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보도 위한 두려운 고백
  • 편집국 ()
  • 승인 1994.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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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의 전환에 대응하고 방향 제시한 ‘기사 10선‘

지난 5년 동안 <시사저널> 보도가 성취한 것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일은 두렵다. 우리는 완성된 미래를 지향하면서 채찍질로 삼기 위해 이 두려운 성적표를 독자 앞에 제시한다. 당대 역사와 현실의 전환 속에서 <시사저널>의 기사들이 어떻게 그 전환에 대응했고 방향을 제시했는가를 이 기사들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실을 사실로 제시함으로써만, 비로소 그 안에서 미래를 위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이 점검 결과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같은 성취를 통해서 더욱 열과 성을 다하여 취재보도와 진실 확인, 그리고 바른 방향 제시의 길을 열어나가려 한다.<편집자>

‘보도 주권’ 과감히 행사
평양 함락 ‘작전계획 5027’
93년12월30일자(제218호)

 정전협정 시대의 국민들에게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전쟁의 모습과 거기에 관련된 정치.군사적 전략의 실체를 알린다는 것은 민족 운명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대한 보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었다. 정치.군사적 주권이 온전치 못한 시대에 언론만이 홀로 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전쟁에 관한 모든 보도는 여전히 ‘늑대의 우화’에 머물러 있었고, 국내 정치 권력과 미국 군산(軍産) 복합체의 이해 관계는 그 우화의 그늘에 서식하고 있었다.

 <시사저널>은 전쟁 발발시 한.미연합사의 평양 점령을 골자로 한 북한 수복에 관한 작전계획(OPLAN 5027)을 확인해 보도함으로써 전쟁 계획에 관한 전면적 진실을 최초로 국민 앞에 공개했다. 여기에 관련된 후속 보도는 그 후 네 차례를 거듭하며 확대 심화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 이 보도는 군산 복합체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던 국내외 언론에 심대한 파문과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뉴욕 타임스>는 94년 2월1일자 1면 기사에서 이 작전계획의 골자를 보도했고, 다음날부터 국내 모든 언론도 이를 인용한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어 이병태 국방부장관은 94년 3월23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그같은 전쟁 수행 계획 내용을 공식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시사저널>이 보도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국민 앞에 공개한 진실은 ‘서울 불바다’에 맞서는 ‘평양 불바다’의 비극적 실체였다.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런 비극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에 대한 인식을 국민 전체가 공유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을 넘어설 수 있다.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으며, 더구나 강대국의 전쟁 의지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동족 간의 전쟁은 원치 않는다는 것, 그것이 이 기사의 결론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 방안 제시
북, 핵 포기 대가로 미국 원전 기술 요구
93년 7월15일자(제194호)

 핵 투명성 확보를 전제로 북한에 경수로형 원자로를 지원하는 문제는 현재 미.북한 고위급회담을 비롯해, 북한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최대 현안으로 떠올라 있다. 모델 선정을 놓고 관련 당사국들 간에 협상과 논란이 거듭되어 왔지만 경수로 지원이 핵문제 해결에 필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상태이다.

 경수로 문제가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제네바에서 열린 미.북한 고위급 2차 회담부터이다. 그러나 <시사저널>은 이보다 한발짝 앞선 6월 뉴욕에서 열린 1차 고위급 회담 직후, 경수로 지원 문제가 북한 핵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대한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과 그 배경을 심층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시사저널>의 보도는 6월의 1차 고위급 회담에서 이미 북한측 대표가 경수로 지원 문제를 미국측에 비공개로 요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데 기초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시사저널>은 북한 지도부가 핵 카드를 통해 실질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경수로라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또 이 문제는 앞으로 핵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최대 현안으로 떠오를 것이며, 미국측도 북한 핵의 투명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적극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우리도 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시사저널>의 이러한 보도와 견해는, 북한이 지난해 3월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전격 탈퇴한 의도와 배경을 핵 무기 개발과 미국측의 무력 보복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분석한 당시 국내외 언론의 보도 경향에서 보면 이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보도가 나간 1주일쯤 뒤 제네바에서 열린 미.북한 2차 고위급 회담에서부터 이 문제는 전면에 떠올랐다. 북한 핵문제는 경수로를 중심으로 해결 방향을 잡아간 것이다. 핵 위협과 보복 위협만이 교차하던 상황에서 경수로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유일한 해결 방안이었던 셈이다.

‘보도자료 저널리즘’ 극복
한국 기업, 북한에 전략물자 몰래 공급
93년 3월25일자(제178호)

 남북한간 경제 협력의 뒷면에 감추어진 어두운 실상은 국내 언론의 인기 품목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사저널>은, 통일 문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준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남북 경협에 계속 주목해 왔다.

 국내 유력 기업들이 제3국을 통해 북한에 석유와 쌀을 공급해 왔다는 이 특집 기사는, <시사저널>이 꾸준히 보도해온 북한 경제, 특히 에너지와 식량 문제에 관한 일련의 기사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기사는 국내외에 많은 파장을 몰고 왔다. 우선 미국AP통신, 영국 로이터 통신 그리고 일본의 주요 언론이 이 보도를 인용 보도했고, 국내 언론들은 이를 재인용했다. 검찰은 관련 기업들에 대한 내사를 단행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략 물자를 제3국을 통해 북한에 수출할 경우 국가보안법 외에는 달리 제재할 수단이 없으며,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통일원은 이 기사를 계기로 해서 대북 무역의 실상과 관련한 법규의 허점에 주목하게 됐다. 북한과 무역하던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법의 약점을 악용해 전략물자를 북한으로 반출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에 남보다 먼저 진출하려고 과당 경쟁을 벌이던 관련 업계에서도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 결과 국내 기업들이 북한에 수출하는 상품 목록 가운데서 석유.쌀과 같은 전략 물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 기사가 이룩한 더욱 큰 성과는 국내 언론, 특히 경제부가 기사의 가장 큰 폐해라고 할 수 있는 ‘보도자료 저널리즘’을 극복하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기자가 정부에서 내놓는 보도자료에 의존하는 폐해는 기자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경제 보도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행정 편의상 나누어진 정부 부처의 업무 구분이 신문 지면에 그대로 나타나는 실정이다. 이 기사는 미국의 외교관과 싱가포르 석유시장 전문가들을 포함한 해외 취재망을 적절히 활용하고, 관련 자료를 축적하면서 종합적으로 취재한 과정에서 탄생했다.

‘평가 저널리즘’최초 도입
의정활동 평가, 이해찬 1위
91년11월21일자(제108호)

 언론의 기능은 객관적 보도에 그치지 않는다. <시사저널>은 국내 최초로 국회의원 의정 활동을 객관적 잣대로 평가함으로써 ‘평가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다.

 13대 국회가 막을 내리기 몇달 전에 실시한 국회의원 성적 매기기 작업은, 국회의원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의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국민 대부분은 의원 개개인이 뿌리는 홍보물이나 매스컴을 통한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대변자를 선택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의정 활동 평가는 동료 의원들에 의해 이뤄졌다. 의정 활동 내용은 누구보다도 국회의원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전제에서였다. 김광웅(서울대 행정대학원장) 김학수(서강대.신문방송학) 교수팀이 참여한 이 조사는 국회 본회의, 삼임위, 국정감사 활동에서의 공정성.논리성.성실성.전문성 평가와 법안 제출 및 예결 특위활동 등 22개 분야에 걸쳐 실시됐다. 조사 결과 당시 무소속이던 이해찬 의원(서울 관악 을)이 종합 지목 빈도 38회로 단연 수위를 차지했다. 그밖에 김대중 조세형 이 철 이철용 노무현 조순승 의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시사저널>의 의정 활동 평가 보도는 정치권은 물론 일반 국민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은 대부분 ‘유익하고 의미있는 기획’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적지 않은 의원들이 “이제 직접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니 의정 활동을 소홀히 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 <시사저널>과 조사팀은 한동안 ‘날려버리겠다’ 등 점수가 낮게 나온 의원측으로부터 온 듯 한 익명의 전화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 국회의원 성적표는 몇 달 뒤 각 당의 14대 총선 후보 공천에 영향을 미쳤고, 선거 기간에는 전국 각지에서 <시사저널>의 본의와는 상관 없이 평가 성적에 따라 후보 자신의 홍보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공격하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3년 공들인 종합병원 성적표
한국 병원 베스트 10
94년3월(제230~233호)

 환자는 병원에 고통을 호소할 수 있을 뿐 병원의 수준과 성실성을 검증할 수 없다. 병원이 자신의 수준과 치병 능력을 스스로 객관화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국.공립 병원을 관장해야 하는 정부 역시 병원 수준을 평가하기를 주저해 왔다. 그러므로 병원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공표하는 일은 언론 매체의 공적 사명이자 몫으로 돌아왔다. 4회 분재된 ‘한국 병원 베스트 10’은 한국 의료계에 반성과 개선의 목표를 제시했고, 의료 소비자인 국민에게는 병원을 선택할 지표를 제시했다.

 의료진의 우수성과 첨단기기 성능, 환자 만족도 등 세 부문의 주평가 항목을 들이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전국 42개 종합병원의 순위를 매긴 이 조사 결과로, 전국 병원의 수준과 성실도가 명료하게 드러났다. 또 암.고혈압.당뇨 등 3대 성인병에 대한 베스트 클리닉 분석을 병행함으로써, 의료 서비스 소비자인 일반에게 선택할 폭을 넓혀 주었다.

 이 기획 특집물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기사화까지 장장 3년이 소요되었다.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등 2년6개월에 걸친 기획 단계에서는 여러 이유를 내세운 의학계의 반발이 거셌다. 한국에서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라거나, 인술의 상품화를 부채질한다는 등 냉소적인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시사저널>은 조사의 객관성과 평가의 공정성을 유지한다는 원칙 아래 우선 권위 있는 전문 의료인 16인으로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평가 기준을 마련한 뒤, 조사 전문 기관인 코리아 리서치와 6개월에 걸쳐 공동 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병원 평가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조사 보도는 병원이라는 특수 전문 조직도 공적 평가의 대상이 될 때 의료 수준이 향상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매국노 재산환수법’ 제정 촉구
이완용 증손 “유산 수천만평 되찾겠다”
92년 8월27일자(제148호)

 92년 8월 <시사저널>은 한 연쇄 소송 사건을 추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특별법 입법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기사를 실었다.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전국 각지에 사놓았다가 유실한 땅을 되찾기 위하여 직계 증손(이윤형)이 연쇄 소송을 벌이고 있는 사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 후예들의 현주소’를 기획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부터 들은 ‘소문’ 한 자락이 취재의 실마리였다. 취재진은 6개월에 걸쳐 법원.등기소 등에서 이완용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 명부를 샅샅이 뒤져냈고, 이완용의 증손 이윤현씨를 직접 면담해 ‘증조부 명예 회복을 위해 땅을 되찾겠다’는 소송 이유를 확인했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마자 광복회.독립유공자 유족회.미주지역 한인회 등 국내외 독립 유공단체 주도로 ‘이완용 재산 몰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백만 서명운동’이 펼쳐졌다.

 일곱 차례에 걸친 후속 보도가 계속되는 동안 서명 운동을 마친 단체들이 그 명부를 국회에 제출하자, 여야 의원 20명이 주축이 되어 ‘이완용 재산 환수 의원 모임’을 구성했다. <시사저널>은 이 과정에서 후속 보도를 통해 이완용 명의로 있는 재산의 상세한 처리 실태를 세상에 알림과 동시에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93년 봄부터 재산 환수 의원 모임은 이 문제를 국회 전체로 확대해 여야 의원 1백86명으로 구성된 법안소위원회를 가동했다. ‘민족정통성 회복 특별법’이라는 이름의 이 법안은 올해 8월 국회 법사위원회에 상정되어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기사는 정부 수립 당시 반민특위가 좌절된 뒤 민족 정통성을 회복하고 과거를 정리하려는 힘겨운 노력의 서장을 열었다.

‘반쪽 독립운동사’ 보완
민족통합의 노래 ‘김 산의 아리랑’
93년9월30일.10월7일자 합병호(제205.206호)

 한국 독립운동사는 주로 복벽주의와 공화주의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기록된 역사에서 제외된 것은 분단시대의 한계였다. 시대가 불구이듯이 역사도 불구였다. 93년9월30일자<시사저널>제205호에서 金 山의 생애를 발굴 보도한 것은 그같은 불구의 역사를 보완하려는 노력이었다. 30년대 초 님 웨일스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중국 공산당 장정의 마지막 은거지였던 연안의 한 동굴에서 33년 생애를 불꽃처럼 산 김 산의 생애를 구술받아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41년 출판했다.

 김 산과 더불어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분단된 조국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다른 계열로 분류되어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 연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더듬기 시작했고, 그 학문적 성과는 많은 논문과 단행본으로 나타났다. <시사저널>은 북경.연변.일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연구의 성과들을 모아 소개했고, 이 과정에서 김 산이 옥중에서 남긴 시를 발굴해 처음 공개했다.

 김 산에 대한 기사는, 민족해방운동에 누락된 수많은 독립혁명가들을 본격 연구해야 함을 국민에게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약의 땅 잠입…문충일씨 생환
쿤사 마약왕국 1천㎞ 횡단
94년 2월10일.2월17일자 합병호(제224.225호)

 마약 군벌 쿤사가 지배하는 태국.미얀마.라오스 접경지(일명 골든 트라이앵글)에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시사저널> 취재진이 발을 들여놓은 것은 93년 2월이었다. 마약 생산.공급 실태를 현지에서 직접 확인하고 한국으로 공급되는 루트를 추적해 보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한국 언론의 취재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취재진은 쿤사 군대와 미얀마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약 생산 현장을 취재하던 중 쿤사 지역에서 한국계 교포인 문충일씨 일가족과 맞닥뜨렸다. 취재진은 접촉하기를 꺼리는 문씨 가족을 만나 문씨 부인 이순선씨의 신상만 확인한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문씨 일가족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 문씨 일가족의 존재를 국내에 처음 알린 시발점인 동시에 그들의 쿤사 지역 탈출기가 기록되기 시작한 발단이었다.

 보도 직후 쿤사 진영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은 문씨 일가족은 즉시 쿤사 지역을 탈출해 방콕에 은신처를 마련했고, 이 소식을 들은 취재진은 급히 방콕으로 날아가 피신중인 문씨를 만나 후속 보도를 함으로써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아홉 번에 걸친 구명 촉구 보도, 인권운동단체.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여론 환기, 관련 정부 부처 및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과의 연이은 접촉 등 구명 운동 과정은 한마디로 취재원 보호라는 언론 윤리의 시험대나 마찬가지였다.

 유엔으로부터 난민 판정을 받고 8월12일 한국 땅을 밟은 문씨 가족은 경기도 미금시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인천 북구청 세금 비리 ‘예고’
어느 구청장의 고백
93년 7월15일.94년 1월6일자(제194.219호)

 사회적 공모 구조 속의 비리가 불거져 나오기는 어렵다. 더욱이 ‘공직자의 고백’이라는 형식의 기사로 비리가 드러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시사저널>에 실린 이 ‘고백록’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구청장은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관내 공무원들이 지역 유지들과 결탁해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같은 부패의 고리를 차단하려 하자 기득권 세력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고 밝혔다.

 기사가 나간 뒤 인천시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익명으로 나갔지만 워낙 지역내 사정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어 금세 누군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에 사실을 고백한 사람은 당시 인천시 북구청장 이용기씨였다. 이씨는 그 뒤 곧바로 인천시 감사실장 재직 당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그리고 재산 공개과정에서 부인 명의로 무연고지에 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권고사직 당했다.

 <시사저널>은 다시 94년 1월6일자 커버 스토리에서 이씨가 구청장에 취임해 사직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다. <시사저널>은 이 기사에서, 이씨의 혐의가 과장됐으며, 만약 이씨를 털어 먼지가 안나왔더라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언론들은 이씨가 깨끗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으나 <시사저널>은 자기 지역의 부패상을 밝히는 현직 구청장의 고백 속에 경청할 만한 진실이 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8개월 여가 지난 94년 9월 인천시 북구청의 부패상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국민의 세금을 훔친 북구청 세무 공무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그들이 지역 유지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도 밝혀졌다.

 <시사저널>은 밝혀진 사실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믿는다. 인터뷰 당시 이씨는 북구청 비리의 첫째는 건축이요, 둘째는 위생이며, 셋째가 세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내부 고발자를 박해하고 고립시켜 마침내 추방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오랜 관행 속에서 부패는 일상화해 가고 있다. <시사저널>은 이같이 일상화한 부패의 탈을 벗기는 일에 취재력을 모아나갈 것이다.

X세대 통해 21세기 비전 발견
X세대,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94년 5월5일자(제236호)

 변화의 물결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다가왔다. 삽시간에 다가와 종아리를 적시는 밀물처럼, 새 흐름의 진군을 깨닫지 못했지만 눈 떠보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아마도 지수상에 최초로 출현한 것이 틀림없는, 기왕의 어느 세대와도 닮지 않은 특질을 보여주는 X세대의 출현도 마찬가지였다.

 특집 기사 'X세대,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어느 사이엔가 우리 사회 현상에서 또 하나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X세대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기술한 최초의 기사였다. 이 특집 기사가 나가기 이전만 해도, 일본의 ’신인류‘나 미국의 ’뉴 제너레이션‘처럼 막연하게 ’신세대‘로 지칭되던 새로운 세대는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비로소 ’X세대’라는 명확한 명칭과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 특집 기사는 X세대라는 말이 쓰이게 된 역사 배경부터, 과연 X세대는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광고 시장의 판촉을 위한 일시적 유행어에 불과한 것인가, X세대가 갖는 특질은 무엇이고, 사회학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14쪽을 할애해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 결과 모든 매스미디어를 통해 X세대라는 단어가 확산되는 현상이 이루어졌다. 그 여파로 연합통신 <코리아 타임스><문화일보><중앙일보>등이 <시사저널>의 기사를 직.간접으로 인용하면서, X세대를 조명하는 장기 시리즈물을 연재하기도 했다.

 기성 사회는 그들이 신세대의 행태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신세대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하며 그들의 꿈과 열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이 기사는 일깨웠다.

 <시사저널>의 X세대 특집 기사는 한 세대 및 세태에 대한 단순한 조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학적 관점에서 21세기의 비전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사저널>의 사시에 부응한 기사였다. 세대간의 단절을 강조하기보다 서로 다른 세대 간의 이해와 조화의 길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 <시사저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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