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타로 희생된 조선인 沈得龍
  • 정리·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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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731부대 죄증진열관’ 韓□ 관장 발견 항일 활동중 체포돼 생체실험 재료로



 《시사저널》은 최근 네차례에 걸쳐 일제의 전쟁 범죄행위를 사실에 근거해 추적 보도해왔다(143호 ‘지옥의 섬 하지마’ 145호 ‘사할린 조선인 학살’ 146호 ‘일본 의대에서도 생체실험’ 149호 ‘정신대 집단 매장지’). 이번 호에는 중국 만주 일대에서 저질러진 생체실험에 관한 새로운 발굴사진 한장과 두가지 증언을 싣는다.

 하나는 731부대에 끌려가 생체실험을 당한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증언이다. 중국 하얼빈에 있는 ‘731부대 죄증진열관’(‘侵華 日軍 731 部隊 罪證陳列館‘)의 韓□ 관장은 《시사저널》의 요청에 따라 731부대에 희생된 조선인에 대한 그동안의 조사결과를 보내왔다. 그가 보내온 자료는 731부대 조선인 희생자 沈得龍의 낡은 결혼사진 한장과 자세한 활동내역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 濟南지역에 주둔했던 세균전 부대에서 약 1년 반 동안 일본군의 중국어 통역관을 지냈던 崔亨□씨(현재 대구직할시 거주)의 증언이다. 그는 일본군의 생체실험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거의 유일한 한국인 증언자이다. 제남의 세균전 부대에 대한 그의 증언도 소개한다.<편집자>

 중국 하얼빈시 平□구에 있는 ‘侵華 日軍 731部隊 罪證陳列館’에서는 10년간의 실증고찰을 통해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잇달아 밝혀냈다.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이미 50년대에 소련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있었던 전범재판 자료(‘전 일본 육군 세균전 관련 재판자료’ 이하 ‘재판자료’)를 공개 출판한 적이 있었고, 중국에서도 지난 1989년 길림성 사회과학원이 중국 제1문서관과 제2문서관 자료를 중심으로 ‘세균전과 독가스전’이라는 역사문서자료를 출판한 바 있다. ‘731부대 죄증진열관’ 연구원들은 일본 전범들의 증언 내용 중 ‘특별수송’에 대한 내용을 단서로 고증 작업을 거쳐 “731부대의 세균실험 대상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중국인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소련인 몽고인 조선인 등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현재까지의 불완전한 조사결과로 보더라도 세균전부대로 특별수송된 피해자의 숫자는 1천2백3명에 이른다. 그중 중국인은 1천1백73명이고 소련인은 16명, 조선인 7명, 몽고인 7명이다. 소련 극동재판에서 일본군 전범 川島淸은 피해자의 숫자가 약 3천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1천2백3명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최소한의 규모일 것이다. 731부대는 세균실험을 하는 동안 피해자의 명부를 거의 남겨놓지 않았고 패전하여 퇴각하기 직전 대부분의 중요자료마저 없애버렸다. 따라서 피해자 확인작업은 일본군 전범들의 증언이나 일본군 헌병대가 남긴 특별수송자 명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으로, 이런 어려움 때문에 1천2백3명의 피해자 중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5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특별수송자’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별수송자란 일본군 헌병들에게 체포된 사람 중 특히 정치범이나 항일 운동가 또는 스파이 혐의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정식 재판을 통해서는 이들의 혐의사항을 입증하기가 매우 곤란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들 대부분을 세균전부대에 보내 생체실험의 재료로 이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군 헌병대에서 작성한 특별수송자 명단에는 반일통일전선에 참여한 조선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李淸□등 조선인 생체실험 희생자 7명

 1939년 6월 하얼빈 헌병대 ‘新市□분대’는 중국공산당 阿城지구 위원회가 아성과 하얼빈 사이의 어느 마을에서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분대장 赤城茂三少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헌병대는 이 마을을 급습해 중국인과 조선인 약 25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731부대에 특별수송돼 야외사격장에서 독극물로 살해됐다.

 조선인 李靑□은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海□□시에 잠입해 지하공작 활동을 하던 그는 1944년 7월 海□□의 일본군 헌병대원 志村行雄에게 체포됐고 731부대에 넘겨져 희생됐다.

 1945년 봄쯤에 한 조선인 청년(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이 731부대가 있는 平□의 특별군사 구역으로 뛰어들어왔다. 이 부대 외곽에서 방공호를 쌓고 있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에게 이곳은 출입금지 구역이니 빨리 도망치라고 충고했다. 조선인 청년은 731부대에 관한 사항을 대략 파악한 후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초소 근무중이던 헌병에게 발각돼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곧장 이 부대에 설치된 특별감옥으로 끌려갔는데, 당시 이 장면을 목격한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는 아마 살아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조선인 희생자 중 현재까지 가장 상세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사람은 大連에서 반일 지하 첩보활동을 하다 붙잡힌 조선인 沈得龍에 대한 내용이다. 그에 대해서는 일본군 헌병대자료와 함께 먼 친척뻘 되는 유가족의 증언도 얻을 수 있었다. 필자는 그 유가족으로부터 그가 조선사람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의 결혼사진을 입수했다.

 동북지구에 있던 일본군 제86부대의 무선전신 분대는 관동군 헌병대의 특수부대로서, 중국 동북지구의 반일 지하첩보 활동을 색출해내는 게 주된 임무였다. 1943년 6월 이후, 86부대의 무선전신 분대는 대련시에 있는 黑石礁 지역 일대에서 의심스러운 전파가 출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전파는 무선전신 분대 소속 헌병들이 출동하면 사라지곤 했다. 세차례 정찰을 통해 그들은 이 전파가 반일 지하첩보활동과 관련된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전파는 지하조직이 활동을 정지함에 따라 곧 중단됐고, 관동군 헌병대도 이들 지하조직의 활동이 마비된 것으로 판단해 제373호 작전명령을 통해 정찰활동을 당분간 중단했었다.

 일본군 무선전신 분대에 수상스런 전파(XAA3 전파)가 다시 잡힌 것은 같은 해 10월 1일 새벽 2시쯤이었다. 활동을 정지하고 있던 지하조직에 긴박한 임무가 떨어져 다시 전파를 발신한 것이다. 발신지는 흑석초에 있는 한 사진관. 2시30분쯤 대련 헌병대화 86부대 무선전신 분대가 그 사진관을 급습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방송장비 일부와 사진관 주인인 沈得龍 부부, 그리고 그들을 돕고 있던 중국인 사진사 4명을 체포했다. 그후 며칠간 일본군 헌병대는 천진 심양 등지까지 추적하여 王耀軒 王學年 李忠善 劉萬會 등 심득룡과 함께 활동하던 중국인 12명을 체포했다.

 

731부대 있던 하얼빈에도 ‘위안소’ 설치

 그들은 중국공산당 ‘국제반제정보부(國際反帝情報□’소속 직원들이었다. 그들이 체포되기 12년 전 중국공산당 지하조직은 조선 청년 심득룡(가명 陳□, 李成華)을 소련 모스크바에 파견해 공부시켰다. 1940년 3월 그는 소련군 참모부의 파견 명령을 받아 天津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중국공산당 중앙 사회조사부는 사람을 보내 李慶春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심득룡을 호위하여 대련시 흑석초에 잠입케 했다. 그는 중국인 왕요헌(가명 王中山)과 함께 흑석초에 ‘興亞사진관’을 열어 신분을 위장한 후 이곳을 거점으로 반일 지하정보부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심득룡이 부장 및 첩보원을 겸했고, 왕요헌은 나중에 들어온 이충선 吳□珍 왕학년 유만회등과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대련을 중심으로 南滿과 천진 등지의 반일 지하정보 공작을 담당했다.

 지하공작의 편의를 위해 왕요헌과 劉萬百(유만회의 형)의 둘째 딸 劉桂蘭이 결혼했고, 왕요헌의 소개로 심득룡은 유만백의 세째 딸 劉桂琴과 결혼했다. 유계란과 유계금은 중국인이어서 신분 위장에 큰 구실을 했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대련의 국제반제정보부 조직원들은 심한 고문을 받고 대부분 하얼빈 평방에 있던 731부대에 특별수송돼 세균실험 재료로 쓰여진 후 살해됐다. 중국 중앙문서관과 대련시 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헌병대 관련 기록문서에는, 그 피해자 명단에 심득룡(조선인) 왕요헌 이충선 왕학년 등이 들어 있다.

 중국 공산당의 비밀지하 정보조직이었던 국제반제정보부의 조직원들은 대련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41년 목단강시에서도 지하활동을 수행하던 중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돼 전원이 세균전부대의 생체실험 재료로 희생되는 비극을 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유명한 ‘목단강 사건’이다. 소련에서 발행된 재판자료에는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피해자의 이름에 孫朝山 吳定興 朱志猛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목단강시에 잠복했던 국제반제정보부의 요원들이었다. 1941년 7월 16일 새벽 ‘목단강 국제반제정보부’는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았다. 정보 송신을 막 끝낸 張□忠(실제로는 張文善으로 불림)과 그의 처 龍桂活이 그 자리에서 체포됐고, 이날 오전 외곽지역에서 주지맹(실제로는 朱之□으로 불림)과 손조산이 체포됐다. 하얼빈으로 도망쳤던 吳定興(吳□興)은 그 다음날 목단강 헌병대로 잡혀왔다.

 당시 敬恩□(敬子和)라는 조직원은 목단강시에서 빠져 나왔지만 결국 그 다음해 五河라는 지역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일본군의 세균전부대에 보내져 실험재료로 사용됐다.

 1987년 필자는 국제반제정보부의 책임자로서 현재까지 생존해있는 莊□仁씨의 증언을 근거로 목단강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을 찾아내 이들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필자는 3년 동안의 조사 끝에 조선인 심득룡이 연루됐던 ‘대련사건’의 증인과 피해자 가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심득룡 열사의 고종조카(부인 유계금의 조카)인 劉興家씨로부터 심씨와 부인 유계금의 결혼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으로는 유만회의 아들이 현재 살아있고, 또 심득룡의 부인 유계금과 그의 언니 유계란이 20년 전까지 살았던 주소를 알아내기도 했지만 아직 연결은 되지 않았다.

 대련사건과 심득룡의 경력 및 혁명활동에 대해서는 확인작업이 좀더 필요하다. 심득룡의 原籍과 나이도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련에 보존된 문서와 유흥가의 증언을 통해 볼 때 심득룡은 확실히 조선 사람이다.

 이밖에 “阿城사건‘과 ’海□□사건‘등 조선인이 관련된 몇개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증인이나 피해자 가족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기록문서에는 몇개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 조선인이 포함돼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현재까지 특별수송에 의해 세균전 부대로 보내진 조선인 중 파악된 숫자는 7명이다. 그중 어떤 사람은 아직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731부대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731부대가 있던 하얼빈의 평방 지역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끌려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평방 지구에는 731부대와 일본공군 8372부대 등 두개의 일본군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장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평방역 부근에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로 이루어진 두 개의 위안소를 설치했다. 위안소는 고정돼 있었지만 위안부들은 군의 명령에 의해 수시로 교체됐다. 731부대에서 세균전 무기를 개발하는 데 공을 세운 일본군 병사들이 이 위안소들을 이용할 수 있는 최우선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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