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종속 옷' 벗는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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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실정 반영한 ‘독도사랑' 한국등 국산 소프트웨어 속속 개발

 컴퓨터 칼럼니스트인 경희대 朴淳伯 교수는 최근 소련 방문길에 가슴이 뿌듯한 경험을 했다. 이번 소련 방문길에도 최근 유행하고 있는 노트북과 컴퓨터를 한대 가지고 갔는데. 이를 본 소련 사람들이 러시아어로도 사용이 가능한지를 물어온 것이다. 한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는 곧 국내에서 이미 보편화되다시피한 한글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인글‘한글'(이하 아래아 한글)의 외국어 지원기능에 러시아어도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러시아어 사용 시범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컴퓨터 분야에서 미국에 크게 뒤져 있는 소련에서는 아직도 컴퓨터로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의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한글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글워드프로세서에서 러시아어가 활용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박교수는“이 일이 있고 난 뒤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한글워드프로세서인‘아래아 한글'이 처음 세상에 선보였던 89년초 많은 사람들이 그 뛰어난 기능에 감탄했다. 더구나 이것을 개발한 사람들이 당시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재학중인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산 소프트웨어 분야의 발전을 선도해왔던 것이 우수한 대기업들이 아니라, 이들 대학 재학생들이나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프로그래머들이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아래아 한글'은 젊은 프로그래머들의 치열한 모색의 결과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계기가 되었다.

 컴퓨터를 운용하는 다양한 기술을 의미하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사회의 핵심 분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은 정부의 무관심,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해온 대기업들의 무사안일주의, 무단복제가 횡행하는 문화적 풍토 때문에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해왔다. 이런 척박한 풍토에서 국산 소프트웨어 산업이 명맥을 이어온 데에는‘한국형 소프트웨어 개발??의 집념을 불태워온 몇몇 선구적인 젊은 프로그래머들의 공헌이 컸다. 이들의 대부분은 10대나 20대초에 우연히 컴퓨터를 시작했다가 결국 직업 프로그래머로 나선 사람들이다. 그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주는 지적 만족뿐 아니라 한국적인 컴퓨터 문화를 정립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별빛컴퓨팅' 대표 黃崙午씨는??현재 활약하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대부분은 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이어진 8비트 애플컴퓨터 시절에 컴퓨터와 친숙해져, 80년대 중반 이후의 16비트 IBM컴퓨터 시절에 두각을 나타낸 개인용 컴퓨터 1세대들??이라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8비트 시절에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하드웨어에서는 뒤졌지만 소프트웨어에서는 따라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IBM에서 16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자신감은 앞으로 잘못하면 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에 완전히 종속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위기감이 당시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전공을 포기하고 국산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리게 했다는 것이다.

‘종속 위기감'에 전공 포기하고 투신
 한국적인 컴퓨터 문화의 정립을 위한 첫번째 관문은 기분적으로 영어문화권에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컴퓨터에서 한글로 다양한 문서작성이 가능하도록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글워드프로세서의 개발이다. 따라서 8비트 시절부터 많은 젊은 프로그래머들이 한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이들 중 외국의 워드프로세서에 한글을 짜맞추는 방식이 아니고 한글의 원리에 충실한 워드프로세서를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캐나다 출신 교포 유학생들인 康泰鎭씨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강씨는 대학을 졸업한 지난 82년 잠시 국내에 들어와 생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애플컴퓨터에 적당히 사용할 만한 한글워드프로세서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캐나다로 돌아가자 곧 동료들과 함께 한글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착수, 83년에는‘한글프로세서Ⅲ??을 개발하는데 성공하데 된다. 이어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한컴퓨터연구소를 설립, 국내 진출을 시도했지만 당시 불법복사가 판을 치던 국내 현실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그는 88년‘한글2000'이라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를 개발, 재도전에 나서게 된다. 한글2000이 나오기 전 국내에는 삼보에서 개발한 보석글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었고, 다른 대기업에서도 각각 한두개의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개발한 워드프로세서는 대부분 외국의 워드프로세서에 한글을 짜맞춘 것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하드웨어의 기종이 다르면 서로 사용할 수도 없게 되어 있는 등 이러저러한 제약이 많았다.

 이에 비해 한글2000은 기본적으로 한글의 구성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졌고 하드웨어 기종에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 당사로서는 획기적인 기능들을 거지고 있으면서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었기 때문에 일반 사용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한글2000의 경우 버그현상(사용설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프로그램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현상)이 자주 발생해 사용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李燦振씨(현재 한글과 컴퓨터 대표)는 당시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막 졸업한 상태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 우리나라에도 개인용 컴퓨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대학 진학 후에는 학생서클인 '서울대 컴퓨터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컴퓨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그도 다른 컴퓨터 사용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대기업 워드프로세서에 대해 여러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글2000이 발표되면서 많은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결함에 대한 개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서클 후배들과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 만들어보자"며 이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직업이 된다
 이들이 개발한‘아래아 한글'은 89년 4월 발표된 이후 그 뛰어난 기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당시 국내에서 가장 많이 쓰이던 워드프로세서에서 삼보 보석글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일약 정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아래아 한글'의 성공은 국산 소프트웨어도 시장에서 상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과 소프트웨어 개발이 하나의 직업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컴퓨터에서 한글구현의 또다른 문제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한글화해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것이 컴퓨터 본체에‘한글카드'라는 일종의 하드웨어를 부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주로 대기업에서 판매하던 한글카드는 값이 비싸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바로 이런 시절, 이름 그대로 도깨비처럼 나타나 일반 사용자들이 금전적 부담없이 한글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한글도깨비'라는 한글지원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崔喆龍씨(현재 한도컴퓨터 대표)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최씨는 대학 3학년 때 컴퓨터 관련 강의를 수강한 것이 인연이 돼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대학졸업 후 모 컴퓨터 전문지 기자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컴퓨터에서 한글을 띄우는 방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그 결실로??한글도깨비??라는 한글지원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된 것이다.

 한편 지난해에는 서울대 법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성수씨(현재 한메소프트 대표)에 의해‘한메한글'이라는 새로운 한글지원용 소프트웨어가 개발되기도 했다.

 ‘자료관리' 프로그램 개발, 미국에 도전 
 앞에 언급한 사람들이 국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기본 토대를 세운 경우라면 한국데이타베이스사의 金尙得씨는 우리나라 기업현실에 맞는 자료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해 미국의 소프트웨어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분야의 시장을 역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는 경우이다. 그는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들이 20대에 컴퓨터를 시작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나이인 30대 후반에 처음 컴퓨터를 시작해 이 분야에서는‘의지의 한국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모 기업체의 경리 회계 분야에서 10여년간 직장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직장생활 도중 회사에 전산실이 생겨 그 책임을 맡게 된 것이 인연이 돼 컴퓨터를 처음 접한 이후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의 자료관리 프로그램은 기능면에서 외국의 유수한 프로그램들을 능가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 기업의 업무현장을 최대한 배려해 만들었다는 장점이 있어 현재 사용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이밖에 최근에는 업무용뿐 아니라 일반 개인용 컴퓨터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프트웨어도 다양한 형태로 시장에 나타나고 있다. 워드프로세서 분야에서‘아래아 한글??에 시장주도권을 빼앗긴 바 있는 한컴퓨터연구소는 90년초에 기존 문서편집 위주의 워드프로세서의 개념을 한 단계 뛰어넘어 글뿐만 아니라 그림과 사진까지 자유자재로 편집되어 가능한 그래픽 워드프로세서??쪽박사??와??사임당??이라는 제품을 차례로 시장에 내놓았다.

 개인의 일정관리나 고객관리 또는 도서관리용 소프트웨어도 속속 등장하여 컴퓨터를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다. 개인 일정관리 시스템으로는 올해초 선을 보여 상당한 호응을 받은 바 있는 한국인월드(대표 宋明浩)의 ‘미쓰노트'를 들 수 있다. 최근 한국인월드는 한글한자지원카드인 '독도사랑'을 발표했는데 판매대금의 10%를 '독도시랑회'(회장 서유석)에 기부하기로 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또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별빛도사'라는 프로그램을 발표한 바 있는 별빛컴퓨팅에서는 개인의 일정관리.시간.관리.도서관리용 프로그램을 각각 '까치' '좋은날' '책꽂이'이라는 이름으로 발표, 시장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와 같이 국산 소프트웨어 시장은 몇몇 선구적인 젊은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기존의 주문형 생산(사용자의 주문을 받아 그 용도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것)에서 일반 컴퓨터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는 패키지 생산 형태로 그 영역을 확대해가는 등 새롭게 발전해가고 있지만 미래가 반드시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프로그램 무단 복제  자제 절실
 특히 아직도 소프트웨어를 돈 주고 사야 할 상품으로 보려하지 않는 일반 사용자들의 관행은 이제 옛날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아니고 각각 조그만 회사를 운영하는 청년 사업가로 기반을 다지려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한글과 컴퓨터' 대표 이찬진씨는 "학생시절에는 무단복제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16명의 직원이 프로그램 판매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불법복사는 회사운영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래아 한글'을 처음 판매할 때 프로그램 서두에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발전을 위해 무단복제를 자제해줄 것??을 호소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래도 학생들이나 일반 사용자들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지만??어느 정도 규모 이상되는 기업체에서도 불법 복사된 프로그램을 버젓이 사용하는 일은 납득허기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국내 여건도 문제지만 앞으로 더욱 큰 문제는 지난7월 유통시장 개방 이후 국내시장진출을 서두르고 있는 외국의 대형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위협이다.

이미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웨어사가 한국에 현지 법인을 세워‘한국윈도우즈3.0'이라는 제품을 발표해 시장공략에 나섰고, 내년에는 세계적인 워드프로세서 제조회사인 미국의 워드프로세서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당분간은 한글이라는 언어장벽 때문에 고전을 하겠지만 앞으로 프로그램 제작단계에서 한국인 고용 등의 방법을 통해 언어장벽을 극복하게 되면 그나마도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국산 소프트웨어 산업에 커다란 타격을 줄 수도 있다.

 소프트웨어는 한 나라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한다. 소프트웨어 자체가 각각의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업무형태나 생활관습에 입각해 그것을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때문이다. 따라서 소프트웨어 시장이 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에 종속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문화적 종속을 초래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국산 소프트웨어 산업의 발전에 더욱 많은 애정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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