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통신
  • 워싱턴·김승웅 특파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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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젯밥’ 찾는 부시에 노대통령 ‘찬밥’




 노태우 대통령이 4박5일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미국이 보인 접대 매너는 현실 앞에서 쉽사리 명분을 포기하는 ‘앵글로 색슨’식의 실리주의에 바탕을 둔 것 같다.

 노대통령이 접견한 지도급 인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스코크로프트 안보보좌관, 이글버그 국무장관 대리 등 우리로 치면 차관급인사가 고작이었다.

 노대통령의 이번 방미의 최종 목적지는 워싱턴이 아닌 뉴욕이었다. 더구나 방미의 목적이  한미 정상회담이 아니라 유엔 가입 1주년을 자축하기 위한 일종의 기념 행사였기에, 그가 만난 상대 인사가 부시 대통령이면 어떻고 차관급이면 어떠냐 하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인 9월21일, 숙소인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 때마침 워싱턴으로부터 유엔 총회 연설차 내려온 부시 대통령이 휴식차 함께 투숙했고, 또 두 정상이 호텔 안에 함께 머문 시간이 3~4시간 이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눈 한번 마주칠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은 둘 다 임기 만료를 코앞에 둔 대통령이라지만 뭔가 미진하고 석연치 못한 느낌을 주었다.

떠나기 직전 일방 취소된 한미 정상회담

 국가 원수가 벌이는 정상 외교는 흔히 외교의 精華라 불린다. 국가 원수가 한차례 벌이는 정상 외교가 외무장관이 열차례 벌이는 순방 외교보다 그 실효면에서 더 지대한 것으로 평가되는 까닭은 그런 데 있다. 두 국가 정상 간의 교환은 나라와 나라가 얼굴과 얼굴을, 몸과 몸을 서로 맞대는 인체 접촉으로 비유할 수 있다. 평소 같으면 10년 넘게 끌어온 외교 난제가 정상 간의 단 한차례 회동으로 타결에 이르기도 하므로 외교의 조커 카드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정상 외교이다.


 이처럼 중요하고 효율적인 국가 원수 간의 정상 외교를 노대통령과 그의 외교 참모들은 이번 뉴욕 방문을 통해 너무 헐값으로 팔아치웠다.

 청와대측의 해명을 들어본다. 노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이번으로 여섯번째인데, 당초에는 한미 정상회담이 내정되어 있었으나 미국측은 노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직전에 정상회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통고해왔다. 이는 재선을 위한 선거 일자를 겨우 한달 남짓 앞둔 부시의 처지를 감안할 때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를 굳이 우리 식의 예의 범절로 따지자면 양가의 가장끼리는 서로 바빠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으니 '유엔 別堂'이라는 사랑채에 들러 며칠 동안 숙박하고 가도 좋다는 전갈을 저쪽이 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저쪽 집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해서 크게 체면을 구겼거나 실례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盧 안만나고 교민 모금 파티에 참석한 부시

 그토록 만나기 힘들었던 부시가 같은 날 같은 숙소인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열린 '부시 재선을 위한 한인 교민 모금 파티'에는 얼굴을 나타내 연설까지 한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옳은가.

 미국측은 그런 결례에 대해 일언반구 해명이 없었고, 더욱 가관은 이런 면전 수모를 당하고도 항변은커녕 "만약 부시가 노대통령을 만난다면 현재 유엔 총회에 와있는 다른 국가 원수도 다 만나야 되는 만큼, 부시한테 그런 불편을 끼쳐서야 되겠느냐"하고 지레 호들갑까지떠는 우리측 겸양이다. 그럴 바에야 이번 뉴욕 방문은 자제했어야 옳았다. 노대통령이 뉴욕에서 당한 홀대는 결코 '노태우' 개인이 당한 홀대로 그치지 않는다.

 두 나라 모두가 금년 말을 기점으로 대통령이 바뀐다. 이쪽 대통령에 누가 되고, 저쪽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한미 관계는 예컨대 YS·부시, YS·클린턴, DJ·부시, 정주영·클린턴 등 모두 여섯가지 외교 유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국면으로 바뀌게 된다. 바로 서너달 후면 우리는 이같은 외교적 난제를 다시 풀어야 한다. 9·18조처가 이렇고, 중립내각이 저렇고를 따지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외교 자세를 한층 다져야 할 것이다. 유엔 방문에 이은 중국 방문은 노대통령으로서는 재임 기간 동안 열한번 째의 외유이다. 9·18조처가 당국의 해석대로 제2의 6·29에 해당할 만한 영단이라면 지금까지 분별력을 잃고 남발해온 6공의 정상 외교에도 의당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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