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와 ‘기타 여러분’의 싸움
  • 김당 기자 ()
  • 승인 1994.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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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불붙은 이념 전쟁/‘한겨레’대‘조선’공방, 사회 편협성 반영

우리 시대에 보수와 진보 진영의 일반화한 경계를 가르기는 쉽지 않다.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된 분단구조 속에서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개념은 서로가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으로 형성되어 왔다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 양태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개념이 표방하는 모든 가치와 덕목을 분단 이데올로기가 지배함으로써 다양한 사고와 가치관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편협성은 ‘사회의 거울’인 언론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흑백 논리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노동자 파업 및 대학가 시위와 공권력 투입, 역사적인 정상회담 합의와 정상회담 당사자의 극적인 사망, 그리고 색깔론으로 번진 조문 파동 등에 대한 언론의 보도 양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제도권 언론(특히 서울에서 발행되는 종합일간지)을 보수와 진보로 나눈다면, 자타가 공인하듯 우리 사회에는 ‘하나의 진보 신문와 그밖의 모든 보수 신문’이 있을 뿐이다.

 그 단 하나의 진보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자기네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을 내세워 대표적 보수 언론 〈조선일보〉와 《월간 조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한겨레 21》이 같은 언론으로서 다른 언론을 비판하고 나선 배경은 ‘〈조선일보〉그 상업적 극우’라는 제목의 커버 스토리 기사(7월7일자)에 실린 ‘편집자 주’에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조선일보〉는) 북한 핵 문제로부터 지하철 파업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이슈에 대해 편향적이라고 할 만큼 치우친 채 대대적인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펴고 있다. 특히 《월간 조선》은 이런 공세의 돌격대 역할을 자임한 듯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방향성을 고집하고 나섰다. 이번 7월호에서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문제를 외면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겨레 21》의 북한 벌목장 르포 기사를 비난하는 것을 비롯해 한국의 진보 언론과 양식 있는 지식인들을 무더기로 겨냥하고 나선 실정이다.’

 《한겨레 21》이 《월간 조선》7월호에서 뽑아 제시한 ‘남한 지식인들이 북한 인권관 대해부’라는 부제를 붙인 이 기사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뽑음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앞장섰던 일부 양심 세력들은 ‘북한 인권 거론은 내정간섭’ ‘그들이 투쟁해서 쟁취해야 할 문제’ ‘북한은 주체적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인권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침묵하거나 북한을 변호하고 있다. 아울러 무조건적인 경제 협력만이 북한 주민 인권 신장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월간 조선》이 이 기사에서 겨냥한 ‘일부 양심 세력’은 시사월간지 《말》의 주장, 〈한겨레신문〉의 벌목장 기사, 박형규 목사, 김경남 목사(NCC인권?사회국장), 김창수 연구원(평화연구소), 강정구 교수(동국대), 리영희 교수(한양대), 한상진 교수(서울대) 등이다. 특히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과 《한겨레 21》의 의욕적으로 취재한 벌목장 기사에 대해 ‘ 〈한겨레신문〉의 높은 인권의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논리다’ ‘소위 진보적인 언론의 주장에 의하면, 탈주자는 거의 대부분 너절한 생활을 하다가 도망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라고 비판했다.

4년전 남북고위급회담 때와 양상 비슷

 《한겨레 21》이 〈조선일보〉와 《월간 조선》을 정색을 하고 비판한 배경은 자사에 대한 비판에 반발한 감정적 대응이라기보다는 ‘(〈조선일보〉가) 그동안 주장해온 극단적 논리가 남북 정상회담 논의 등 새로운 상황 전개에 따라 위협받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데 있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어 영향력이 큰 이 신문의 극단적 논리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판단에 따른 진보 진영의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진보?개혁세력을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 남한내 퇴보세력이라고 치부한 채 신공안정국을 부추기면서 마녀사냥식 표적 인터뷰를 즐기는 《월간 조선》의 오만과 편견이 역사를 망치는데 진보 진영을 대변하는 〈한겨레신문〉은 뭐하느냐’하는 질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화답에서도 감지될 수 있다.

 ‘한완상 부총리에서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월간 조선》의 이념 시비 공격과 땅굴소동, 북한 벌목공 탈출 등 냉전적 기획 보도에 많은 사람들이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우려감이 가장 큰 곳은 물론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진보세력이다.’

 이같은 진보 세력의 위기감은 진보적 시사 종합지를 표방하는 월간 《말》과 사회평론지 《길》이 《월간 조선》에 대해 행한 공격적 보도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길》은 지난 6월호에 ‘《월간 조선》의 오만이 역사를 망친다’라는 제목으로 37쪽짜리 대특집을 마련한 데 이어 7월호에는 ‘오만’에 ‘편견’을 더 보탠 30쪽짜리 연속 대특집 (‘《월간 조선》의 오만과 편견이 역사를 망친다’)을 싣고 《월간 조선》과의 전면전을 선포해 놓은 상태이다. 게다가 《길》은 자사 편집위원이자 정치 평론가인 고성국씨(나라정책연구회 정책실장)를 내세워 ‘수구 세력 총궐기론을 역사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월간 조선》의 조갑제 부장에 대해, 제1부 ‘왜 당신 글이 문제인가’에 이어 조갑제 부장의 박정희론, 김영삼론, 북한론과 통일론, 역사관과 세계관 순으로 6회 연재할 것임을 예고했다.

 아직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월간 조선》과 조갑제 부장이 ‘인내에 한계를 느낀’ 진보 언론의 공세에 대해 언제까지 인내할 것인지는 주목되는 사항이다. 그 대신 진보 진영의 공세에 대해 ‘재야의 우익’을 표방하는 《한국논단》과 《자유공론》 같은 보수 월간지들이 ‘방어 사격’을 하고 나섰다. 특히 《한국논단》은 7월호 ‘적색 파괴분자들이 노동계를 지배하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합법을 가장한 조직적 ?집단적 대한민국 파괴?와해 공작은 문화?예술계, 학?언론계, 정?법조계 등에도 바다를 오염시키는 적조 현상처럼 번져 있다’고 전제하고 ‘이 위급한 사태를 긴급 진단하는 연재를 10월호까지 4회에 걸쳐 싣기로 했다’고 예고하고 있다.

 더구나 재야의 우익을 표방하는 이 잡지들의 최근호 기사들(△탈북현장 취재기-북한체제 붕괴 서막이 보인다 △긴급좌담-북한체제 붕괴할 것인가? △한승주 장관은 답하라 △김대중씨는 뭣을 바라는가 △소설〈태백산맥〉고발, 그후 △‘한겨레’가 생산한 또 하나의 ‘진실’ △김영삼 정권의 안보불감증후군 △평양 가면 안된다 △왜 김일성을 못만나 안달인가 △빨갱이와의 투쟁인가, 매카시즘인가)이 한결같이 〈조선일보〉와 《월간 조선》의 논조나 기획과 닮아 있다. 이 중에서도 단연 도드라지는 것은 ‘빨갱이와의 투쟁인가, 매카시즘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 색깔론의 결론은 ‘합법이건 불법이건 파업하는 노조는 빨갱이 집단이고 빨갱이는 몽둥이로 때려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공산당의 악랄한 산업교란 행위에 직면해 있다.…지금 현대?대우 등 기간산업 업체의 노조들은 줄이어 합법적인 쟁의 발생신고를 해놓고 있는 상태이다. 그뒤에 있을 사태는 뻔하다. 법정 냉각기간이 지난 다음 파업 찬반투표 끝에 불법 파업으로 치닫는 것이다. 정부는 언제까지 공산당의 이 합법?비합법?반합법 투쟁을 방관만 할 것인가.’

 《한겨레 21》기사에서 〈조선일보〉와 《월간 조선》을 ‘국가 안보’를 파는 상업주의라고 규정한 강준만 교수(전북대)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 기사들의 논리적 귀결은 항상 ‘북한을 때려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속시원히 때려 잡아야 한다는 직설법을 쓰면 좋겠는데, 〈조선〉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것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인데 ‘전쟁을 결심할 수 있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식으로 둘러댈 뿐이다.”

 정상회담과 색깔론으로 끝난 조문 파동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 양태는 분단 이래 처음으로 남과 북의 총리가 자리를 함께 한 4년 전 고위급회담 때의 그것과 흡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고위급회담이 끝난 뒤 언론은 ‘통일문제 보도에 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반성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 한 언론학자는 독일통일 예를 인용해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다. ‘1949~1989 - PRESSE! WO WARSTDU?'라고.

 동독 내의 한 평화적 시위에 참가한 한 여인이 군중들 속에서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들고 서 있던 피켓에 적힌 글이다. ‘지난 49년부터 89년까지 언론! 넌 어디에 있었느냐?’는 이 항변에 우리나라 언론은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김 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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