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섬’ 일본 몰락이냐 재기냐
  • 일본 도쿄 .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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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관료.경제 시스템 ‘총체적 붕괴’ … ‘변혁’ 논의 활발

도쿄 제일의 번화가 긴자 거리는 휴일이면 보행자 천국으로 변한다. 미츠코시 백화점 앞을 기점으로 한 약 4km의 거리다. 그러나 하타 연립정권 구성을 둘러싸고 정치 1번지 나가다 거리가 대지진을 만난 듯 휘청거리던 지난 4월말. 보행자 천국의 인파는 여느 때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긴자 브랜드’ 즉 긴자라는 상표도 이제 더 이상 최고급을 상징하는 대명사는 아니다. 대신 요즈음 긴자 거리의 화제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염가 판매 할인점들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가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오키 상사는 한 벌에 5천엔 하는 신사복을 찾아 ‘회사형 인간’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곳이다. 거품 경제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금싸라기 땅이 이제는 할인점 거리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거품 경제에 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은 벌써 4년 전 일이다. 전세계의 부를 독점할 것 같았던 그 때의 위세는 이제 신화일 뿐이다.


일본 직장인들, 흥신소 찾아가 “나 좀 조사해 달라”
 ‘자기 조사’. 요즘 들어 일본이 직장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는 조사다. 일본적 경영의 대명사로 불리던 종신고용제가 한물 간 지금 봉급 생활자들이 자기 방어 수단으로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도쿄 유락가에 자리잡은 ㄱ 흥신소. 이곳에는 매달 40~50명에 달하는 회사형 인간들이 자기를 조사해 달라고 찾아온다. 회사나 주변에서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한 것이다. 이런 자기 조사가 유행하고 있는 것은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구비키리(목자르기) 현상’ 때문이다. 회사를 위해 태어나 회사를 위해 죽어간다는 일본의 회사형 인간들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충격적인 현상이다.

 종신고용제 . 연공서열제와 같은 일본적 시스템이 무너짐에 따라 당연히 회사형 인간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전 같지 않다. 전일본공수(ANA)에 근무하는 한 중년 부부는 최근 오사카변호사협회에 인권구제를 신청했다.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단독 부임 4년은 너무 길다는 것이 이유다. 80년대의 회사형 인간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상이다. 이렇게 보면 ‘가로시(과로사) 현상’도 이제는 신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인류’라 불렸던 새로운 회사형 인간들에게는 접목될 수 없는 풍속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제임스 아베글렌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거대한 주식회사에 비유한 적이 있다. 정 . 관 . 재계가 삼위일체가 되어 경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이 국가라기보다는 영리 목적의 주식회사와 같다는 것이다.

 세이케이(成蹊) 대학의 다케우치 야스오(竹內靖雄) 교수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 천황을 정점으로 한 ‘닛폰 주식회사’라고 부른다. 천황이 세습제 명예회장이라면 정치가는 대주주다. 여기에 법인 주주에 해당하는 기업과 회사원에 해당하는 관료가 참가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한 거대한 닛폰 주식회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품 경제의 파탄과 거기서 비롯된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는 비단 경제 문제에 국한한 현상은 아니다. 자민당 정권의 붕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말을 바꾸면 거품 경제가 자민당의 금권 정치를 부추겼는데, 거품 경제가 파탄하자 금권 체질이 폭로되어 자멸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닛폰 주식회사가 지금 경제 혼란과 정치 혼란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일찍이 일본인들은 ‘1류 경제, 2류 관료, 3류 정치’라는 말을 즐겨 사용해 왔다. 정치 혼란에도 불구하고 닛폰 주식회사를 번영시켜온 것은 바로 기업과 관료의 힘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3류 정치였을망정 38년 간에 걸친 자민당 장기 정권이 존속했기에 닛폰 주식회사의 경제 번영도 가능했다. 그 3류 정치도 지금 호소카와 연립정권 붕괴와 하타 소수 내각 등장으로 4류 정치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정치 혼란이 해소될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타 내각이 총사퇴하고 중의원 총선거가 실시된다 하더라도 아직 호헌파와 개헌파로 일본 정계를 양분하기에는 축적된 에너지가 너무 미약한 실정이다. 국내파 정당과 국제파 정당이란 2대 정당제도 아직은 꿈 같은 얘기다.

 그렇다면 정치와 경제에 빨간 신호등이 켜진 닛폰 주식회사는 과연 침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인가.

 며칠 전 일본의 관청가로 불리는 가스미카세키에서 일어난 일이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농림수산청 앞을 지나가던 통행인이 피를 흘리고 넘어져 있는 한 중년 사내를 발견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 사내의 정체는 현직 운수성 자동차교통국 계장. 주머니에 든 유서에는 ‘폭주하는 업무 때문에 이 세상을 하직한다’고 적혀 있었다. 업무상 고민으로 8층 건물에서 투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투신 자살이 가스미카세키 관청가에 큰 충격을 던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와 같이 철야 근무에 지친 관료가 염세 자살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일본 관료들이 아직도 우직할 정도로 업무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일 수 있다. 실제로 최근 한달간 정치적 공백이 있었음에도 닛폰 주식회사에 별다른 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수한 관료기구가 바로 닛폰 주식회사의 실질적인 최고 의사결정 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본인들의 설명이다.

무너지는 ‘관료’ 보루…국민 다수가 관료 주도에 불만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관료 신화’는 어디까지가 참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아사히 신문>이 최근 실시한 여론 조사는 그 신화의 진실을 밝혀주는 한 단서일 수 있다.

 이 여론 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관료를 신용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4%였다.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관료 불신에 빠져있다는 얘기인데, 그 이유는 관료들이 국민의 이익보다 기업이나 업계, 자신이 소속한 성 . 청의 이익을 우선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관료가 우수하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41%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응답자의 45%가 현재의 ‘관료 주도 현상’에 대해 큰 불만을 드러냈다. 정치가가 판단할 정책조차 관료들이 멋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평가절하는 한마디로 자기 변혁을 게을리해온 관료사회의 수구적 체질이 부른 것이다. 《관료망국론》의 저자 야야마 타로(屋山太郞)에 따르면 일본 관료들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은 미국이라는 선두 주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잡을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추진하는 치밀성에서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선두 주자가 없어진 지금 그들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거북이와 같은 존재다. 새로운 산업을 진흥시키기는커녕 각종 규제로 경기 회복을 가로막는 것이 실은 바로 관료들이다.

 얼마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일본의 관료 사회를 비판하는 한 풍자 만화를 실었다. 제목은 ‘센세이, 지금도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나요’다. 다시 말해서 정치가를 떡주무르듯 하는 일본 관료들을 풍자한 만화다.

 이렇게 보면 닛폰 주식회사의 마지막 보루인 관료 사회에도 빨간 불이 깜박이고 있다. 즉 규제완화 압력과 이른바 ‘가이와쓰(외국의 압력)’라는 두 가지 압력에 의해 일본적 관료 시스템에도 변혁 물결이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다는 얘기이다.

 요즈음 일본 텔레비전들이 아침 . 낮에 방영하는 이른바 ‘와이드 쇼’에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왕실의 동정이다. 최근의 화제는 미치코 왕비가 7개월 만에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왕실 비판에 충격을 받아 언어장애증에 시달려왔다. 따지고 보면 작년의 왕실 비판 소동은 근래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 현상과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다.

 앞서의 다케우치 교수에 따르면, 천황은 닛폰 주식회사의 명예회장에 상당하는 지위다. 그러나 패전 직후에 제정한 헌법에 따라 천황의 지위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격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고한 히로히토 왕은 결코 권위를 잃은 적이 없었다. 패전 전의 그의 권위주의적 이미지와 천황제를 지지하는 자민당 정권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키히토 왕이 즉위하고 자민당 정권이 붕괴하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아사히 신문>이 작년 5월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왕실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 국민은 약67%다. 그것도 왕세자의 결혼식 직전에 실시했기 때문에 꽤 좋게 나온 지지율이다. 이 지지율이 보여주듯 아키히토 왕이 즉위한 이후의 일본 왕실은 이제 ‘권위의 상징’은 아니다. 텔레비전 매체가 그들의 패션을 열심히 뒤쫓듯 ‘관심의 대상’ 또는 ‘흥미의 대상’에 더 가까운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시 진행 형태로 일본의 기성 체계가 무너지고 있는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역사의 종말》 저자로 널리 알려진 프란시스 후쿠야마 랜드연구소 고문에 따르면, 일본적 시스템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변화는, 일본이 곧 그가 말한 ‘역사의 종말’에 도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과도기적 혼란…대일본주의 다시 고개 든다”
 그는 월간지 《정론》6월호에 기고한 ‘역사의 종말에 있어 일본의 정치 변화’라는 글에서 그가 내세운 ‘경제 발전의 진보가 정치의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명제에 따라 정치는 물론 일본의 경제 . 사회 전체에 큰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역사가 종말을 고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과 똑같다. 그렇다면 닛폰 주식회사는 과연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다케우치 교수는 ‘일본의 신국가 전략’이라는 글에서 일본이 채택할 수 있는 국가 전략으로 정치대국 . 보통국가 . 상인국가 . 군사대국 등 네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그러나 보통국가 전략은 곧 정치대국 . 군사대국을 내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신국가 전략은 보통국가와 상인국가로 집약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같은 두 개의 국가 전략은 지금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신생당 대표 간사의 저서 《일본 개조 계획》과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 신당 사키가케 대표의 저서 《작아도 반짝거릴 수 있는 일본》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오자와의 신일본 계획은 보통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궁극 목표이다. 헌법 개정과 자위대 개편을 통해 전후 반세기에 걸친 모라토리엄, 즉 지불유예 상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는 ‘1국 평화주의’나 ‘1국 번영주의’를 비판하며,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군사적 공헌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대국 . 군사대국의 길을 추진한다.

 이에 비해 다케무라가 구상하고 있는 신일본은 작은 일본이다. 그는 패전 이후 일본 정치의 근간을 이뤄온 요시다 독트린 즉 ‘경무장 경제우선 정책’을 답습하자고 주장한다. 따라서 헌법 준수와 자위대 현상유지가 그의 ‘작은 일본론’ 골격이다. 작은 일본은 결국 상인국가 즉 경제대국을 지향하는 나라다. 이렇게 보면 또다시 ‘대일본주의’와 ‘소일본주의’의 대립이 일본의 정치 변혁을 일으키고 있는 근원이다. 메이지 유신이 그랬고 이른바 대동아전쟁도 바로 ‘대일본주의’가 일으킨 전쟁이다.

 저널리스트 이지리 가즈오(井尻千男)에 따르면 일본은 결코 ‘소국’이 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나라다. 노일전쟁 .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역사가 그렇고, 현재의 인구 규모나 경제 규모로 보더라도 일본은 언제까지나 소국으로 안주할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전 이후 구축된 닛폰 주식회사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이지리에 따르면, 그 시대는 패전과 점령을 통해 자기 반성과 자기 부정이 억지로 강제된 시대였다. 따라서 무역 입국이나 경무장 경제우선 전략이 최선의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 변혁과 일본적 시스템 붕괴 현상을 그런 닛폰 주식회사 시대를 마감하기 위한 과도기적 혼란이다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소일본주의가 우세했던 반세기의 침묵을 거쳐 또다시 대일본주의가 지배하는 ‘신일본 시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일본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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