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헛배’ 부풀릴 팽창예산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1.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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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수지 적자 · 인플레 가속 가능성 높아 … “대통령 공약사업 들러리” 의혹

내년도 우리나라의 ‘살림살이 짜기’는 진통의 연속이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의 1백 50여 관계자들은 전원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찜통더위 속에서 각 부처의 하소연을 듣고 시달림을 받으면서 92년도 예산안을 편성했다. 요구액 68조원을 깎고 또 깎아 만들어낸 총규모는 33조5천50억원이다. 정부와 민자당의 예산협의를 거쳤지만 계수만 조정됐을 뿐 삭감이 없었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삭감이 불가피하다는 徐相穆 제2정책조정실장 등 민자당 경제통들의 당초 주장은 “당정이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는 대통령의 추상 같은 한마디에 쑥 들어가 버렸다.

총액은 이같이 결정됐으나 가장 진통이 심했던 방위비와 인건비에 대해서는 당과 정부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16일의 청와대 보고 후로 결정이 미뤄졌다. ‘뜨거운 감자’는 결국 대통령 손으로 넘어간 셈이다. 예산 총규모에 대해 신민당 등 야당은 “유례없는 팽창예산이며 선거를 겨냥한 선심예산”이라고 비판했다. 오는 정기국회 예산심의에서 대폭 삭감을 단단히 벼르고 있어 격돌이 예상된다.

기획원 “몸집 커졌으니 옷도 커져야”
예산안에 대한 팽창시비는 수년간 되풀이 돼온 것이지만 올해에는 재계도 드러내놓고 비판을 가하고 있다. 지난 3일 金相厦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경제5단체장은 조찬회동을 갖고 “24%나 증액된 내년도 예산은 지나친 팽창예산이다. 이 증가율은 생산성 증가율의 2배에 달하는 수치로 국민의 새 부담을 가중시킨다. 또 기업에는 높은 임금상승 요인으로 작용해 인플레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공무원 봉급 인상률 12.7%는 생산성 범위 내의 임금인상, 물가와 임금의 악순환의 고리 단절 등과도 상치된다고 주장했다. 이미 한국개발연구원 한국은행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정부의 잠정안이 나오기 전부터 재정운용의 안정화를 주장해왔다.

내년도 예산은 올해의 본예산보다 24.2%가 늘어난 것이고 두 차례의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한 올해의 총예산(31조3천8백20억원)보다 6.8% 늘어난 규모이다. 팽창예산이라는 비판에 대해 경제기획원 예산실은 본예산과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올해 당초 예산은 12.9%의 경제성장률(경상가격)을 전제로 편성했으나 실제로는 17.4%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애당초 낮게 잡힌 경제규모를 전제로 내년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몸이 커지면 옷이 커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라는 게 경제기획원의 주장이다. 낮게 잡힌 올해 성장률을 토대로 내년도 예산을 짠다면 내년에도 대규모 세계잉여금이 발생, 대규모 추경 예산을 편성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고도 경고한다.

정부의 대응 논리는 계속된다. 일반적으로 예산규모의 적정 여부를 가리는 기준의 하나인 국민총생산(GNP) 대비 일반회계 예산규모는 14.8%의 수준으로 경제규모가 비슷한 나라에 비해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세부담률도 올해의 19.3%에서 내년에는 19.6%로 약간 높아지는데 그친다는 설명이다. 예산실 金周鎰 예산심의관은 “재정 규모를 단순히 숫자적 개념으로 보지 말고 양과 질의 측면에서 공공서비스 공급이 충분한지 여부가 논의의 대상이 돼야 타당하다”고 지적한다.

이 말은 예산의 구조적 내역을 보자는 것 인데 규모 자체만 갖고 평가하는 것보다 옳은 방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내역을 뜯어보면 정부가 제꾀에 빠져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세출구조의 두드러진 특정은 경직성 경비의 비중이 높다는 것과 교육을 제외하고는 사회개발 및 사회복지 관련 지출의 비중이 낮다는 것이다. 80년대 들어 국방비의 비중이 다소 줄고 사회개발비가 증가추세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골격은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내년도 예산안의 경우는 오히려 이 구조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방비 인건비 등 이른바 탄력성이 적은 경직성 경비의 비중이 높아진 반면 사회간접자본 복지지출 등 사업비 비중은 낮아졌다. 또 당정협의에서는 정부안보다 국방비는 오히려 8백억원 가량 증액되고 사업비 는 4백80억원 정도 줄어들었다. 서울대 金東建 행정대학원 교수는 “구체적 내역이 공개 돼야 알겠지만 사회 간접자본 투자 확충으로 성장잠재력을 배양하고 환경개선 · 복지증진 등 당초 정부가 밝힌 증액명분이 내년 예산에 뚜렷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증액의 논리로 내세워진 세수추계 현실화 · 세계잉여금 발생 억제 · 추경편성 억제 등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정부는 마치 추경을 편성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도 이에 대한 확고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내년도에 설사 세계잉여금이 적게 난다고 해도 전년도 이월금을 합쳐 추경편성을 기도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또 지난해 정부는 올해 추경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으나 결과는 두차례 추경편성이 있었다면서 국민을 속인 ‘전과’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정부는 경직성 비용을 줄일 수 없기 때문에 사업비를 더 늘리려면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직성 비용을 깎아 사업비를 늘리라는 민간의 시각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오히려 사업비 예산이 줄어든 것을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예산편성이 아니리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예산이 6.8% 늘어 추가되는 재원은 약 2조1천2백25억원인데 법정경비인 지방교부금 · 공무원 인건비 등 고정적 지출소요가 2조8천억원이나 돼 오히려 사업비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재정형편에서 선거를 의식한 정치성 예산편성은 있을 수도 없고 재원도 없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부는 “다만 지역 균형개발 등 6공화국이 국민에게 약속한 사업은 가용재원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지원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타당성 검토와 우선순위 책정으로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단서를 달고 있으나 공약사업이니까 한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국무총리실과 감사원에서 대통령 공약사업 추진상황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성의가 부족하면 관계자를 문책하겠다는 으름장에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생색나는 일이라면 모두 대통령 공약사업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사실 중요한 사업이 대부분이다. 공약사업이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은 곤란하다”고 설명 하지만 예산이 대통령 공약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들러리를 서고 있다는 세간의 의혹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대통령 공약사업은 모두 4백59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돈이 들어가는 소위 예산사업은 1백85건인데 88년부터 예산에 편성되었으며 내년도 예산에도 공약사업 재원은 “금액이 크다”는 것만을 밝힐 뿐 관계자 들은 정확한 액수 공개를 꺼리고 있다.

경직성 비용을 줄일 수 없다는 정부의 주장이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방위비 다 음으로 비중이 높은 지방교부금(21%)은 법정 경비이므로 조정의 여지가 없다. 감축의 표적이 된 방위비는 엄연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며, 기술하사관 등 군인들의 처우를 개선해줘야 한다는 국방부의 주장이 거세다. 인건비는 공무원의 봉급 수준을 내년까지 국영기업체의 90%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대통령이 약속했기 때문에 12.7%는 인상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민간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방위비의 세세한 내역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크게 줄일 수 없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두 자리 수의 공무원 봉급인상률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재계와 근로자에 대해서는 한자리수 임금 인상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두 자리 수 인상을 할 수 있느냐”며 도덕성이 의심된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5공 초기의 이른바 ‘제로베이스 예산’(지난해 대비 몇% 방식이 아니라 기준치 없이 새로 시작하는 예산편성) 이후 관성이 붙어 계속돼오던 재정운용의 근본흐름을 바꿔놓으려 하고 있다. 경제의 몸집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어 재정확대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朴淸夫 예산실장은 “이른바 ‘작은 정부’가 바람직하다는 논리가 있는데 작은 정부의 개념을 규제와 간섭이 적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 한다면 정부는 그동안 크게 미흡했던 공공 서비스를 늘려야 정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설득력 약한 정부의 ‘재정확대 논리’
공공서비스를 늘려 성장잠재력을 배양하고 국민이 좀더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견해에는 이견이 별로 없다. 문제는 큰 규모의 재정지출 확대를 용인하지 않는 경제상황에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재정규모 확대에 따른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및 민간지출 위축은 일반적으로 재정규모가 경상성장률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확대될 때만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내년도 예산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朱晩洙 연구위원은 “정부지출 증가는 성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국내 생산여건이 거의 완전고용 상태여서 수요가 늘어나면 부족한 소비재와 투자재원을 수입해올 수밖에 없다. 정부지출 증가가 국제수지 적자폭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한국개발연구원 文亨杓 연구위원도 “경기가 과열돼 있는 상황에선 재정의 안정운용에 중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 거시경제의 틀 안에서 재정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실속 없이 부풀어 있는 경제의 몸집을 줄여 야만 한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는 분명해 진다. 국민에게는 소비를 자제하라고 하고, 물가가 오르는데 임금인상은 소폭에 그치라고 하고, 기업에게는 금융긴축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라고 하면서도 정부는 ‘줄이기’를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재정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주장이 궁색한 변명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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