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레, 르네상스 맞아"
  • 금춘옥 편집위원대우 ()
  • 승인 199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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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무용가들》 펴낸 李德姬씨

 “아마도 시초는 나의 광적인 인식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고 모든 것을 알고싶었다. 따라서 온갖 시대의 온갖 개념을 섭렵하고, 온갖 형태의 온갖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온갖 영역의 온갖 천재들의 삶에 빠져들다보니 자연히 발레예술과도 만나게 되었고 그 '마력'에 사로 잡히게 된 것이다." (《춤》誌100호 인터뷰 기사 중).

  李德姬씨가 발레와 첫 인연을 맺은 때는 1956년. 대학 2학년 때(서울법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당시 영국의 앵그리 영맨의 기수였던 이 작가가 29살에 썼다는 소설- 란 책에서 '실패한 아웃사이더'의 전형으로 소개됐던 바슬라브 니진스키의 《일기》를 읽고 "전기쇼크“를 받았다. 신문기자(조선일보·경향신문· 대학신문), 투병생활 등의 오랜 이력을 거치고 75년, "기구한 삶을 산 예술의 천재를 좋아하는" 이 여성 법학도가 《니진스키의 고백》(민예출판사)을 펴냈다. 이 책은 니진스키 27주기 때 무용전문지 《춤》과 인연을 맺게 해주었고 니진스키의 전기 《나의오빠 니진스키》를 번역하고 발레 입문서 《발레에의 초대》를 저술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또 대학무용과 강사와 《춤》지의 '월급없는 부사장' 노릇을 10년 가까이 하게 된 계기가 됐다.

   "각 대학마다 무용과가 있는데 쓸 만한 교재가 없어서 외국의 무용가를 중심으로 한 관계저적을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불별의 무용가들》(문예출판사)은 무용작가론입니다. 딱딱하지 않도록 이런 제목을 붙인 겁니다." 

  이 책에는 근대무용의 혁신자 장 조르쥬 노베르(1727~ 1810)에서부터 러시아 무용사의 이정표 샤를르 루이 디들로(1767~1837), 20세기의 노베르, 미셀 포킨느(1880~1942) ,神이 보낸 무용가 바슬라브 니진스키(1889~1950), 네오클래시시즘의 창시자 조지 발라쉰(1904~1983) 등 15명의 무용가가 소개돼 있다. 그러나 '극장무용의 역사'라는 부제가 말해주고 무용평론가 金泰源씨의 지적처럼 "서구 극장예술사에 대한 깊은 조사와 세밀한 자료취합을 통해 당대의 극장제도, 영향관계, 예술적 조류의 방향에 대해 폭넓게 서술"하고 있다.    발레와 모던댄스가 구별되지 못했던 70년대. 무용가들이 자신의 발표회 표를 직접 사서 나눠줘야 객석이 찼던 그 시절. 이덕희씨는 단 한가지 사실 확인을 위해서 5년만에 절판된 영어原書를 비싼 값에, 그것도 어렵사리 구하느라 미국에 있는 친지들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신문 ·잡지사 기자들도 괴롭혔다. 원서값도 안되는 원고료를 올려받기 위해서. 

  천재적 예술가는 자신의 이상이었을까, 20대에는 베토벤을, 30대에는 모차르트를, 지금은 다시 베토벤과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이씨는 무용가 중에서는 니진스키를 가장 좋아한다. 춤출 때는 완전히 작중인물이 되어 몸이나 얼굴은 일개 도구로 변해버리는 '신이 내린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또 "천재답게"일생이 기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은 우리나라의 발레수준이 높지 않아 "욕먹지 않으려고" 무용비평을 삼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발레는 이제 르네상스기에 접어든 것 같다는 이씨의 다음과 같은 제언은 무용계 전체의 바람과도 일치된다. 

  "발레는 모던댄스와 달라 턴아웃에서 시작합니다. 뼈가 굳어지면 안되죠.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한 개인의 야심으로는 벅찹니다. 한국천의 체격이 발레에 유리하다고 봐요. 정부차원에서 제도적 뒷받침을 해줘야 합니다."

  밤에 글쓰고 낮에 자는 생활을 수십년 해서인지 몸이 너무 쇠약해 있으나 그는 건강만 허락하면 "죽기전에 바이얼리니스트 김영욱 전기를 꼭 쓰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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