그토록 유념했던 동독에 대한 배려를 같은 분단극복에 임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수행했느냐(북한을 배려하여)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새프란시스코 회담의 성사로 북한이 받을 충격은 상황을 바꾸어보면 분명해진다.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가상해 보라. 더욱이 한국측에는 귀띔이나 사전협의도 없이 부시와 金日成이 워싱턴과 평양을 상호방문하고,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키로 합의했다고 했을 때, 서울측 반응이 어떠하겠는가? 지금의 북한 입장이 바로 그렇다.

 기자가 이번 회담을 외견상 성곡적이지만 만족할 만한 여유있는 성공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이런 데 있다. 물론 노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회담에 앞선 목적지가 ‘평양??이었지만, 그들이 문을 열지 않아 ??모스크바??행을 택했다고 이번 회담의 성격을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선택의 불가피성에 있다기보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이 평양측에 던질 충격과 당혹을 미리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번 회담의 성과를 놓고 현지 미국언론들이 보인 우려나 불안은 단순한 기우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

 <볼티모어 선>의 사설은 도입부분부터가 우려로 시작된다. “미?소정상회담의 첫 경이로운 결실은 미국땅에서 개최되는 한?소정상회담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3국의 승리에 북한이 얼마나 분노를 터뜨렸을지 누구라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3국 중 두나라는 북한의 철천지 원수요, 다른 한 나라는 이오웰국(조지 오웰의 가상국가)지도자 김일성이 그토록 신봉해온 초강국이었다.??

 북한문제에 정통한 이종식교수(펜실베니아大)는 이번 회담이 북한의 뺨을 후려쳤으며, 다라서 김일성이 열차에 올라타거나 뒤처져남아야 할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국내 일부 보수파 한·소관계 급진전 불만
 <워싱턴 포스트>의 경우, 단순한 북한의 분격 이외에 한국내 보수계열이 소련에 대해 갖고 잇는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이번 盧?고르비회담을 열광적으로 지지성원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계열은 소련과의 너무도 급속한 접근에 우려를 나타내고 잇다. 특히 소련에 대한 투자를 반대하고 있다. 이 투자야말로 모스크바측이 한국과의 결속을 바라는 핵심 요체이다.??

 <뉴욕타임스>는 도쿄빌 기사로 일본의 시각을 이렇게 전한다. “이번 회담이 북한의 경색된 자세를 쉽게 교정했다고 보는 북한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한 일본외교관은 이렇게 말한다. 북한이 더욱 더 경색된 입장을 택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하고 그들의 기본입장에 변화가 오리라고 기대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이번 회담을 여유있는 성공사례로 볼 수 없는 도 한가지 이우는 회담을 리드해온 청와대측 접근방식이 ‘전투적??이었다는 데 있다.

 회담진행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서울 유력일간지의 주필 ㄱ씨는 “외교를 누가 누구한테 지고 이기는 싸움으로 보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워싱턴특파원을 역임, 여러나라의 외교교섭과 절차에 익숙한 ㄱ씨는 “북한을 끌어들이겠다는 당초 취지에서 크게 일탈, 상대의 급소를 물어 굴복시키겠다는 접근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이번 회담에 임한 한국측 외교팀의 단기를 아쉬워했다.

 이번 샌프란시스코회담이 성사되기까지 정부의 외교행사가 너무나 일방적이고 정치적으로 일관돼왔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돼야 한다. 재벌의 부동산투기와 증시파동으로 ‘총체적난국??을 선포한 정부가 그 발언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訪日외교로 전환, 일왕의 사과발언을 빌미로 ??난국??을 희석시켰다.

 정부는 또 일왕사과의 문제로 한·일간 격량이 높아질 기미를 보이자 언론기관을 통해 對日보도의 강도를 완화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로부터 채 일주일도 되기 전에 이번의 한·소정상회담으로 이어진다.

 외교는 결코 정치적 무기가 돼서는 안된다. 외교를 정치무기화한 것은 3공과 5공의 부끄러운 습관이었다. 5공 시절의 마지막 무렵 당국은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으로 중동 바레인에 억류돼 있던 金賢姬의 신병을 어서 빨리 인수해가라는 억류국의 요청도 아랑곳없이 시간을 끌다가 외교진을 보내 하필이면 대통령간을 끌다가 외교진을 보내 하필이면 대통령 선거 전날에 데려온 사실을 당시 중동현장에서 취재한 기자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번 샌프란시스코의 회담은 2년 남짓 꽃을 피워온 북방외교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정석이다.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하고, 고르비가 서울에 온다는 것은 부제에 불과할 뿐 주제는 어디까지나 북한이다. 이번 회담은 평양을 직접 상대로 하는 남북한 정상회담은 물론 미·북한 관계정상화를 촉진시키도록 기능해야만 완벽한 성공사례가 된다.

한·소 관계 약사
1854년 : 러시아 해군 푸티아틴제독이 군함 몰고와 개항 요청
1884년 : 조선·러시아 수교통상조약 체결
1896년 : 아관파천
1945년2월 : 얄타회담에서 미·소·영 한반도 분단 결정
1948년10월 : 소련의 북한 승인
73년6월 :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
78년4월 : KAL여객기 무르만스크 불시착
78년9월 : 신현확 보사부장관 세계보건기구 참석차 정부관리로는 처음 소련방문
79년4월 : 한·소간 국제전화 개설
83년9월 : KAL 007기 사할린 부근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됨
88년7월7일 :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88년8월 : 박철언 대통령정책보좌관 극비 방소, 수교교섭 개시
88년 9월 : 소련, 서울올림픽 참가
88년 9월 :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
89년 3월 : 최호중외무장관, 방콕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ESCAP)총회에서 소련의 리가초프 외무차관과 접촉
89년4월 : 양국 무역사무소 교환 개설
89년6월 : 김영삼 민주당총재 소련방문
89년7월 : 양사처 교환설치 회담
90년2월 : 모스크바주재 한국영사처 개설
90년3월 : 서울주재 소련영사처 개설
90년3월 :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 소련방문
90년3월 : 한·소 정기항공노선 개설 합의
90년4월 : 유종하·오브민스키 양국 외문차관 뉴욕에서 접촉
90년5월 : 아간베기얀 소련 대통령경제고문 방한
90년5월 : 도브리닌 소련대통령고문, 전직 정부수반협의회(IAC)참석차 내한 청화대예방
90년6월4일 :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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