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때 ‘녹두서점’ 여주인 정현애씨
  • 김훈 부장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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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로가 스며듭시다”

광주 민주항재 당시 광주시 계림동 녹두서점은 항쟁의 한구심점이었다. 광주시 전역이 외부와 교신이 일체 두절된 상태에서 전투와 학살 소식은 이 서점을 중심으로 집결되었고 외부로 전파되었다. 광주시의 빈민 지역인 광천동에서 들불야학을 지도하던 金相允씨(당시 31세)와, 그의 갓 결혼한 부인 鄭賢愛(당시 26세)가 이 서점을 경영했다. 서점은 매장이 10평 밖에 안됐으나 책에 굶주린 청년들에게 이론과 정망을 꾸준히 공급해 왔다. 사태후 남편은 군사 법정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년7개월 만에 풀려났고, 중학교 교사인 부인 정씨는 학교에서 직위해제되었다. 정씨는 그후 복직되었다가 89년 전교조 파동으로 해직되었고, 금년 봄에 다시 복직되었다. 정현애씨를 만나 광주항쟁과 그 이후 그들 부부의 삶의 진실을 들어보았다.

결혼 전에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셨을 텐데 남편이 하는 일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사실 저는 연애 시절에 그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위험이 따르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 일이 매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확신을 있었지요. 그런데 그이와 결혼해 하께 살면서 남편이 하는 일이 진실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요.

녹두서점은 광주항쟁 당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저와 저의 남편, 그리고 80년 5월27일 새벽 도청 앞에서 돌아가신 수습대책위 대변인 윤상원씨가 서점을 경영했지요. 처음엔 주로 헌 책을 팔았어요. 서울 청계천 시장 같은 곳에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헌 책을 구해다 공급했지요. 자연히 학생들과 유대가 생겼고, 운동권의 모든 정보가 이 서점을 중심으로 수집되고 교환되었지요. 5월17일 저녁부터 이 서점을 중심으로 요인들에게 피신하라는 연락이 취해졌습니다. 18일 이후에는 서점에서 소식지를 만들어 광주 시내에서의 연락과 정보 교환을 맡았고, 이 서점에 모여드는 시내의 정보와 상황을 외부에 전파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밤새 전화가 걸려 왔지요. 10평짜리 서점에 설치한 상황판이 전국 정보의 센터 구실을 했지요.

체포된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 군데로 수없이 신병이 인계되어 가면서 그날 오후 3시께 상무대 합수부로 넘겨졌지요. 여자들만 따로 상무대 연병장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지요. 군인들이 여자들의 옷을 벗기고 매질을 했지요. 가장 괴로운 것은 북쪽의 사주를 받았다는 엉뚱한 혐의와,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는 수사였지요.


상무대 합수부 안에서 남편을 만났습니까?
 조사실로 끌려가는 복도에서, 다른 방에서 고문받는 남편을 보았어요. 포승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등에는 몽둥이 자국이 시퍼랬고 살이 터져 있었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어깨만 보고도 남편이라는 걸 알았지요. 눈이 마주쳤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지요. 수많은 학살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에 남편이 만신창이로 몸이 부서져 나갔어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이 미칠 듯이 행복했지요.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요.

지금 부부 간에 그때 당한 일을 이야기합니까?
 단 한번도 그때 일을 부부 간에 입에 담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남편은 취중에라도 그때 당한 일을 말하지 않지요. 저도 그랬어요. 서로 물어보지도 않아요. 말 안해도 다 아니까요.

남편이 옥에 계실 때 어떻게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까?
 저는 80년 5월 전남 장성 삼계중학교에서 직위해제되었는데 조사를 받고 나와서 다시 복직되었습니다. 그때 제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녹두서점이 책을 모두 빼앗기고 문을 닫자, 서점의 빚이 3천만원이었지요. 월급으로는 3부5리의 이자도 감당 못할 형편이었지요. 그래서 월부 책장사를 시작했지요. 여러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남편 옥바라지에 시동생 옥바라지로 교도소를 쫓아다니면서, 또 구속자 가족끼리 모여 석방운동도 했지요. 변호사들이 아무도 나서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열두살 난 큰 따님은 남편께서 수감되기 전에 낳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땐 아이가 없었어요. 남편이 82년 12월에 홍성교도소에서 출감했지요. 제가 새벽에 교도소 문앞에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함께 돌아왔지요. 첫 아기는 83년 11월에 낳았어요.

참 좋으셨겠습니다.
 참 좋았지요. 월세방 한 칸에서 학교 선생 하고 월부 책장사 하고 시부모님 모시고 살 때였지요. 출감한 남편은 몸이 망가져서 누워 있었어요. 그래도 뱃속에 아기가 생기니까, 아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어요. 광주항쟁 당시 학생들 끼니를 챙겨주려고 반찬거리를 장만하러 시장에 갔더니, 거기 푸성귀가 쌓여 있더군요. 수없는 학살과 통곡과 울분과 절망 속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짓눌려 있다가 시장에서 푸성귀의 초록색을 보는 순간에 아, 삶이란 저런 색깔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느낌을 받았지요. 그리고 아직도 푸른 푸성귀들이 돋아나고 있다는 것이 희망으로 느껴졌지요. 그때의 푸성귀는 저에게 아주 소중한 체험이었어요. 첫 아이를 임신하니까, 그때 시장에서 푸성귀를 볼 당시의 감격과 확신이 되살아나더군요.

남편께서는 출감후 어떤 일을 했습니까?
 남편은 고문받은 몸을 가까스로 추슬러서 의료기 위판 일을 했어요. 남편은 의료기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었지요. 의사들을 상대로 의료기의 성능과 가격을 설명하고 물건 파는 일을 했지요. 남편은 오직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일을 했는데, 가끔씩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삶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울었대요. 나중에 남편 친구들한테서 남편이 술자리에서 울곤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도 남편은 집에 돌아와서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어요. 그이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해서 판매 실적이 매우 좋았어요. 지금은 의료기 회사를 설립해서 직원 20여 명을 고용한 대표이사 사장이지요. 남편이 회사에서 번 돈으로 최근에는 복층 아파트를 장만했어요. 위층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지요.

남편께서는 지금은 순수한 생활인이 되었나요?
 저희 주변에는 지금도 광주의 학생들이나, 5ㆍ18 당시 적극 가담했다가 고생을 치른 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요. 물론 갈등도 있지만요. 남편도 그때 많은 사람의 죽음, 선배와 후배들의 죽음을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남편은 그 후배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세상을 개조하는 일을 운동이 아니라 생활로 받아들이는 셈이지요. 그런 꿈과 열정을 생활 깊숙이 내려앉히는 것이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태도일 것입니다.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나 후배들에게 스며들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우리를 보고 재교육 대상자라고 한대요.(웃음)


학생들에게 5ㆍ18 당시의 일을 설명했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가담자라고 해서, 가담자의 경험과 느낌과 생각을 직접 학생이나 제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저는 역사 과목의 교사입니다. 5ㆍ18을 중학생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사태 전체를 역사로서, 말하자면 객관화해서 가르쳐야 하지요. 그런데 아직은 교단에서 말할 수 있는 그런 객관화 작업이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럼 집에서 자녀들에게는 설명합니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라서 자연스런 성장 단계에서 스스로 알게끔 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5월 단체들이 심한 분열과 대림을 겪고 있는데…
 그 당시처럼 선하고 강하게 집결했던 마음들이 다시 집결되어야 할 거예요. 광주항쟁 이후에 우리들이 그 엄청난 상차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살아냈듯이, 결국은 화해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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