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이 현실이었다”
  • 김훈 부장 ()
  • 승인 1994.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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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해제된 농수산부 조부관 사무관

농수산부 시장과 조부관 사무장(32)은 지난 5월초 개정농안법 시행 첫날부터 벌어진 농수산물 유통마비 사태 직후 공무원 ‘복지부동’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어 직위해제되었다.  그는 이번 사태로 직위해제된 농수산부 관리 3명 중 최하위 직급자이다. 그동안 도대체 무얼 했느냐는 대통령의 질책이 내려왔고, 행정의 무능을 공격하는 여론의 포화가 빗발쳤다. 개정농안법 시행이 입법 예고되어 있었던 지난 1년 동안 이 젊은 사무관은 도대체 무얼 했던 것일까. 과천 정부청사의 공무원 사회에서는 ‘조사무관이 발바닥이 해지도록 뛰어다녔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의 많은 노력은 왜 결과적으로 복지부동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조사무관을 만나 들어보았다.

도대체 개정 농안법 시행이 예고되어 있었던 지난 1년 동안 정부는 무얼 했습니까?
정부라고 하지만, 사실 현장을 뛰어다니는 실무자는 행정 경력 3년 미만의 사무관인 저하고,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인 6급 주사 한 사람, 그렇게 둘뿐이었지요. 과장은 공석이었고 그 윗분들은 또 윗분대로 당 . 정의 더 높은 분들을 설득하느라고 애를 쓰셨지요. 중매인과 도매법인에 대해 새 법이 옳음을 설명하고 교육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주된 임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복지부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개정 농안법은 그 법이 지향하는 바가 명석하고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데, 그처럼 명백히 옳은 일이 왜 이처럼 명백히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까?
개정 농안법은 개혁 입법이고, 또 그 입법 취지가 법적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런 정의만으로 현실이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요. 그 정의를 실현하고 거기에 접근할 행정 수단을 확보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행정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법의 입법 취지와 그 법이 지향하는 목표와 이상이 유통 현실과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습니다. 공정가격 실현과 부당이득 근절이 그 법의 주된 내용이었고, 중간자들의 부당이득을 제거함으로써 그 이득이 결과적으로 생산자들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 그 법이 지향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중매인들 1천5백명 사이에도 정당하고도 치열한 경쟁이 있습니다. 중매인의 판매 행위에 따라 가격이 왜곡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생산자가 경제적인 약자라고 해서 그들의 물건을 비싼 값에 사주면 된다는 낭만적인 생각도 가격 구조를 왜곡시켜 결과적으로 유통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또 농산물이라는 것은 물이나 공기와도 같아서 막대한 규모의 물량을 매일매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신속히 유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소비자가 소매인조합을 결성해서 산지로부터 직접 무 . 배추를 사다가 쓰면 된다는 생각은 현실 개선 방안이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생각이지요. 국내에서 생산하는 농수산물은 저장성이 없습니다. 상추는 단 하루도 지체시킬 수가 없습니다.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도시로 몰려드는 이 눈먼 물량을 삽시간에 대량 유통시킬 수 있는 중간자들의 역할을 긍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행정 공무원들이 국회를 통과한 법의 현실적 타당성에 대해 자꾸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새 농안법 시행이 예고되어 있던 지난 1년 동안 우리들을 괴롭힌 것이 바로 그런 부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행정 공무원은 현실을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새로운 법은 가장 중요한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그 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저와 동료 직원 둘이서 갈팡질팡했고, 시행 착오도 있었습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새 농안법을 실현하기 위한 그 하위법들, 즉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드는 일이었지요. 모법의 정신을 구현하면서도 유통의 현실에 부합하는 하위법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법제처 등 관계 부서의 심의를 거치는 동안 많이 늦어졌지요.

새 농안법을 농민 . 중매인 . 도매법인 그리고 국민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 너무도 소홀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
모법을 만들 때는 공청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위법을 만들어야 하는 행정 공무원으로서는 여러 차례 공청회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모법의 취지를 이해시키고, 모법이 갖는 현실과의 괴리를 하위법으로 보완하자는 것이 우리 행정 공무원들의 방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청회를 거듭할수록 설득은 안되고 또 보완책도 나오지 않았지요. 다만 모법의 부당성을 성토하는 목소리만이 높아갔습니다. 실무 책임자로서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장으로부터의 어려움은 모두 개혁 입법이라는 명분에 밀려났고, 또 결과적으로 현장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태도가 복지부동으로 비칠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럼 행정부는 법을 시행하려는 노력과 법을 시행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동시에 했다는 말입니까?
결과적으로 그런 모순된 길을 걸어왔던 셈이지요. 그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법을 시행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요.
유통 흐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짐작을 했지만, 사태의 전모를 예측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산자의 푸성귀가 소비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측이 생산자를 찾아나서는 방식으로 유통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1년 동안 준비가 없었다는 질책도 있지만, 유통을 정면으로 뒤바꾸어 놓는 사태에 대한 제도적 준비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는지요. 전국의 모든 생활 구역마다 직판장을 설치하는 것이 그 준비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또 그런 엄청난 상거래 관행을 1년 안에 정착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새 법의 시행 일자인 5월1일이 다가오면서 농수산부 안에서 위기 인식이 감지되고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작년 말부터 농수산부 안에서 그런 위기를 충분히 논의했고 장관께도 보고했습니다. 게다가 파 파동까지 겹쳐서 농수산부 유통국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었지요. 4월이 지나자 윗분들은 청와대와 당 . 정과 언론기관을 찾아다니며 현실적인 실현의 어려움을 설득하는 것이 일이었지요. 저도 그런 자리에 윗분들을 몇 번 수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4월10일의 당정협의회에서는 시행 유보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더니 며칠 후에 유보 철회라는 당의 입장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이 다가왔지요. 중매인들은 준법 투쟁에 나섰고, 정부는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꼴이 되었지요. 중매인이나 관련 집단들이 모두 수긍을 한다해도 시행하기 어려운 법률이었는데 그들이 전혀 수긍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일은 결정적으로 어려워진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임박한 혼란에 대한 대처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유통을 관리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혼란에 대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전국의 통반 행정 조직이나 농 . 수 . 축협의 하부 조직, 심지어 경찰력을 동원해서 푸성귀를 공급할 수밖에 없다는 계획을 짜면서 참담했습니다. 왜 농수산물 유통에 행정력과 경찰력이 동원되어야만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때 법은 ‘흐름’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 농안법 시행이 6개월 보류되었는데, 6개월 후에는 이 법이 정착될 것 같습니까?
그 6개월 후에 대비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농수산물유통개혁기획단을 조직하고 5월20일부터 가동했습니다. 저는 직위해제 당하고 바로 이 유통개혁기획단으로 발령이 났지요.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금방 또 다섯 달이 지날 겁니다. 그 안에 무슨 방안을 찾아봐야겠지요. 당은 이 개혁법안에 집착하고 있는데, 정부는 5개월 후에 무슨 길을 제시해야 할지, 어려운 일입니다. 하루하루 날짜 지나가는 것이 조마조마합니다.

복지부동을 이유로 직위해제한 조처에 심정적으로 승복하십니까?
말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김태수 차관이 이 파동과 관련해서 여당 쪽을 공격하다가 해임된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개 사무관이 언급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차관의 사표로 그동안의 당 . 정간 갈등이 일단락되었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곧 닥쳐올 5개월 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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