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도 손자도 모두 매국노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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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윤용은 대표적 친일파 손자 이병길 ‘귀족회’이사


 

 민족반역자‘ ’매국노‘. 국내에서 간행된 모든 역사·인명사전과 교과서에는 이완용 이름 석자 앞에 이런 수식어를 붙여놓았다. 그만큼 그에 대한 민족의 심판은 준엄하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의 이완용과 그 일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종로구청 안 서고에 들어가면 먼지낀 이완용의 호적부를 들처볼 수 있다. ‘경성부 옥인동 19번지 호주 이완용’. 빛이 바랜한지 위에 일제 때 작성된 호적부의 이완용과 그의 아들·손자 이름 옆에는 ‘조선귀족’이라는 칭호가 선명히 적혀 있다.

 

이완용, 며느리와 불륜…장남 자살

 이완용은 牛峯 이씨로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李奭俊의 아들로 태어나 얼마 후 판중추부사를 지낸 李鎬俊에게 입양됐다. 이호준의 외아들인 李允40p●은 이완용의 서형인 셈이다. 훗날 두 형제는 똑같이 한일합방의 주역이 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이완용은 백작, 이윤용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 구한말 궁내부 대신을 지낸 이완용의 형 이윤용에 대해서도 역사 사전은 “〔조선〕민족반역자·친일파로 많은 부정축재를 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완용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이 李升九, 차남이 李恒九였다. 그러나 호적상으로는 이항구가 장남으로 둔갑한 채 이승구는 아예 빠져 있다. 황 현이 쓴《매천야록》은 장남 이승구의 행적과 관련해 귀중한 단서를 준다. 구한말 혼자 일본유학을 떠났던 이승구는 귀국 후 부친과 아내의 불륜관계를 알고서 “나라건 집안이건 다 망했다”며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완용의 당시 며느리 ●乾九는 ●善●의 질녀로 절세 미인이었다고 알려진다. 이같은 사실은 1910년 1월5일자〈대한매일신보〉의 다음과 같은 기사내용으로도 뒷받침된다. 당시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고 대한의원에 입원해 있었다.

 “41p●相 자부 임부인은 병든 시아버지 구료코저 의원까지 들어가서 41p●●하기 힘쓴다지. 평시에는 色●하여 그 즐거움을 다하더니 病●●● 저러하니 출중할사 그 횽성은 천만고의 특색일세.” 이런 관계 속에 任씨에게도 조선귀족 칭호가 붙여졌다.

 한일합방 후 이완용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2년 중추원 부의장에 올랐다. 3·1운동때는 세차례의 담화문을 통해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을 비난했다. 이 공로로 이완용은 1920년 12월28일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한다. 그는 1926년 2월12일 사망하기까지 나라를 판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와 은사금·은사토지 등을 이용해 전국 각지의 수많은 땅을 매입하고 이권에 개입하여 영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완용의 후작 작위는 1926년 3월15일 장손 이병길에게로 습작되었다. 병길은 항구 슬하에 태어났으나 자살한 백부 이승구 앞으로 양자입적한 사람이다. 차남 항구는 병길 외에도 병희 병주 병철 등 아들 셋을 두었다. 이병길은 이완용 사망 이후 호주를 승계받으면서 이완용이 조성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이완용 생전 때 동경으로 건너가 귀족학교 학습원을 마친 후 동경제국대를 나왔다. 1937년8월에는 귀족단체 同41p●會를 발기하고 이사장이 된 이병길은 조선귀족회·조선임전보국단 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지내면서 일제의 한국침탈에 앞장을 섰다.

 

증손 이석형씨, 이완용 묘 파헤친 후 화장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증손에 해당하는 그들은 이윤형·이두형 형제이다. 이윤형씨는 일제 때 일본인 고관대작의 자녀를 교육하던 제1사범을 거쳐 동성고교·홍익대 건축할과를 나왔다. 60~70년대에는 건축업에 종사하며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맡았고 청와대 경호실장 등 정부 요인들과 두터운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75년 캐나다로 이주해 17년여를 그곳에서 살아온, 이윤형씨는 지난해 5월 귀국해 대한교육보험 이사를 거쳐 미국계 회사인 암웨이코리아 고문을 맡고 있다. 캐나다에 있을때부터 증조부 이완용 명의의 재산상속을 목표로 소송을 제기해오다 귀국 후에는 직접 전국 각지의 땅을 찾아나섰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권세와 민족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지난 79년 이완용의 증손 이석형씨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묻혀 있던 이완용과 이항구 부부의 묘를 직접 파헤쳐 화장시켜버렸다.

 이완용의 관뚜껑에는 붉은 페인트로 일본 정부가 부여한 ‘朝鮮●督府中樞●●議長二位大勳位牛峯李公●樞’라 씌어 있었다. 이완용 부부의 관뚜껑은 주민이 가져갔다가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광대에는 이 관뚜껑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었던 박순호 교수는 “소장 직후 이완용의 친척되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총장님을 설득해 관뚜껑을 가져가 태워버렸다”고 밝힌다.

 폐묘를 추진한 이석형씨는 이완용의 셋째 손자인 李丙周의 장남이다. 이병주는 지난 62년 9월21일 일본 국적을 취득해 그곳으로 건너갔다. 이병주는 도일 즉시 생활보장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수락했다.

 직계증손 이윤형씨 외에 생존해 있는 이완용의 가장 가까운 代로는 막내손자 병철씨가 있다. 그는 현재 경기도 과천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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