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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존재 보듬은 성숙한 목소리

양희은 23년 만에 첫 솔로 콘서트 … 팝과 트롯 명에 벗고 독자적인 음악 언어 실현

강헌 (음악 평론가) ㅣ 승인 1994.11.24(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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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반에서 8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파란과 굴곡의 시기에, 불타는 젊음의 연대기를 상아탑에 아로새긴 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은 무엇일까. 어느덧 슬퍼할 겨를도 없는 꿀벌이 되어 버린 이 세대는, 문화적 식민성을 완벽하게 청산하지 못한 앞 세대와 컴퓨터와 함께 민족의 영역을 숨가쁘게 벗어나고 있는 아래 세대 사이에서 협공에 걸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야구 주자와 같다.

 90년대의 문턱에서 좌초한 2박자의 트롯 리듬에선 더 이상 문화적 동질성을 재생산해낼 도리가 없고, 3개월이 멀다하고 수입 신상품으로 갈아입은 댄스뮤직의 열광에는 동참할 의향도 명분도 없는, 바로 이 결절의 지점에 양희은이 문득 돌아와 서 있다.

 그는 지난 8월 서울에서 데뷔 후 23년 만에 첫 솔로 콘서트를 여는가 싶더니, 가을에는 지방 도시를 훑어내려 갔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8일에 다시 서울(현대 토아트홀)로 돌아왔다. 양희은의 무대는 그와 함께 시대의 터널을 통과해온 '아줌마'와 '아저씨'들로 빽빽히 채워졌으며, 이들은 열광적인 환호 대신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눈빛을 부풋하게 교감했다. 이 순간은 오랫동안 잃어왔던 자신들의 목소리를 참으로 오랜만에 되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스스로 몸을 사른 한 노동자의 피맺힌 외침으로 열린 70년대의 벽두에, 이들의 목소리는 시대의 '아침 이슬'이었다. 폭력으로 3선을 관철한 제3공화국이 유신 제국의 음모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떼던 71년에 김민기와 함께 양희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애상과 영탄으로 점철되었던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경의에 찬 눈으로 이들을 쳐다보았다.

사랑으로 범벅된 대중음악의 습기 제거
 통기타와 청바지의 물결 위에 아로새겨진 〈아침 이슬〉은 대중 음악이 소외에 대한 값싼 위로가 아니라 존재와 역사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증명했으며, 이 기념비적인 노래는 그대로 혁명적인 낭만주의의 성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양희은은 단호하게 또렷한 발성으로 여성 대중음악가에게 천형처럼 씌워졌던 '위안의 꽃'이라는 숙명을 단호하고 또렷하게 분쇄했다.

 어떠한 장식음도 거절한 그이 목소리는 대중음악에서 가사의 의미 전달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범벅된 한국 대중 음악의 과잉된 습기를 일거에 제거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데뷔 앨범은 뒷면 전체가 번안곡으로 채워진 데서 드러나듯이 아직은 반쪽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72년에 이 운명적인 동반자들은 이들의 세례 받았던 서양의 모던 포크를 극복하는 명제를 한달음에 제출한다.

 양희은의 두번째 앨범〈서울로 가는 길〉은 트롯이라는 일본 문화의 잔영과 새로운 진주군인 팝음악의 주도권 지형도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음악 언어와 정신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를 그야말로 자신만만하게 보여주였다. 올이 풀어진 청바지 차림에 맨발로 나무 등걸에 걸터앉은 저 사람을 보라. 이 재킷 사진은 역사에 걸터앉아 미래의 하늘을 향해 외치는 젊고 새로운 세대의 섬세한 거역인 것이다.

 당시 대학가에 통기타 붐을 일으킨 번안곡 중의 하나인 〈아름다운 것들〉(60년대 미국 모던 포크의 여걸 존 바에즈갈 부른〈Mary Hamiltion〉에 방의경이 가사를 붙였다)을 머리 곡으로 배치하여 이 앨범과 그것을 둘러싼 배경의 조류를 제시하자마자 이 앨범의 음악적 주재자인 김민기가 〈그 사이〉와 〈서울로 가는 길〉을 드디어 주머니에서 꺼낸다.

시대 정신의 정점에 섰던 음악 언어
 양희은의 보컬과 동반하여 '스리 핑거'주법의 통기타는 분명 미국에서 상륙한 것이지만, 5음계를 타고 차츰 하강하는 종지부의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다지도 머냐'는 그 착종의 문화 속에서 솟아오르는 우리의 서정이다. 그리고 이농(離農)의 서정시는 동시대의〈물레방아 도는데〉와 〈님과 함께〉의 대항 언어인 것이다.

 이 노래의 뒤를 잇는 〈인형〉에서는 이 세대의 또 하나의 태도인 자유분방함이 가볍게 녹아들어 있다. 조영남. 이수만. 고영수 같은 이들의 웃음과 휘파람을 즐기다가 뒷면으로 넘어가면 우리는 비로소 이 앨범의 참 얼굴과 만난다.

 '어느 초라한 골목길'의 '어두컴컴한 새벽'에 '벌써 일어나 일판 벌여'놓은 '구둣방 할아범'이 등장하는 경쾌무미한 〈새벽길〉과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개에 대한 회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백구(百狗)〉, 그리고 지금까지도 필적할 상대를 찾지 못한, 분단 현실에 대한 가장 정교한 비유인 〈작은 연못〉이 숨돌릴 틈 없이 펼쳐진다.

 이들 김민기의 역작에서 갓 스물을 넘긴 양희은의 보컬이 자아내는 여운의 울림과 박력은 한마디로 압도적이며, 그 뒤로 양희은 자신을 포함한 어떤 보컬리스트도 이 경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목소리는 이 시대 정신의 정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한 정점은 유신 선포와 함께 김민기가 당국의 요시찰 명단에 오름으로써 파국을 맞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타이틀로 하는 74년의 세번째 앨범부터 김민기의 이름은 그와 더 이상 동행하지 못한다. 그 자유로운 음악 정신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일까. 아침 이슬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고, 양희은은 포크 음악인 이주원과 새로운 짝을 이루어 〈내님의 사랑은〉〈한사람〉〈들길 따라서〉 같은 발라드를 담담히 읊으며 이 침묵의 암흑기를 홀로 살아남는다.

 파괴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오히려 빛났던 70년대 초기의 도전적인 태도가 구금 당하면서 그는 때 이르게 배달된 '성숙'을 받아들어야 했던 것이다.

〈한계령〉넘으면 젊은 시대와 결별
 그의 보컬은 점점 음영이 짙어졌고 확신은 체념으로 빛깔을 바뀌었다. 당시 대부분 지식인들의 침울함과 궤를 같이하는 양희은의 위상은 마치 통속의 바다에서 고립된 섬과 같았다. 어느 틈엔가 그는 삼십대 문턱을 넘어버렸으며, 역사의 중심에서 물러난 그와 비슷한 세대들은 그들의 노래를 조용히 가슴 속에 묻으며 젊은 날의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하여 대낮에 피를 흘리며 등장한 80년대의 한낮인 85년에 새롭게 떠오르고 있던 신예 싱어송라이터 하덕규의 도움을 받으며 그가 오른 곳은 〈한계령〉이었고, 이 앨범을 통해 그는 그와 동시대인들의 정서적 허무주의를 집대성했다.

 음유적 성격으로 충만한 이 앨범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젊은 시대와 완전히 결별하였으며 어느 새 침착한 중년의 담담한 발성으로 자신을 규정하기에 이른다. 초기 그의 노래의 기초를 이루었던 세계에 대한 생기발랄함은 80년대의 젊은 담당자들에게 이양되었고 그는 다만 한 가지 관심, 자신의 내면 풍경을 수채화 톤으로 담아내는 것을 음악적 과제로 남겨놓았다.

 양희은은 암과 투쟁하면서 끝까지 그가 가담했던 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그대로 밟은, 전후 제2세대 지식인들의 음악적 대변자였던 것이다

姜 憲(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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