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 분분한 ‘의견 조사’
  • 경남 거제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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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 . 거제 행정구역 통합 진통 … 일부 시민들 “官心에 民心 꿰맞췄다”

ㄱ이라는 집안의 식구 수는 가장 ㄴ씨 부부와 장성한 자녀 8명을 합쳐 10명이다. 어느 날 사정이 생겨 ㄴ씨는 집을 처분하기로 하고, 의견을 묻기 위해 가족 회의를 열었다. 공교롭게도 회의에는 가족 가운데 절반이 참석하지 않았다. 자기 뜻을 억지로라도 관철하려던 ㄴ 씨는, 5명만으로 회의를 열어 과반수 이상(즉 3명의) 찬성을 얻자 곧장 복덕방으로 달려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가족들이 항의하자 ㄴ 씨는 ‘너희들 스스로 결정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고 도리어 그들을 나무랐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최근 정부가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논란이 빚어진 곳은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와 50여 부속 섬으로 이루어진 경남 거제군이다.

시민들 “관청에서 압력 넣었다”
 거제도에서 문제가 발생한 때는 지난 4월말이었다. 정부가 인구 5만명 가량의 장승포시와 그보다 2배쯤 많은 인구를 가진 거제군을 통합하기로 하고 주민 의사를 묻는 과정에서, 장승포 시민 가운데 일부가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승포 시민 가운데는 애초에 통폐합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짙었는데, 결과는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나왔다. 장승포 시민 중 일부는 조사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실시됐을 뿐 아니라 찬성으로 나온 주민 의견 조사 결과도 억지 논리로 꿰맞춘 것이므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는 찬성 결과를 강조하며 통합을 기정 사실화하는 듯한 인상이다.

 반대하는 시민측은 장승포시의 시민 의견 수렴 작업은 처음부터 불공평하게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시민이 찬ㆍ반 여부를 밝히게 되어 있는 의견조사서에 일련 번호를 붙여 “누가 어떤 의견을 냈는지 알 수 있도록 사실상 공개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시청측은 “일련 번호는 편의상 붙였을 뿐 조사서를 무작위로 주민에게 보냈기 때문에 의심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시청이 조사서를 발송하고 이를 다시 접수하는 동안 각 기관 공무원을 총동원해 찬성 유도 작업을 벌이도록 독려했다”고 말한다. 또 때때로 공무원이 반대 의견을 공공연히 밝히는 일부 시민 대표를 찾아가 ‘신상에 결코 이롭지 않다’며 넌지시 압력을 넣는 일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통합을 반대하기 위해 조직된 ‘시ㆍ군 통합 반대 대책위원회’(대책위)가 우여곡절 끝에 빈껍데기 기구로 남게 된 과정도 그렇다. 애초에 대책위는 공동 대표로 이 지역 출신 도의원 . 시의원이 참여하고, 실무급 위원으로 로터리클럽 . 라이온스클럽 대표 등 시민 . 사회 단체 대표가 모두 참여한 범시민기구로 출발했는데, 뒷날 도의원 . 시의원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대표성을 잃은 임의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책위 김경언 실행위원장은 “이 지역 출신 여당 의원이 내려와 ‘중앙의 뜻이 찬성인데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내 체면은 물론 중앙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라며 지역 대표들에게 대책위를 탈퇴하라고 종용했다” 라고 밝혔다.

 일부 시민들은 또 시청의 조사 결과 발표에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전체 조사 대상자 가운데 절반을 간신히 넘은 수만 조사에 응했는데, 찬성률이 53.1%에 이르자 앞뒤 내용은 잘라버린 채 전체 주민의 과반수가 찬성한 양 선전했다는 것이다. 전체 조사 대상자를 기준으로 하면, 찬성률은 29.9%에 불과하다는 해석이다. 한편, 지난 5월초 5대 2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장승포시의회(의장 김대규) 의원들은, ‘주민의 손에 뽑힌 의원들이 오히려 주민 의사를 뒤집었다’고 비난 화살을 받았다. 이들은 ‘외압 때문에’ 반대 결의를 한 차례 유보한 적도 있었다.

 장승포시의회가 통합에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통합하려는 궁극적인 목표가 정부가 내세우는 것처럼 도 . 농간 균형 발전을 꾀한다기보다 단순히 시를 희생해 예산 절감 효과를 거두자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거제군과 장승포시를 통합하면, 이전에 두 곳에 나가던 정부 보조금을 한 곳으로 줄일 수 있다. 통합 반대 결의안을 냈던 장승포시의회 김종길 의원은 “농촌은 농촌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고유 특성을 살리자는 것이 지방자치제의 본뜻이다. 예산을 줄이기 위해 농촌과 도시를 억지로 합하려는 것은 지방자치제 근본 취지에도 어긋나는 억지 봉합이다” 라고 주장한다.

 장승포시와는 반대로 통합에 대해 절대 찬성인 거제군의 사정은 또 다르다. 장승포 시민들은 자기네만 손해보지 않겠다는 지역이기주의의 본보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제군은 그 증거로, 현재 군에 설치된 쓰레기처리장 . 분뇨처리장 등 각종 혐오 시설을 들고 있다. 거제군의회 김한윤 의장은 “저쪽에서는 군과 시를 통합하면 자기네만 손해본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통합이 되면 더 많은 혐오 시설을 거제군으로 빼내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군민들은 장승포를 위해 왜 우리가 희생해야 하느냐고 아우성인데, 자기네만 좋은 쪽으로 행동한다면 이들의 불만을 무슨 명목으로 설득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장승포시와 거제군이 찬 . 반으로 갈라선 배경에는 장승포시와 거제군내 신현읍의 자존심 싸움도 얽혀 있다. 이는 곧 시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고 시청 소재지를 어디에 둘 것인지, 즉 미래의 발전 중심지를 어디로 잡을 것인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장승포 시청은 “홍보 작업 했을 뿐”
 5년전 시로 승격한 장승포시는 거제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이 몰려 있고, 시의 기반 시설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시의 이름은 마땅히 ‘장승포’가 되어야 하며, 시청도 이곳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 장승포 시민 일부의 입장이다. 반면 거제군은, 군 전체를 볼 때 고현(신현읍)이 지리적으로 가장 중심에 있고, 현재 군청 소재지가 신현읍에 있으므로 시청은 당연히 고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승포 시민들이 거제군과 합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버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행정구역 통폐합 문제에 관한 한 주민 의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공언했던 정부가, 편법으로 주민 의사를 몰아 통합을 강행하는 배신 행위를 했다고 믿는 것이다. 장승포시 장승포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김영화씨는 “5 . 6공때도 이같은 일은 없었다. 지난 82년부터 줄곧 여당을 지지해 왔지만, 이번 일로 민자당을 탈당했다. 통합 의견을 묻는 절차를 도대체 문민 정부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강행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청은 이에 대해 통합 과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시청 공보실의 한 직원은 “저쪽에서는 우리가 찬 . 반 의사를 묻는 과정에서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는 단지 기권표를 막기 위해 홍보 작업을 벌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현재 △지역간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광역행정 수행상의 애로점을 해소하며 △예산 절감을 통해 자치단체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행정구역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통합하려는 의도도 이와 같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과정이 비민주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면, 결국 거기에서 파생하는 문제는 새로 탄생하는 통합 시에 부담으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최동규 연구원은 “개정된 지방자치법에서는, 주민들에게 중요한 사항을 주민 투표에 부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 하지만 아직 구체 절차를 명시한 법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정식으로 주민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어물쩍 정부 방침을 강행하려 한다면, 장승포시와 같은 사례는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관심이 이끄는 민심은 결코 진정한 민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남 거제 .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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