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에 비친 국가 평등
  • 이세용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4.07.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크지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은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 평등 · 박애’를 인간들의 실제 삶 속에서 확인해보는 작업으로 <블루> <화이트> <레드> 세 편을 만들었다. ‘세 가지 색 · 연작’이 바로 그것인데 <화이트>는 평등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프랑스 여배우 줄리 델피와 폴란드 남배우 즈비그뉴 자마초프스크는 성의 평등한 관계를 놓고 마치 국가 대항전이라도 벌이듯, 자신들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폴란드 남자 미용사 카롤은 프랑스 여자 모델 도미니크와 눈이 맞아 결혼하지만 첫날밤부터 위축된 ‘남성’ 때문에 사내 구실을 못해 이혼 소송을 당한다.

 의기소침한 카롤은 법원 계단을 오르다가 (마치 도미니크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는 비둘기의 똥을 어깨에 맞고, 재판정에서는 서투른 불어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매달리지만 판사는 코방귀도 뀌지 않는다.

 여자한테 버림받고 졸지에 알거지가 된 폴란드 남자는 지하철에서 만난 고향 사람의 협조로 바르샤바행 비행기 짐짝 속에 숨어든다. 이런 속사정을 알 까닭이 없는 바르샤바 공항 직원들은 부자 나라에서 온 가방을 빼돌려서 열어보다가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기어나오자 화가 나서 카롤을 복날 개 패듯이 두들겨 팬다.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동포에게 실망한 카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뛰어들고, 땅투기를 해 졸부가 된다. 카롤은 첫사랑을 못잊어 죽으면서도 전처 앞으로 유산을 남긴다. 하지만 이것은 도미니크를 폴란드로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롤은 도미니크의 숙소로 찾아가 오랜만에 남성의 기능을 확인한 뒤, 계획대로 여자를 살인범으로 신고하고 사라진다.

 <화이트>는 순정을 짓밟힌 남자가 여자에게 보복하는 내용의 복수극이므로 <블루>에서 보였던 현학적인 올가미가 없다. 첫 장면이 프랑스 법원의 철문에서 시작되고, 마지막 장면의 첫 쇼트가 폴란드 감옥의 철문에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프랑스 여성에 대한 폴란드 남성의 열등감을 통해 으스대는 자본주의와 주눅든 사회주의의 절망감을 고찰한다.

 감독은 ‘사회’를 하나의 크고 복잡한 인간 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유럽통합 앞에서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는 집단적인 환상에 일침을 놓는다. 바람직한 유럽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 대 사회주의 국가의 평등 관계가 선결 과제임을 남녀 관계에 빗대어 간결하게 보여준다.

 (性과 인간의) 평등을 실현시키는 압력수단으로 자본을 활용한 ‘보복’ 형식을 선택한 <화이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랑스 여자는 반성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오는 방망이, 가는홍두깨’ 식의 평등은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 아닌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李世龍 (영화 평론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