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동운동 침체 늪서 몸부림
  • 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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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화· 자사 이기주의에 허덕 … “희망은 있다”



 노조활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 2년6개월간 해직기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다 최근 복직한 ㄱ신문의 한 기자는, 그가 없었던 몇 개월 동안에 확연하게 달라진 편집국 분위기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그것은 “짐작은 했지만 예상 외로 기자들이 일에 내몰린다”는 점과 “그래서인지 노조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노조가 잘 안된다는 점에서는 다른 언론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언론사 노동운동은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과 더불어 침체의 늪에 빠졌다.

 그래서 이번 MBC 파업사태에 언론노동운동계가 부여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하 언노련) 권영길 위원장은 “MBC 파업의 성패 여부는 앞으로 각 언론사 노조활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지난 1일부터 전국의 각 언론사 노조위원장들은 MBC 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MBC 파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무력해진 각 언론사 노조활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MBC 파업사태는 모든 언론사 노사 간의 대리전 양상마저 띤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인 언론노동운동은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물결을 타고 전개됐다. 87년 10월29일 <한국일보> 노동조합 결성을 필두로 89년 1월까지 전국 46개 신문 · 방송사에서 노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88년 11월26일에 발족한 언노련에는 현재 57개 신문 · 방송 · 통신사가 가입해 있으며 조합원이 1만7천여명이다.

 언론노동운동은 멀게는 일제시대에, 가깝게는 75년 동아 · 조선 투위에 그 맥이 닿아 있지만 실제 역사는 4년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 4년 동안의 언론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공정방송 · 공정보도를 한다고 하는데, 화면과 지면에서 구체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는 비판론에서부터 “한국 언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긍정론까지 언론노동운동을 보는 시각에는 편차가 크다. 그리고 이런 시각 차이는 각 언론사 노조원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노조에 신경쓸 겨를 없다”

 언론노동운동이 남긴 것은 무엇이며, 왜 지금 한계에 부딪혔는가. 4년 전의 언론환경과 지금의 언론환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신문만 놓고 보면, 87년 6월항쟁 당시 12면에 지나지 않던 지면이 현재는 24면으로 늘어났고 지방분공장 건설, 전국 동시인쇄에다 조석간 발행에 이르기까지 언론사 노동환경은 악화됐다. 한마디로 “노조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는 항변이 나올 법한 형편이다. 그러나 현재 언론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은 그 출발부터 이미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억압을 뚫고 만들었다기보다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를 업고 무임승차한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폭발적인 노동운동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과 권력의 양해 아래 이루어진 셈이다.” 당시 언론사 노조결성을 주도한 ㅈ일보 기자의 말이다. 언론노동운동의 한계가 거론될 때마다 ‘무임승차론’은 끊임없이 따라붙는다. 실제로 우리나라 언론노동운동은 사회의 민주화 정도가 허용한 폭만큼 따라갔을 뿐이지 외국처럼 사회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물론 87년 당시에 언론사에서 노조를 만든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6월항쟁 이후부터 언론계에서도 노조를 염두에 둔 논의가 조용히 시작됐다. 대체로 기자협회 활성화와 노조결성을 놓고 의견이 마주쳤으며, 노조결성 쪽으로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비밀리에 노조가 결성됐다. 87년 종로2가 YMCA 2층에서 언론사 노조결성의 불을 당긴 <한국일보>의 경우, 노조창립대회의 명칭은 ‘영등포 조기축구회’였다.

 이런 출발에 비해 언론사 노조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언노련이 언론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세운 목표는 크게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권력 · 자본 · 비리로부터 해방이었다. 이는 △편집권 독립 △언론자정 △과거청산 △다른 노동운동과 결합으로 모아졌다.

 첫째, 편집권 독립에 있어서 각 언론사 노조에 형식적인 제어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일보> 노조사무국장 심상복씨는 “언노련이 설립된 이후 한 2년간 각사 노조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했다. 대략 이 기간에 각 언론사는 편집국장 추천제 · 직선제 · 중간평가제 · 해임제 등을 노사협상으로 마련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고 말한다. 공정보도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신문사에는 공정보도위원회나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방송사에는 공정방송협의회 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후약방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는 데서 만족하는 실정이다.

 둘째, 언론자정 부분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몇번의 촌지파동을 겪으면서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공공연한 촌지관행’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촌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언노련 관계자는 “공개적인 촌지관행은 사라졌지만 일부 기자와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 음성적인 ‘거래’는 여전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언론계 5공인사 몰아내기’라는 과거청산은 유야무야 넘어갔고, 다른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것은 언론노동운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특히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은 “언론사 노조는 단체행동으로 동참할 게 아니라 공정한 보도를 해달라”고 요구하기 일쑤였고 현실적인 힘도 부족했다. 그래서 언노련 안에서도 “사회모순 해결에서 눈을 떼고 언론 내부 개혁에 치중해야 할 것”이라는 자성론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언론노동운동 4년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특히 90년 KBS 파업을 정점으로 언론노동운동은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렸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전망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다. 넘어야할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권력과 언론, 자본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끊지 못하고 언론사 노조는 무기력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해도 안된다“는 패배주의가 만연하기도 했다. 각 언론사 노조 집행부 또한 ”단체협약 하면 한해 사업 다한 것 아니냐“ 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다.

MBC 파업은 ‘앞길’ 판가름하는 시험대

 노조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에는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이 주요인이지만, 각 언론사들의 자사 이기주의가 한몫 거들기도 했다.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다른 언론사에서 치고 나오는데 우리 신문(방송)이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회사측 논리를 노조가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히 언론사 노조 간의 연대는 점점 약해지는 추세를 보였다. 유신이나 5공 때의 ‘권력의 벌거벗은 탄압’은 사라졌지만, 회사측이 세련된 방식으로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별로 저항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언노련 권영길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노조 존립의 근거로써 공정보도가 필요함을 인식시켰다”는 점을 성과로 꼽는다. MBC 노조는 “파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조합원들의 참여도에 회의적이었지만 기우였다. 공정방송에 대한 조합원들의 의지를 새삼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MBC 파업은 전체 언론노동운동의 앞길을 판가름하는 시험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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