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거지들의 ‘요람’?
  • 런던·한준화 통신원 ()
  • 승인 1994.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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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자 거지들 행패 늘자 정부서 ‘전쟁’선포… 야당은 “복지정책 잘못” 비판



 요즘 영국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사회 보장 기치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거지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거지들이 많이 나타나는 곳에는 적선을 하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나붙기도 한다. 최근 영국 언론들은 사이비 거지들의 위협적인, 때로는 폭력까지 휘두르는 구걸 행각이 영국 대도시 전역에 독버섯처럼 만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메이저 총리는 지난달 말 마침내 위협과 공갈에 심지어는 폭력까지 동원한 부랑배 거지들의 행패에 맞서 거지 추방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메이저 총리는, 연약한 부녀자를 주공격 대상으로 하고 외국 관광객들에게까지 구걸 행각을 일삼는 부랑배와 거지들을 ‘도시의 미관과 국가의 체면을 해치는 꼴볼견’이라고 단정하고, ‘이 무뢰한들이 위압적인 언동으로 적선을 강요하면 즉각 경찰 당국에 신고하라’고 촉구했다.

언론 · 정치권 가세, 뜨거운 ‘거지 논쟁’
 메이저 총리의 이 발언은 즉각적으로 집없는 떠돌이집단과 거지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야당과 종교계 그리고 일부 자선단체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야당과 종교계의 비판과는 달리 메이저 총리의 거지 추방 전쟁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 전체 국민의 60%이상을 웃돌고 있어 복지 사회 영국은 때아닌 거지 논쟁 · 거지 소동에 휘말리고 있다.

 한편 노동당의 예비내각 재무장관인 고든 브라운 의원은, 메이저 총리가 대처 내각의 사회보장부 차관이던 88년에 16 · 17세 청소년들에 대한 실업수당 · 주택수당 등 정부의 보조 혜택을 박탈한 장본인이라고 폭로했다. 그는 잘못된 정책의 산물인 집 없는 사람의 대부분을 사이비 거지 · 부랑배로 몰아치는 것은, 메이저가 내세운 공약인 ‘계층 없는 사회 건설’이 허울임을 드러낸 것이라며 “메이저는 사회적 유대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잔혹한 인간”이라고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더 타임스> 등 영국 언론들은 보수당 정권의 무주택자정책과 복지정책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야당을 향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감정적 · 도덕적 논쟁만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중지 <더 메일>은 복지사회인 영국에서 구걸 행각이 법적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서민 각자가 사회의 해충이 번식하지 않도록 거지들에게 직접 돈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영국 언론이 정부에 대해 이처럼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하고, 시민들에게도 동정심으로 구걸 행각을 조장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데도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거지들이 당장 자취를 감출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행위는 영국 사회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법적 규제와 사회적 보완책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세기 동안 끊임없이 있어왔다.

 일찍이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인 16세기에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집없은 연약한 아이들을 거지로 부려 착취하던 건장한 몸집의 거지대장 무리는 유명하다. 나폴레옹전쟁에 나갔다가 거리의 떠돌이로 전락한 제대 군인들의 구걸 행위를 막기 위해 1824년 제정한 ‘부랑인규제법’은 1백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장치가 있는데도 현재의 복지국가 영국에서는 법률적으로 거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이 유효가기 위해서는 거지가 있을 수 없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무위도식하면서 공중을 대상으로 사기 · 공갈 · 폭력으로 구걸 행각을 벌이는 사람은 부랑아규제법에 따라 부랑아 · 신용사기꾼으로 취급돼 최고 천파운드(약 1백20만원)의 벌금을 물리고, 신체적 위해를 가한 경우에는 최고 3년의 징역형에 처하게 돼 있다.

 지난해에는 천여 명의 거지가 경찰에 단속됐는데 그 중 4분의 3 이상이 순수 걸인으로서 구두 경고 처분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국은 런던 지역에만 1천2백75명의 무주택자가 정부에서 제공한 호스텔과 의료시설, 그리고 자선단체의 임시 숙박소에 수용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선단체가 비공식적으로 파악한 숫자는 그보다 휠씬 많은 3천여 명에 이른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채 잠적한 정신질환자나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노숙자들을 합하면 5천여 명의 무주택자가 런던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중 30%는 16~20세 청소년이다. 이들은 대부분 일정한 주소가 없고 직업훈련도 받지 않은 채 학교를 중퇴한 문제아들이어서, 국가에서 주는 실업수당 · 주택수당 혜택은 물론 정부 제공 공영주택도 배당 받지 못한다.

하루 3백만원 버는 폭력배 거지도
 무주택자 문제 해결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무주택자의 70%이상이 육체적 · 정신적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지난 10년전부터 급격히 늘고 있는 이혼과 미혼모, 이에 따른 가정 파탄과 사생아 증가는 청소년의 가출로 이어진다. 이들은 대도시의 조직 폭력배의 유인당해 폭력을 이용한 구걸 행각의 전위대가 되기도 한다. 해가 갈수록 악화하는 무주택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이저 내각은 지난 3년 동안 런던 지역에서만 9천6백만파운드를 들여 이들에게 일자리와 숙소를 제공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런던의 무주택자 2천여 명이 지난 3년 동안에 대부분 임시 숙소인 호스텔 등에 수용돼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떠돌이들은 이제 6백여 명으로 줄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야당인 노동당은 이번 메이저 총리의 발언에 대한 종교계와 자선단체의 부정적인 시각에 편승해 정부의 노동정책 · 청소년 직업대책 · 복지정책의 허점과 잘못을 부각시키고 있다.

 노동당이 마련한 대안 가운데 미국식 노동 복지계획인 시민봉사계획은 지난 88년 보수당 내각이 폐지한 16~17세 청소년에 대한 각종 복지수당을 사실상 부활시키는 것으로, 1년에 1억4천만파운드의 경비를 납세자인 국민들이 추가 부담토록 한다. 이같은 납세 부담 때문에 이 정책은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거지 소동은 노동당에게도 별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거지 논쟁과 관련해서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미국의 저명한 사회과학자 찰스 머레이 박사의 ‘언더클라스’ 등장론이다. 이미 5년전 영국에 미국식 언더클라스, 즉 ‘최하류 극빈계층’이 출현하리라고 예고한 바 있는 머레이 박사는,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부터 영국사회에는 상류 · 중류 · 하류라는 기존 사회 계층 외에 최하류 계층이 새로 출현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맞서 메이저 내각과 보수우파 체제 옹호론자들은 아직도 1년에 9백억파운드, 국내 총생산의 26%를 사회보장 · 복지예산으로 쓰고 있는 영국은 복지사회의 기틀이 단단해 미국식 최하류가 출현한 단계는 아니라고 애써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폭력조직 부랑배 거지들이 1주일에 2만파운드를 거뜬히 벌고, 은행에 당좌를 개설하는 직업적인 사이비 거지가 관광도시 바스 시에 등자했는가 하면, 젊은이들이 직업을 찾지 않고 복지수당과 구걸에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의존 문화가 영국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다.
런던·韓准樺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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