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로 무장하는 농촌의 분노
  • 김종환 사회부차장 ()
  • 승인 1990.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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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에 번지는 ‘생명운동’…“미국 농산물엔 농약 많다”

 농업보호정책 철폐와 농산물 수입자유화를 통해 한국 농업을 외국과의 경쟁에 알몸으로 노출시키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 단계에 와 있어 농민들의 불안과 반대운동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외국산 농산물 수입에 반대하면서도 불가피하게 개방할 경우에 대비, 농촌의 활로 개척에 힘쓰는 목회자가 있다.

 주인공은 올해 34세의 南相道목사.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와 국도를 따라 20분쯤 달리면 닿는 전남 장성군 남면 마령리 백운교회가 그의 일터다. 도시풍의 2층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면 왼쪽 담을 따라 감나무 몇그루가 서있고 그 주변의 그물 울타리 안에서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다. 8월18일 장성댐에서 열린 장성군 농민단합대회에 갔다 오는 길이라는 남목사는 1백80cm의 키에 허름한 남방셔츠차림이었다. 4백여명이 모인 그 행사는 3년째 해오는 것이지만 우루과이 라운드 저지 투쟁을 위한 단합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농민들이 현실 속에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외국 농산물 수입을 막음과 동시에 우리 농산물의 품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일본의 경우, 유기농법이 우리보다 20년 앞서 있다. 수입개방을 했으나 미국에서 수출품에 농약을 많이 쓰므로 소비자는 당연히 국산품을 쓴다. 우리도 수입개방시대에 저농약·저공해 농산물로 대응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남목사는 남면을 무공해 생산지역으로 만들고 있는 ‘생명운동’의 주창자이다. 그는 스스로 교회 마당에 닭을 놓아 기른다. 지난 4월 양계장에서 부화된 지 24시간이 안된 병아리를 항생제 한번 맞지 않은 상태로 구입해 와서 교회 마당과 원하는 과수원에 1천4백마리를 방사했다. 먹이는 배합사료를 쓰지 않고 발효시킨 톱밥을 하루에 한번씩 주고 있다. 닭들은 과수원의 해충을 포함한 벌레를 잡아먹고, 운동량이 많아 육질이 좋아지며 배설물은 거름이 되어 지력을 높인다.

 

87년엔 수세거부운동 주도

 농촌생명운동은 단순한 돈벌이나 지역농민만 잘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생명운동단체들과 달리 ‘정의운동’을 앞세운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것은 “외세와 독재에 의해 빼앗긴 농민의 권리와 땀의 대가를 찾고자 민족·민중단체와 연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남목사는 밝힌다. “양심껏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세상이 신이 원하는 세상이다. 그것을 만들기 위해 교회가 있고 그 일을 위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조직적인 운동을 위해 그는 지난 3월 무공해농업에 뜻을 같이하는 농민 65세대와 ‘남면한마음공동체’를 구성했다. 여기서 생산한 딸기를 맛본 대학 은사 부인의 주도로 광주 백운동 현대아파트 주민 60세대가 5월28일 소비자 한마음공동체를 구성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소비자들의 주문을 받아 다음날 오전 배달해준다. 현재 취급하는 농산품은 닭고기, 무공해 사과, 채소, 꿀과 매실엑기스 등 일부 건강식품으로 한정되어 있다.

 호남신학대 졸업반이던 84년 전도사로 백운교회에 부임한 그가 농민운동에 뜻을 쏟게 된 것은 86년 가을의 배추파동 때문이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논두렁 밭두렁을 타고 다니며 지문도 없는 농민의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성도님 농사 위에 축복을 주시사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풍작의 축복은 내렸으나 값이 폭락하고 말았다.

 그는 이에 분노하여 “농촌교회는 농민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농민운동을 해야 한다”고 결심한 후 전남기독교농민회와 관계를 맺고 농민교육과 현장실습에 빠짐없이 나갔다. 그러면서 백운교회의 관할구역인 남면 마령리 덕산리 평산리 일대 7개 자연부락 4백50여호 1천7백여 주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우선 매년 면에서 일방적으로 할당하는 적십자회비에 저항감이 많은 것을 알고 항의하기로 여론을 모았다. 주민 20여명이 관에 항의서를 내자 경찰관과 면직원이 농민교육 참가자와 항의에 가담한 사람만 골라서 산림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자 경찰이 사과하고 적십자본부에서는 가호당 3만원 상당의 물품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남목사는 주민에게 “수십년 동안 순진하게 말 한마디 없이 적십자회비를 낼 때에는 관심조차 없다가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많은 혜택을 주니 ‘우는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이 맞다”고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법령에도 없이 주민에게 떠맡겨진 도로수선비 ‘자갈대’도 투쟁하여 없애 버렸다.

 한때 전국을 휩쓴 수세거부운동도 백운교회가 주도했다. 86년 장성군에 부과된 연간 6억원의 수세 가운데 남면에 배정된 것이 2억원이었다. 이는 남면의 그해 수매액 20억원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로 농민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87년부터 시작한 수세폐지운동은 89년 수세 5%인하를 가져왔다. 또 조합원 직선에 의해 대의원회를 구성하고 그동안 퇴직관료들이 차지해온 조합장을 조합원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는 성과를 낳았다.

 89년 6월28일 농민운동 출신으로 영산강농지개량조합 조합장에 선출된 朴錦署씨는 “남목사의 열성적인 계도로, 농민들은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을 떨치고 부당한 정부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남목사는 56년 2월 전남 목포에서 출생, 그곳에서 공업고등학교를 나왔다. 핸드볼선수였던 고교시절 우연히 교회끼리의 운동시합에 ‘부정선수’로 뛰었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78년 육군에 입대, 동부전선에서 근무한 그는 제대 후 81년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대에 입학했다.

 백운교회에 와서 3년 뒤 신도들의 신임을 얻은 다음부터 교회문화에 전통 농촌문화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교회의식에 북 장구 징 꽹과리 등 우리 전통 악기를 동원했다. 징소리와 함께 예배를 시작하고 찬송가 반주에 피아노 대신 북과 장구를 사용했다. 또 정월대보름에는 지신밟기, 가을에는 추수감사절 등의 행사를 전통의식으로 치렀다.

 몇년전 사회발전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남목사를 알게 돼 한마음공동체 트럭 구립자금을 지원하기도한 숭실대 기독교사회연구소장 李三悅교수(철학)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명감이 투철하고 전통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프로그램을 갖고 농촌문제에 뛰어들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보통 그런 운동을 하면 목회자의 본분을 떠나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운데 기독교 선교와 사회운동을 동시에 해내는 실천력이 있다. 하지만 사회문제와 농촌경제에 대해 좀더 체계적인 이론이 필요한 것 같다.”

 일반 주민 사이에서도 남목사에 대한 신임은 두텁다. 지난 88년 1월 교회건물 기공식때는 엄동설한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삽 곡괭이 쌀가마 김치독 등을 들고 모여서 교인만으로는 사흘 걸릴 기초공사를 하루만에 끝냈다고 한다. 건평 1백20평의 2층교회는 5개월만에 준공되었다. 1층의 교육관 광주지역 단체의 모임과 교육활동에 개방되어 있다. 교육관 입구 벽에 붙어 있는 직업선택의 십계가 인상적이다. “월급 적은 곳을 택하라”에서 시작하여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로 끝나는 십계는 경남 거창고교 채플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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