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방면 재능 살려 김일성 우상화에 큰몫
  • 여운연 편집위원보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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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相玉 · 崔銀姬 부부가 만난 김정일

“권력세습문제로 외부세계에서 공격을 당하고 있지만 金正日은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金日成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아들이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난 78년 북한에 납치당한 이후 84년 11월 북한영화인 대표로 런던영화제에 참석해 서방세계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던 申相玉(63)씨는 당시 런던주재 한국특파원들이 '金正日이란 어떤 인간인가'란 질문을 던지자 이렇게 답변했다.

 그후 86년 2월 북한을 탈출한 申相玉 · 崔鎭姬(60)부부는 여러차례의 인터뷰와 체험수기《金正日왕국》 등을 통해 "김정일은 살인과 예술을 즐겼던 네로와 같이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라며 김정일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잇따라 폭로해 주목을 받았다. 8년 동안 북한의 실상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 부부는 김일성과도 만났으며 특히 그들의 납치를 직접 지휘한 김정일과는 각별한 관계를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현재로선 김정일에 관한 한 서방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김정일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들의 체험수기를 토대로 그의 면모를 요약해본다.

 78년 1월22일 홍콩에서 강제 납치당해 북한땅을 처음 밟았던 날, 직접 김정일의 영접을 받은 것을 시발로 북한에 체류한 처음 7개월 동안 그를 수십차례나 만났다. 그후 거의 매주 금요일만 되면 나(최은희)를 불러내 연회를 열고 영화와 뮤지컬을 구경시키곤 했다. 당시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 부부도 연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김정일은 심한 근시로 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키가 165cm밖에 안되 좀더 커보이도록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퍼머머리를 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칭송에 “저건 가짜야"

 그는 연회 도중 흥이 나면 직접 지휘봉을 잡기도 했는데 한국의 대중가요에서부터 경음악 ·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음악적 소양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정일은 슬하에 1남1녀를 둔 본처 외에 2명의 첩을 두고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회석상에서 만난 그의 부인은 163cm 정도의 약간 볼륨있는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잘 생긴 편이었다. 그는 나이가 두세살쯤 아래로 보이는 부인을 가리키며 "우리집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편네란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 잘하면 되는 거지요. 저 사람은 촌뜨깁니다"라며 인사를 시켰다.

 연회 광경을 처음 봤을 때(신상옥) 마치 어느 호화판 나이트클럽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녀가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추고 나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대부분이 '목포의 눈물' '쩔레꽃'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하숙생'등 남쪽의 대중가요였다.

 하루는 연회가 끝날 즈음 여성밴드원 10명이 들어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만세'를 외치며 깡충깡충 뛰자 "신선생, 저건 다 가짜야. 거짓으로 하는 소리"라며 취중에 진담을 내뱉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先代, 그리고 자신까지도 포함된 家系우상화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현실을 보는 눈은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우리 부부와의 몇차례 공식대면에서 보인 모습은 일단 입을 열면 그칠새없이 말이 쏟아져나오는 다변가였다. 상대방에게 잠시도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계속해댔다. 3시간에 걸친 첫 공식대면후 즉석에서 우리 부부의 여권사진을 찍도록 즉결처분식의 일처리를 하는 것만 봐도 그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 '피바다' 삽입곡 직접 골라 연습시켜

 그의 호화판 생활은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에 대지 2만여평, 건평 5백평의 사저, 평양시내에 여러 채의 저택과 특각(별장), 그밖에 평성 원산 등 경치좋은 각처에 전용특각을 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또 몇개의 금광을 소유하고 있으며 유사시에 대비, 서방은행 비밀구좌에 금괴 7t과 거액의 美貸를 예치해놓고 있었다.

 그는 남의 생일을 기억해두었다가 꼬박꼬박 챙겨주었는데 당간부나 조총련 모국방문단원 등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생일에 선물을 보내주고 환갑상을 크게 차려줘 감격케 함으로써 인정적인 쪽으로 파고들려는 것 같았다.

 김정일은 대단한 영화광이다 자신이 직접 관리통제하는 영화문헌고에는 세계 각국의 영화 1만5천편이 소장돼 있으며, 녹음성우 · 번역사 · 녹음기사 등 관계 직원들만 해도 2백50여명에 이른다. 그는 북한영화계 최고권위자로 북한의 어떤 현역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보다 앞선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대학 졸업후 중앙당 지도원으로서 당직을 시작한 김정일은 그 뒤 당 선전선동부장과 예술부장으로서 예술분야 전반을 관장하면서 능력을 발휘해 아버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연극 · 영화뿐 아니라 음악에도 상당한 소질을 갖고 있다. 한 예로 가극 '피바다'의 경우 거기에 쓸 곡으로 2천곡을 작곡시킨 다음 그중에서 자신이 직접 수십곡을 골라 최종연습을 시켰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중학교3년 중퇴의 학력밖에 없는 김일성은 처음 '피바다'를 보고 나서 크게 감 동해 이때부터 김정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임을 굳혔다고 한다. 김일성이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데에는 무엇보다도 김정일이 예술분야를 관장하면서 아버지를 우상화시킨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적 소양과 능력이 오늘의 김정일을 만들었으며 그를 출세 가도로 올려놓은 셈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김정일은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상당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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