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졸한 기쁨 안기는 ‘일본 겉핥기’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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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으로 쓴 ‘인상기’ 많아 · · · 국수주의적 만족감 제공

90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쪽의 사회사적 맥락을 규정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민족주의의 발흉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의 민족주의가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반발 및 광주 민주화항쟁과 연결지어져서 나타났다면, 90년대의 민족주의는 냉전 붕괴 이후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경제 블록화 현상, 북한의 핵 문제 해결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압력을 인식하는 과정, 또는 일본의 대국화에 대한 반응에서 출발하는 것이 새로운 특징이다.

 문화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신민족주의 경향은 문학 · 출판 시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해냄)의 폭발적 인기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결과적으로 핵문제의 자주성을 이야기하는 《무궁화꽃···》은 주로 젊은 지식층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와 유사한 성격의 소설이나 저작물 양산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최근 간행되는 소설들이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시공사)라든지,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립니다》 (행림출판)처럼 엇비슷한 제목을 달고 있는 것도 이런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은 없다》 (지식공작소)와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 (도솔) 같은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연유 역시 이 현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개고기를 먹는 남자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의기양양해 보이는데, 내 눈에는 이것 또한 한국인의 내셔널리즘으로 비친다.’

 이는 일본 <산케이 신문>의 한국 특파원 구로다 가쓰히로(?田??)씨가 최근에 쓴 《좋은 한국인 나쁜 한국인》 (고려원) 중에서 ‘개고기 내셔널리즘’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한국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으며 한국어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일본 기자의 눈에는 개고기를 먹는 한국 남성들의 모습이 민족주의의 한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은 없다》와 《미국분···》이 인기를 끄는 배후에는 ‘개고기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출판 내셔널리즘’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외국인의 시각에는 다분히 그렇게 비치치 않을까.

 물론 이와 유사한 시각으로, 말고기를 먹는 일본 남성의 모습은 한국인에게 일본 군국주의의 한 상징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것은 ‘말고기 군국주의’인가.

일본 여성은 공짜로 탈 수 있는 택시?
 외국에 대한 소개서, 특히 단순한 감상문이나 기행문을 넘어서는 본격 국가 · 민족론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지은이의 감상 · 감정이 곧장 특정 민족 · 국가에 대한 단정으로 연결되기 쉽다는 데 있다. 체류 기간이 짧은데서 오는 체험 부족은 그 오류를 더 심화시키기 십상이다.

 얼마 전까지 KBS 일본 특파원이었던 전여옥씨가 쓴 《일본은 없다》의 서문 격인 ‘이유’라는 글을 보면 ‘마치 신참 복서처럼 일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부딪치면서 파고들어가며 쓴 글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없다’라고 겨론 내린 단언은 결국 ‘일본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나라이다. 국가도 국민도 모두가 비정상적이다. 일본의 모든 사회 구조와 인간 관계의 형태는 힘을 가진 자와 없는 자,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아주 단순한 도식이 성립된다. ··· 나는 일본의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 돈 많은 이와 가난한 이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미치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라는 극언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시각은 일본 각료들이 곧잘 내뱉는 망언, 그래서 전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일본 대사관 앞 시위를 부르는 그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것과 비정상의 간격이 너무도 먼 것이다.

 《일본은 없다》는 물론 일본에 대해, 특히 일본 여성의 실상에 대해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그러나 적절한 무게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한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머지 다섯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글에서, 그는 이탈리아 여행중 그곳에사는 이란 남자 한 명에게 차례차례 성폭행 당한 일본 여대생 여섯 명을 예로 들며 결론처럼 이렇게 말한다. “해외 여행을 하면 마치 부나비처럼 외국 남성들에게 뛰어든다고 해서 ‘옐로우 캡’이란 영예로운 별명까지 얻은 젊은 일본 여성들, 미국에서는 택시를 가리키는 이 옐로우 캡에, 요즘 공짜라는 ‘후리’까지 덧붙여져 ‘일본 여자=후리 옐로우 캡’이라는 등식까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젊은 여자 모두가 ‘후리 옐로우 캡’이라는 지은이의 단언은, 비록 한국인들에게 속시원한 국수주의적 만좀감을 줄 수 있을지언정 일본 전체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탈리아 성폭행 사건은 특수한 사례이지 결코 일본의 젊은 여성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결국 이 글은 일부를 전체인 양 오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올림픽 때 벌어졌던 일부 여대생 자원봉사자들의 추태에 대해, 어떤 외국 기자가 ‘한국 여자는 모두 공짜로 탈 수 있는 택시와 같다’라고 쓴다면, 한국인의 마음은 과연 어떨가.

 이와 유사한 오류는 구로다 가쓰히로씨의 《좋은 한국인···》에서도 발견된다. ‘아침부터 복어를 먹는다’라는 글의 한 부분을 보자. ‘최근 한국인의 선호하는 요리는 단연 냄비요리로, 고추를 넣은 매운 냄비요리와 고추를 넣지 않은 일본식 냄비요리로 두 종류가 있다.··· 복어 고기만을 먹고 싶은 사람은, 한국에서라면 복어 불고기 · 복어 수육도 먹을 수 있는데, 그 인기의 비결은 역시 한국화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에는 복어 요리는 일본에서 기원한 것이며 고추를 넣지 않은 것은 무조건 ‘일본식’이라는 그릇된 선입견과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복어 고기와 불고기와 수육이 일본식을 한국화했다는 단언에 이르면 그 정도는 더 심하다.

일본인의 단점이 곧 한국인의 단점
 예는 또 있다. ‘도다씨는 작년에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데, 한국 항공사가 발행하는 기내 잡지의 일본어 편집을 도와준 일이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경우,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거 비자를 가지고 있는데, 보수가 나오는 일을 하려면 결혼 비자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불법 취업을 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을 생각하면 어딘지 모르게 형평이 어긋나 있는 것 같다.’

 ‘어느 일본인 불법 취업자’라는 이 글에 등장하는 비교론적 오류는, 재일교포들이 일본 정부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도 참정권은 박탈된 채 살고 있다는 현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재일 한국인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는 사실에는 눈을 감고, 불법 취업으로 벌금을 낸 한 일본인 여성(귀화를 하지 않았으므로)의 사례를 마치 ‘과거’에 대한 한국인의 보복 심리로 보려는 구로다씨의 시각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일본인이 일본인 자신으 실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일본을 벗긴다》 (문학수첩)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을 쓴 가와사키 이치로시는 주 아르헨티나 대사 시절에 이 책(영어판을 먼저 출간, 원제는 《J메무 Unmasked》)을 써내 일본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고, 결국은 사표를 냈다. 이에 대해 《타임》은 ‘가와사키 이치로는 무엇보다도 가장 외교관답지 않은 죄, 즉 털어놓고 이야기했다는 죄 때문에 면직됐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외국의 유명 신문기사를 전재하는 것이 일본 국내의 판매 부수 향상에 가장 효과적이라면서 ‘일본의 이 줏대 없는 신뢰는 서양 것에 대한 맹신과 서양에 대한 열등 의식등 여러 가지 요소 때문이겠지만, 아울러 어린애같이 너무 유치한 정신 연령, 또는 정신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일본은 곧 ‘열두 살밖에 안된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로 그는 줄곧 외국에서 벌이는 일본인의 추태, 괴물로 변한 도쿄, 외국 것에 집착하는 소비 형태, 일본식 민주주의의 허점 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개인을 놓고 볼 때 일본인은 도덕적 비겁자다. 개혁 정신에 언제나 철저한 것도 아니고, 주위 여건과 쉽사리 타협하고 만다’라고 일본인을 평가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 그것은 바보 일본인의 단점을 지적한 이 글이 사실은 한국인의 단점과 너무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제목과 지은이를 모르는 채 읽는다면 곧바로 한국인의 치부에 대해 적은 글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인에 필요한 일본론은 무엇인가

 가와사키 이치로는 책의 맨 마지막 부분,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결론에서 일본의 장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일본은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에서도 정치적 지도력을 바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종적으로, 이념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현재의 일본은 그러한 거창한 임무에 적절하지 않다. 그러기보다는 계속해서 공업대국을 지향하고 좁은 섬나라 안에서 자기 국민의 생활 수준 향상과 복지 증진에 몰두할 것이다.’

 그는 일본이 막중한 정치 ·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기에는 인종적 · 이념적으로 걸맞지 않다고 단언한 것이다.

 이어령씨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나오기 이전, 일본에 대한 서양인의 책 가운데 단연 압권으로 꼽혔던 것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의 칼》이다. 그러나 저명한 인류문화학자인 베네딕트 여사가 일본에 단 한번도 가보지 않고 이책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국무부의 위촉을 받아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을 면담하고 관찰한 결과만을 토대로 해서 책을 썼다. 그래서 그런지 일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전체를 해치지는 않는다. 일본에 가지 않고도 ‘국화’와 ‘칼’을 대칭해낸 사실이라든지, 봉건제의 계급 질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은 점이야말로 그의 탁월성을 뒷받침한다.

 《국화와 칼》은 학문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좀더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부분적 체험은 전체적인 방법론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지금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일본론은, 허다한, 자기 멋대로의 기행문이나 그것에 준하는 저널리스틱한 일본 인상기가 결코 아니다. 또한 국수주의적이고 지나친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천착한 일본론이야 말로 일본을 바르게 아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마땅히 가져야 할 자부심일 수 있겠으나, 다른 민족에 대한 의도적 폄하와 오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제일주의가 되어서는 이미 그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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