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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기택

여.야 영수회담 결과에 관심

문정우 기자 ㅣ | 승인 1994.06.0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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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민주당 대표는 5월 21일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초청으로 대전 유성호텔에서 ‘21세기의 국가 경영과 지도자의 역할’이란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 주최측에서는 토요일 오후이고 주제도 정치 현안과 별 상관이 없어서 지역 기자들만 참석하리라고 예상했는지 기자석을 한 테이블밖에 마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날 강연회에는 민주당 출입기자들이 대거 내려와 취재에 열을 올렸다. 이대표가 대전 강연회에서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의 정계복귀론과 관련해 뭔가 중요한 발언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기자실에 돌았기 때문이다. 이대표 측근들도 기자들의 물음에 적극 부인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대권 후보로 못박혀서…”
 그러나 대전 강연에서 이대표는 기자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김영삼대통령에게 유화적인 손짓을 보내지 않을까하는 예상과는 달리 김대통령에 대한 비판 수위는 여전히 높았다. 그는 김대통령의 통치를 신권위주의라고 꼬집은 뒤 “어디다 대고 아직도 그런 행태를 보이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개혁을 한다면서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고, 한 개인이 자기 멋대로 주무르는 이런 못된 버릇은 고쳐져야 한다”라고까지 얘기했다.

 김대중 이사장과 관련해서는 정계복귀론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미국에서의 북핵 발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얘기했다. 그는 “DJ 스스로 잘못 전달됐다. 오해없기 바란다고 해명했는데도 여권에서 청와대.민자당.외무부장관까지 들고일어나 물고늘어지고 있다. 이렇게 쓸데없는 논쟁은 국정 수행에 조금도 도움이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정치를 후퇴시키는 구태의 전형이라고 덧붙였다.

 이대표는 김이사장 정계복귀론이 터져나온 뒤 내내 기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행동을 보였다. 표정이 어두웠으며, 기자들이 물어도 ‘할 말이 없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5월12일 여성단체 초청을 받아 대구에 내려가서는 사석에서 “요즘 내 형편이 참 고약하게 됐다. 어쩌다 본의 아니게 97년 대권 주자로 못박히는 바람에 여러 군데서 나에 대해 상처내기를 하고 있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기자들이 대전 발언에 주목한 까닭은, 대구에서보다 한 단계 진전된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이대표의 대전 강연을 듣고 난 기자들이 ‘싱겁다’는 반응을 보이자, 이대표를 수행한 한 측근은 이런 말을 했다. “그럼 이대표가 과거 노태우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했던 것처럼 굴종적이거나 감정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겠는가. 이대표는 체질적으로 그런 일은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이대표의 상황 인식을 간접적이나마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우선 이대표는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간에 호헌론이, 노태우 대통령 임기 말에 내각제 개헌론이 불거져나왔던 것처럼 김이사장의 정계복귀론을 언제든 한번은 터져나올 수 있는 사안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로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실제로 이대표 진영에서는 김이사장의 정계복귀론이 나오기 두달 전에 벌써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 가능성에 대해 치열한 내부 토론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이사장의 정계복귀론이 나온 뒤 이대표의 표정이 내내 어둡고 때에 따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그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대표는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적어도 3당 합당 뒤 내각제 개헌 각서 누출 파동이 일면서 당무 집행을 거부하고 마산행을 결행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처럼 정면 돌파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대표의 민주당내 입지로 보아 그럴 만한 처지도 못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김이사장의 복귀가 역사의 흐름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싶은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는 대전 강연에서 김이사장이 미국에서 행한 북핵 발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방적으로 정부.여당만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는 ‘논쟁’이란 단어를 사용해,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김이사장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정치를 후퇴시키는 구태의 전형’이라는 표현도 썼다. 정계를 은퇴한 김이사장의 얘기를 놓고 논쟁을 벍이는 것이 구태를 재연하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강연하기 전에 이대표는 ‘김대중 전대표가 정계에서 은퇴해 새로운 분야에 몸담음으로써 자기 역할을 찾았고, 따라서 여야 모두 그를 정계 원로로 대우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려다 측근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대표가 길게 보아야 한다”
 이대표는 대구에서 “내가 본의 아니게 97년 대통령 후보로 못박혀…”라는 말을 했다. 이는 앞으로 정말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가 확실해질 때 이대표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와 관련해 매우 주목되는 발언이다. 그의 이 발언은 그동안의 처신과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대표는 지난 1년여 동안 공.사석에서 다음 대권에 도전할 의사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사조직인 통일산하회 모임에 가면 ‘이기택을 대통령으로’ 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번 방미 때도 기자들이 “국내에 민생현안이 산적해 있는 시점에서 굳이 야당 대표가 미국에 갈 필요가 있느냐”고 물고늘어지자, 이대표의 핵심 측근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가 미국에 가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하는데 뭐가 이상하냐”라고 자신있게 말한 바 있다.

 대구와 대전에서의 이대표 발언을 종합하면 이대표는 김대중 복귀설이 대두된 이후 전반적으로 차기 대권에 도전하려는 의지마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위축돼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와대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쳐왔다. 23일 밤 서청원 정무장관이 영수회담을 열자는 김영삼 대통령의 메시지를 들고온 것이다. 이대표는 지난 6월 회동 때처럼 ‘훈계’만 듣고 오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의제를 사전 조율한다는 전제하에 영수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번 영수회담에서 러시아방문과 북한핵이라는 공식 의제 외에 어떤 얘기가 오갈지 여야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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