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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삶을 속일지라도…

동.서독 출신 모두 이질감.생활 불안정에 곤혹…“그러나 후회는 없다"

베를린.김진웅 통신원 ㅣ 승인 1994.10.13(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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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9년 동.서독간 장벽을 제거한 통일의 기쁨 뒤에 동독 승용차 ‘트라비??를 몰던 많은 동독 출신 운전사들이 사고를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껏해야 40여 년간을 몰아온 그들에게는 보통 시속 2백㎞ 이상을 거뜬히 달리는 벤츠나 BMW 등 서독의 고급 승용차에 대한 속도 감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다라서 보통 몸에 익은 속도 감각으로 고속도로나 국도에 진입해 앞차를 추월하다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서독제 승용차에 받히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동독 출신 운전자들 속도감 잃고 사고 일쑤
  이 사례는 통일 이후 동독인들이 낯선 서독의 새로운 사회 체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정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빠르게 변화하는 '동적인 사회', 즉 경쟁 사회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된 동독인들의 앞으로의 생활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동.서독 간의 재결합은 이들 생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 왔을까. 그동안 ‘통일 고속도로'를 몇 년간 함께 달리고 있는 동.서독인들은 무엇을 느껴 왔을까. 양쪽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한결같은 변화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안정된 생활이 깨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통일 전에는 안정된 생활을 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한쪽은 사회주의, 다른 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독인들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지켜온 생활 관습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라졌다고 느낀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이 그들 생활에 침입자 내지는 방해물로 등장해서 생활의 균형이 깨졌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해야만 하는 동독인들의 고충은 서독인에 비해 더욱 크다. “매사에 부담감이 큽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들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지 못하는데도 그것을 반드시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전에 느꼈던 사회적 차원의 안정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동독 지역에 거주하는 한 시민의 하소연이다.

  동독 국민들은 ‘붉은 깃발??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는 단순한 심정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반적인 일상 생활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각자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전에는 국가가 해주던 일들을 이제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에 동독인들은 아직도 낯설고 불안하다.

  안정감 상실은 서로에 대한 불신감으로도 나타난다. 우연히 부딪친 여행객, 일상 생활에서 자주 접촉하는 상품판매원.상담원 등 낯선 외국인에 대한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가 점점 매서워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독일에 인접해 교류가 빈번한 폴란드.체코 등 동유럽 난민들에 대한 적대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 그래서 일부 극렬분자는 불쌍한 난민들을 상대로 그들의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살인.방화.테러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일부 독일 국민은 문을 굳게 닫고‘호시절??을 그리워한다.

  전에는 겪지 못했던, 시간에 쫓기는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동독이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한 주부는 자기들의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잠을 잡니다. 그리고는 새벽 세시에 일어납니다. 전에는 다른 가정과 어울려 자주 피크닉을 다녔는데 이제는 여유가 없습니다. 남들을 생각해주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사회주의 집단체제에서 모두가 없이 살았던 ??상대적 사회평등??은 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과 이웃들이 ??개별화????원자화??하고 있음을 이들은 아쉬워하고 있다. 이전에는 똑같은 빵을 먹던 이웃들이 지금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더 좋은 빵을 먹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한다.

  이와 같이 통일은 독일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 당시 함께 부둥켜안고 같은 게르만 민족으로서 뜨거운 핏줄을 확인했던 이들의 흥분이 가라않은 지 몇 년이 지난 현재, 동.서독 지역 주민 간에는 통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서독 지역 주민의 상당수는 통일이라는 잣대를 놓고 계산해서 ‘피해자??라고 느끼고 있다. 반면 동독인들은 아직도 산적해 있는 사회.경제 문제와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의 생활에서는 서독인보다 만족해하고 있는 편이다. 동독인들은 5명 중 4명이 자기들의 경제 상황이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도 서독인의 절반 이상이 비판적인 반면, 동독인들은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독인은 피해 의식, 동독인은 현실 만족
  통일 후 지속적인 침체 국면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독일 경제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의 경제는 크게 성장하고 있어 낙관론적인 사고를 갖는 데 큰 동기가 되었다. 지난 93년 독일 경제성장률은 최악인 마이너스 1.2%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를 동.서독 지역으로 나누어 분석하면 전혀 상반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서독 지역이 마이너스 1,9%를 기록한 반면, 동독 지역은 7.1%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독일 정부가 동독 지역을 집중 개발한 영향도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 동베를린을 비롯한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옛 동독의 주요 도시에서는 재개발붐이 한창이다. 필요한 자본은 대부분 서독 지역에서 유입되고 있다. 매년 1천5백억마르크씩이 서독인들의 주머니에서 못사는 형제들을 위해 동독 지역에 투입되고 있다. 95년 이후에는 투자액이 점차 줄어들 전망이지만, 앞으로도 15년 이상 동독인들을 돕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현실에 대해 서독인들의 불만은 크다. 게다가 동독으로 흘러가는 자본의 절반 정도는 투자라기 보다는 단순히 동독인들을 먹여 살리는 데 쓰이고 있다.

  통일 이후 동독 지역에서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승용차다. 89년 천명당 2백35대이던 자동차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지금은 2명당 1대꼴로 서독인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매년 약 35만대 이상씩 자동차가 늘어난 셈이다. 라이프치히의 경우 출퇴근 시간대에 서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심해진 교통 체증은, 그동안 자동차가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동독인들의 자동차 구매 붐에도 서독 자동차 회사들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동독인들이 비싼 서독제 자동차보다는 값싼 외국 승용차를 주로 사들였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자동차도 ‘동독 특수??에 힘입어 독일 자동차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심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93년 동독 지역에 수입된 상품은 2천6백51마르크에 달한 데 비해, 동독 기업이 서독 지역 또는 외국 시장에 수출한 상품 액수는 고작 5백27억마르크이다. 이처럼 수지가 맞지 않는 투자 아닌 투자에 서독인들은 넌더리를 낸다.
 
 ‘위대한 독일 재건??엔 암묵적 합의
  통일 총리로서 현재까지 동독 개발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왔다고 자부하는 콜 정부조차도 최근에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다. 최근 연속 실시된 주의회 선거 결과, 구동독 집권당의후신인 민사당이 동독 전역에서 급성장하여 어느 정당이든 민사당과 손을 잡지 않고는 정치를 하기가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먹여 살려준 은혜를 갚기는커녕 철저하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에 콜 정부는 분노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사민당이 민사당과 손잡을 움직임을 보이자 독일 정가에서는 한때 여야 간에 구시대적인 ‘독일판 빨갱이?? 공방전이 드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동독인을 대변하려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옌스 라이히의 출마 변이나, ??동독당??민사당의 급부상은 동.서독 간에 가로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말해주고 있다.

  장벽이 무너진 지 몇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독일 내부에는 이른바 통일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을 후회하는 독일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동.서독 지역 주민 가릴 것 없이 ‘위대한 조국 도이칠란트??를 재건하는 데는 암묵적인 합의를 한 상태이다. 동.서독의 통일이 그 기초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유럽 연합 축으로서의 역할과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전망이 밝은 점 등 대외적으로 볼 때 통일 독일의 위치는 크게 강화되고 있음이 뚜렷하다.

 베를린.金鎭雄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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