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대중 소설 사이 '중간 지대' 열리는가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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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 무의미" 중류 소설 필요성 강조한 평론 나와

소설문학은 ‘오디세이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까. 좁은 해협에 잠복했다가 지나가는 배들을 침몰시키

는 움직이는 암초 실라와 카립디스, 오늘날에는 텔레비전·미국 NBA농구·뮤직 비디오 채널·할리우드 영화들로 그 이름을 대체할 수 있는 괴물의 협공을 피해 생명을 지속할 수 있을까.

 소설문학에서 순수·대중의 이분법은 아직도 유효할까. 소설문학이 온전한 소설로서 계속 존재하려면 이런 이분법은 이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이분법적 준거는 시대 변화에 따라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낡아버린 틀이 아닐까. 이제는 아무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혹은 <피네건의 경야> 같은 소설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도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설들은 대학 강의실이나 전문가 집단에서만, 일종의 강제적 요인에 의해 읽혀지고 논의될 뿐이다.

 계간 <소설과 사상>(고려원) 가을호는 바로 이같은 물음에 대해 모색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소설과 사상>은 ‘우리 소설의 새로운 환경'이라는 특집의 마지막으로 서울대 김성곤(영문학) ·조남현(국문학) 교수의 두 논문 ‘대중 문화와 소비 사회 : 중류 소설의 등장' '광고와 우리 소설의 명암'을 싣고 있다.

미국에선 30년전 나타난 현상
 김성곤 교수가 보기에, 많은 비평가들이 말하고 있듯 '모더니즘 시대에는 소수의 고급 문화 수호자들이 대중 문화와 분리된 엘리트들만을 위한 예술을 창출해 내고 또 소유할 수 있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 소비 사회에 오면 이제는 더 이상 문화적 귀족주의는 존재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또 예전에는 박물관과 도서관 혹은 미술관과 음악당에서만 보관되고 공연되던 고급 예술이 이제는

거리나 백화점에서 대중에게 공개되고 판매되고 있다. 한때 문화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고급 문화는 이제 돈만 있으면 어느 누구든지 소유 내지 향유가 가능하다. 이 점은 이미 60여 년 전 발터 벤야민이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품>에서 말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반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목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어떤 중요한 경계나 분리가 소멸된 것이며, 이는 과거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사이에 존재하던 구분이 사라진 데서 잘 찾아볼 수 있다'고 벤야민의 논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순수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혼란스러워진 현상, 미국의 경우 이미 60년대 초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 현상이 이제는 한국의 소설문학계 혹은 소설 시장에도 등장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도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걸쳐 '상업주의 문학'을 둘러만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기는 너무나 짧았고 오늘날의 폭발적 반향에 못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설문학계와 평론계는 그들의 고유한 책임을 더 이상 회피하기가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대해 '그것은 단순한 대중 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평가만으로는 이 소설이 4백만부씩이나 팔려나간 현상과 담고 있는 본질적 메시지를 설명하기에 미흡하다.

 이에 대해 김성곤 교수는 '중류 소설'이라고 하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의 분류 개념을 차용하자고 강조한다. 중류 소설이라는 개념은,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가 60년대 초 중류 소설(middle brow fiction)을 고급 소설과 하위 소설 사이에 새롭게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미국의 경우 에드거 앨런 포에서 시작된 중류 소설의 전통은 마크 트웨인과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거쳐, 최근의 리처드 브라우티건, 저지 코진스키, 레이먼드 카버에게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영국은 사무엘 리처드슨부터 시작해, 찰스 디킨스와 <보물섬>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  H.G.웰스,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 월리엄 골딩에 이르고 있다.

 국내 소설로는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가장 이상적인 중류 소설로 꼽는 김성곤 교수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김수경의 <자유종>을 이 범주로 묶고 있다. 문학 평론가 박덕규씨 역시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안정호의 <하얀 전쟁>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고원정의 <빙벽>을 중류 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보고 있다.

"소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필요"

 중류 소설의 전통을 확립해 나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 김성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고급 소설은 대학 강단에서 거리로 내려와 대중 문화와 영상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것은 곧 이 소비사회에서 소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소설만이 파편화된 사회에 총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종래의 엘리트주의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장르의 확산을 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원래부터 대중적 장르로 시작되었는데도, 고급 문화를 선호하는 모더니스트 비평가들에 의해 그동

안 부당하게 상아탑에 고립되어 있었고, 그 결과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므로 강력한 라이벌인 영상 매체와 경쟁하기 위해서 라도 소설은 이제 다시 대중의 손에 되돌려져야 한다. "

 김교수는 "진정한 중류 소설을 쓰는 일은 양쪽 극보다 더 어렵다. 중류 소설은 양쪽을 화해시키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언제나 양쪽에서 동시에 비난받을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류 소설 쓰는 일은 매우 적극적인 위치이면서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중류 소설 활성화야말로 소설문학의 상품화에 저항하는 적극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중류소설의 가면을 쓴 통속 소설이 더욱 범람하게 된다"라고 경고한다.

 김성곤 교수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중류 소설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면, 조남현 교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이를 시인하고 있다. 조교수는 그의 글에서 '이제 소설을 순수·대중, 고급·저급, 예술·통속으로 이분해서 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소설을 그냥 읽는 소설, 이해하는 소설, 소비하는 소설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때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삼분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조교수는 알베르트 클라인과 하인즈 헤커의 공저 <통속문학>에서 독자들을 오락적 가치를 추구하는 독자,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독자, 소비적 가치를 따라다니는 독자로 삼분한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조남현 교수는 "중류 소설의 이상 비대증이 결코 달갑지 않지만, 소설을 읽지 않는 것보다 중류 소설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차선책으로 삼분법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느덧 예술은 그것을 분류하는 권리를 소비자(독자)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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