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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걸작과 함께 ‘안방 피서’를

여름나기 비디오 10선/〈식인어 피라냐〉등 공포물과 ‘겨울 사랑’담은 영화들 볼 만

박찬욱 (영화감독) ㅣ 승인 1994.07.2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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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 특선’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죠스〉가 으뜸이겠으나 그 효험을 모르는 이가 없겠으므로 그 비슷한, 그러나 그 못잖은 ‘숨은 걸작’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식인어 피라냐〉는 아주 적은 돈을 들여 만든 소품이지만 영화의 질은 제작비와 무관하다는 진리를 확인시켜주는 걸작이다. 식인어떼가 강물 속을 점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인근을 유원지로 개발하려는 장사꾼의 집념은 흔들림이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죠스〉에서 소재를 땄지만 여기엔 심각한 비판정신이 숨어 있다. 피라냐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저항력을 갖게 된 이유는, 이놈들이 일종의 생물학 무기로 선택 교배된 종자이기 때문이다.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잡아먹으라고 미군이 개발한 놈들이 전쟁 후유증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 금수강산에 피라냐 따위는 없지만 언제나 문제는 인간이다.

 최근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 가운데 무섭기로 따져 단연 압권은 〈바디 에어리언〉이다. 아벨 페라라 감독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중견이다. 대자본에 예속되기를 거부하고 적은 예산과 촉박한 기일이라는 한계 속에서 일하기를 자청하는 독립 영화작가. 사람들은 이사람의 영화라면 무조건 컬트 무비라 부른다.

 따라서 최근의 대표작인 〈바디 에어리언〉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이 영화는 영화광을 흥분시키는 하나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이채로운데, 똑같은 스토리로 세 번째 만들어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도전이다. 〈더티 하리〉의 돈 시겔, 〈프라하의 봄〉의 필립 카우프만은 50년대와 70년대에 각각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이 영화를 완성했는데, 이제 우리는 90년대에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다시 만든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3형제의 막내는 정치적으로 가장 과격하다. 외계인은 오직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지구에 온 듯이 군 기지 한 군데를 아예 초토화해 버린다. 미군들은 자기 중에 누가 외계인인 줄 몰라 서로 의심한 나머지 확증 없이 살인한다. 유일한 차이는 감정이 있는지 여부. 그러나 지구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중 누가 아직도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페라라의 국제적인 위상에 비해 국내 비평가와 언론의 홀대가 자심하므로 내친 김에 한 편을 더 소개하기로 한다. 영화관 개봉 때나 비디오 출시 때나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또 하나의 걸작 〈스네이크 아이〉이다. 이례적으로 총격전과 신체 절단의 폭력 세계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여전히 지옥은 지옥. 그동안 지신을 가리고 있던 친구 로버트 드니로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재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뉴욕 배우 하비 카이틀 (〈피아노〉〈저수지의 개들〉출연)이 영화 감독역을 맡고, 이미지의 여신 마돈나가 영화배우 역을 맡아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페라라는 영화라는 허구의 공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리얼리티의 은신처가 아니겠느냐고 질문한다.

김기영 감독〈화녀〉시리즈도 ‘납량 명작’

 공포로 말하자면 한국 영화도 일류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지만 김기영 감독이 60~80년대에 집요하게 매달렸던 연작들은 가히 한국 영화 역사의 백미라 할 만하다. 흑백시절의 〈하녀〉로부터 〈화녀〉를 거쳐 〈화녀 ‘82〉로 종결되는 이 시리즈는, 작가 자신에 의한 재생(리메이크) 분야에서 세계 영화사에 드문 진경을 보여준다. 〈세브리느〉의 루이스 브쉬엘과 〈하인〉의 조셉 로지, 그리고 여러 일본 영화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화녀〉의 주인공은 양계장 집안에 식모로 들어온 무작정 상경 처녀. 작곡가인 남편은 처녀를 농락하고 처녀는 처절한 복수를 시도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를 파멸시킨다. 극도로 표현주의적인 장치에 깃든 도저한 염세주의.

 이런 심각하고 철학적인 공포가 짜증스럽다면, 그러면서도 공포 영화는 봐야겠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크라임 웨이브〉가 있다. 샘 레이미 감독은 〈이블 데드〉3부작과 〈다크 맨〉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가 만든 가장 재미난 영화는 바로 이것이다. 한 심약한 사내가 자기가 무죄라고 부르짖으며 전기의자에서 죽어가는 순간에 그간의 사정을 회상한다. 해충과 쥐를 방제하는,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사람도 제거해 주는 소독업자 2명과 쫓고 쫓기는 게임이 그야말로 요란스럽게 펼쳐진다. 〈톰과 제리〉를 몹시 잔인하게 만든다면 아마 이런 영화가 되리라. 감독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끔찍한 폭력 장면을 보고 포복절도하게 만드느냐에 있다.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레이미의 천재적인 영상 센스에, 그를 추종하는 코엔 형제(〈바톤핑크〉〈아리조나 유괴사건〉감독)의 각본이 더해진다면 세상에 안될 일이 없다.

 여기에 ‘좀더 많은 웃음과 좀더 적은 공포’ 처리를 가한다면 〈피터 오툴의 유령 호텔〉이 된다. 〈크라잉 게임〉의 닐 조단 감독이 할리우드 자본과 손잡았던 시절의 소산은 이밖에 〈천사 탈주〉와 〈늑대의 친구들〉이 있지만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이 작품도 역시 재미있다. ‘아일랜드와 할리우드의 결혼’이라는 표현은 단지 감독이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호텔로 개조한 아일랜드의 고성을 미국인 자본가에게 넘기기 싫은 소유주는 유령 소동을 이용해 손님을 끌어보려 한다. 그러나 엉터리 유령 대신 진짜가 출몰하면서 상황은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다. 미군인 여피가 2백년 묵은 처녀 귀신과 연애를 시작하고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제작자의 간섭만 아니었더라면 훨씬 좋은 영화가 되었으리라고들 말하지만, 고성이 주는 서늘한 느낌만으로도 무더위를 잊기에 충분하다.

 사랑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점을 아예 겨울로 옮겨보자. 필름 느와르에 더위라는 요소가 필수적이라면 멜로드라마에는 추위가 필요하다. 눈 내리는 밤은 낭만을 더해 주고, 찬 바람은 을씨년스런 세상살이를 덥힐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의 행로〉는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벌어지는 멜로드라마이다. 유독 한국에서만 흥행에 실패했던 이 미국 영화는, 할리우드가 수십 년간 쌓아온 우수한 각본, 앙상블 연기, 절제된 연출이라는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클럽을 전전하는 살롱 피아니스트 형제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콜걸 출신 여가수.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만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고독한 동생과, 처자식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찬 형. 물론 동생은 여가수와 사랑에 빠진다.

 겨울을 사랑하는 사랑 이야기는 또 있다. 〈사랑의 블랙홀〉. 발상이 기발하다. 한 시골마을에 고립된 사나이가 믿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다. 잠자리에서 깨어보면 언제나 같은 날. 똑같은 일상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지루하기란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나이도 안먹고 심지어 죽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자기 삶을 지겨워하는 요즘 사람들의 악몽이다. 하루 견디기도 지겨운데 하필이면 그 중 제일 평범한 어느 날이 무작정 계속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냉혈한은 어쩔 수 없이 선행을 ‘저지른다’. 달리 할 일도, 회상할 것도 없는 자로서는 그나마 재미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여자를 사랑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매일 보니까 매력을 알겠다는 것인데, 자고 나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므로 하루가 가기 전에 유혹에 성공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관객을 위한 영화.

유럽 영화의 진지함도 독특한 청량감

 이렇게 산뜻하고 가벼운 할리우드 멜로드라마만 보아서는 인생을 피상적으로 인식하기 쉽다. 유럽 영화는 그래서 존재한다. 이탈리아의 좌파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를 재미나게 볼 관객은 많지 않겠으나, 끝까지 진지하게 감상하고 나서 철학적인 고민에 빠지지 않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컨빅션〉에서 박물관에 갇힌 미녀 관람객이 지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 정사를 벌인다. 그러나 남자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지자 여자는 스스로 강간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재판이 벌어지고 강간의 실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논쟁이 불붙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검사는 자기의 결혼 생활을 반추한다. 오르가즘의 심리적 배경과 남녀 성관계의 정치적 의미가, 유럽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묘사를 통해 전개된다.

 마지막은 음악이다. 비틀즈의 음악과 뛰어난 영상이 완벽하게 조화된 록 영화 〈하드 데이즈 나잇〉. 모든 록 영화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다. 〈3총사〉〈로빈과 마리안〉, 그리고 또 다른 비틀즈 영화〈헬프!〉등으로 알려진 리처드 레스터 감독의 경력에, 이런 수준은 전무후무하다. 더벅머리 총각 4명이 소녀 팬들에게 쫓겨 달아나면서 시작되는 이 세미 다큐멘터리 흑백 영화는 사실상 줄거리가 없다. 좌충우돌의 상상력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형식이 결합되어 유쾌한 음악과 조응한다.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주제곡인 〈A Hard Day's Night〉를 비롯하여 〈Can't Buy Me Love〉〈And I Love Her〉등 명곡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비틀즈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코미디로도 이것은 훌륭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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