遺産없는 제국 붕괴, 유례가 없다
  • 편집국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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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여방 해체 역사적 분석 / 日 동경대 하야시 겐타로 명예교수 특별기고

소연방의 와해가 한 제국의 소멸이라면 이는 역사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여러 제국과는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 것인가. 하야시 겐타로(林健太郞·79) 동경대 명예교수는 《시사저널》을 위한 특별기고를 통해 소연방 해체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아울러 한반도가 거기에서 배울 교훈을 제시했다.

 동경대 문과대학 출신으로 이 학교 총장과 ‘재팬 파운데이션’ 이사장을 역임한 하야시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고 있다.  <편집자>

 수년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은 시대를 서기 1500년 이후로 가정하여 그 사이에 일어난 대국의 흥륭과 몰락에 대해 고찰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연방 제국의 멸망과 비교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 책에서 취급된 과거의 대국이란 오스트리아·스페인의 합스부르크제국, 17세기의 홀란드, 18 ~19세기의 대영제국이며 그 사이에 존재했던 루이 왕조의 프랑스나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제국 등의 국가이다. 그의 관찰은 다각적인데 그 가운데 큰 줄거리를 뽑으면 한 나라가 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그 기초로 필요하며 일단 대제국으로 발전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군사력을 기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결국 이 비용이 쌓여 대국의 쇠퇴를 초래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이점은 이미 지적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국흥망의 논리로서 일응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의 소련붕괴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소련붕괴의 시작이 미국과의 핵미사일 경쟁에 의한 경제적 부담을 견디지 못한 데 기인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제2차대전의 승리국이 된 후 동유럽과 발칸제국을 위성국으로 만들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그 이전부터 엄청났던 소련의 군사비를 더욱 증대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소련은 서유럽을 향해 SS-20 등과 같은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미국의 대응조처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한 군비경쟁이 소련을 파탄으로 몰았다.

 이처럼 소련제국의 몰락은 군사비의 과다가 초래했다는 점에 있어서 세계사의 많은 선례와 유사하다. 그러나 소련 멸망의 형태에는 전혀 선례가 없다. 그것은 로마제국처럼 장기간에 걸친 쇠퇴나 타민족의 침입에 의한 멸망도 아닐 뿐더러 금세기에 일어난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3제국의 소멸처럼 패전에 의한 멸망과도 다르다. 소련은 그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에 의한 ‘자기 부정’으로 붕괴됐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해체를 의도했던 것이 아니고 정책변경을 통해 국가를 ‘재편’하려 했던 것이지만 그 변경은 소련사회의 본질적 속성의 부정으로 연계된 것이었기 때문에 본래의 의도에 반하여 소련국가의 묘지를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자기 부정’에 의한 종말, 세계사상 특이
 이러한 종말은 세계사상 특이한데 소련은 또 그 시발에 있어서도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 역사상 모든 대국은 자력으로 일어선 데 반해 소련은 혁명으로 기존의 대국 러시아를 계승했다. 요컨대 소련은 경제력 신장에 따라 대국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국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권력기구를 필요로 했고 또 국제적 역학관계의 변화를 이용하여 지배를 확대시켜나간 순수한 인공적 권력국가였다. 국가가 이처럼 인공적이었다는 것은 그 사회가 대단히 인공적이었다는 것과 상응한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새로운 국가를 형성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주의라고 하는 새 사회를 만들었다. 이 사회주의 사회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이론을 충실히 실행으로 옮겨 ‘일체의 생산’ 요소를 국가,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국가를 만들면, 공산당선언을 인용한다면 ‘각인의 자유의 발전이 만인의 자유의 발전조건이 되는 결합사회가 나타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소련이 74년 동안 계속 되다가 (이 나라가 소련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1922년말부터이기는 하다) 멸망하게 된 이유는 이 나라가 공산당선언과는 반대로 각인의 자유도 만인의 자유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생산력이 증대되고 공동의 부의 샘이 풍부하게 솟고 각인이 능력에 맞게 일하며 필요에 따라 받는 사회이기는커녕 점포 앞에 장사진을 만들어 가까스로 조악한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회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소련 70년사를 돌아보며 생각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 사이 소련이 후세에 남길 만한 문화유산을 거의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대의 로마제국은 멸망한 다음 로마법과 건축기법을 남겼으며 또 빼어난 헬레니즘 미술과 철학을 보존시켰다. 근대의 대영제국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로서의 의회와 경험주의 철학을 세계에 전파했고, 오스트리아제국 해체 후에도 빈은 여전히 음악의 성지로 남아 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은 지식층에겐 악평을 사고 있으나, 오히려 독일은 철학과 과학의 여러 부문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소련은 후세에 전할 만한 새 문화를 만들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 이전의 제정러시아 문화유산조차 거의 계승하지 않았다. 19세기의 러시아는 푸슈킨 레르몬토프 고골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솔로구프 체호프를 배출했지만 소련은 그들을 이은 고리키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소련 최대의 작가 솔제니친이 소련사회를 고발하여 그 종언을 맞게 한 인물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재건 ‘씨앗’도 못 남긴 인공적 사회체제
 이러한 사실들은 러시아혁명 이후 70년의 소련역사가 세계사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되새기게 한다. 일찍이 소련은 그에 동조하는 공산주의자들을 통해 사상의 신시대와 계급차별 없는 사회를 실현하는 등 새로운 문명을 창출한 듯이 평가되었으나 이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했다고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설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공산주의라고 하는 사회체제는 후진국의 공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더욱이 공업화를 위해서는 유효한 사회체제하고 꽤나 강력하게 제창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경제 자체가 파산되고 만 이상 이 설도 깨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사상이 공업사회 성립초기에 출현한 노동자의 빈곤을 없애고 그들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주고자 한 의도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출한 처방전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바른 인식을 담지 못하고 또 인간생활의 모든 것을 인간의 힘에 의해 가름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오만성을 내포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과는 전혀 반대의 제도를 만들어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극도의 인공적인 국가사회체제는 근대사회 다음에 나타날 사회가 아니며 근대사회 형성의 한 變種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근대사회가 그 도상에서 구제를 약속한 소리에 빠져버리고 만 邪道이며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것이 막다른 골목이었다는 것은 이 사회가 자기 모순에 견디지 못하고 자멸했을 때 그곳에 남겨진 상태가 그 다음의 ‘사회’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씨앗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입증된다.

 근대사회는 아담 스미스가 설파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서만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이 원리도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낳을 수는 있어도 이 문제 해결은 오직 자유를 기본으로 한 자율규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을 뿐 결코 자유의 전면부정에 의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국가지령경제의 비타당성을 인식하고 자유시장경제의 도입을 꾀했으나 이를 위해서는 개인자본을 축적한 기업가의 존재가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영역에서도 국가의 관료와 사용인밖에 없었던 소련 사회주의사회에서 그러한 기업가를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페레스트로이카 시행 후 소련에서 생산은 정체되고 유통은 혼란에 빠졌으며 국민생활은 더욱 빈곤해지고 말았다. 이를 극복하여 자유시장경제를 뿌리 내리게 하려면 자력 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외국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상은 소련공산주의의 종언에서 얻은 결론인데 문제는 소련 이외의 공산주의국가인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의 향후 거취와 그에 대한 타국민의 태도이다. 이 나라에서도 공산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경제는 파탄되고 문화적 자산은 형성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실패한 소련의 교훈에 따라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주의경제에서 이탈하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정권의 연명을 도모하려는 것이 작금의 현상이다.

 중국은 그 광대한 면적과 지역의 다양성 그리고 그 사회 전체가 아직껏 보유하고 있는 원시적 성격을 이용하여 특정지역에 경제특구를 만들고 국지적으로 자본주의를 완전히 도입하는 형태로 묵은 권력과 새로운 경제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외국개입 배제해야 한다
 한반도의 공산주의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2차대전 후에 탄생한 분단국가라는 점에서 독자성을 갖는다. 다만 이 독자성은 독일과 베트남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베트남은 한국과 상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참고가 되지 않지만 독일은 선례로서 배울 것을 많이 지니고 있다.

 독일은 초기의 아데나워 정권 시절에 동독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서유럽과 결합을 굳힘으로써 자국의 경제적 향상을 도모했다. 이 목적이 달성된 후 브란트 정권은 동독을 승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서독 주민의 상호 접촉기회를 증대시키고 정보유통의 확대를 꾀했다. 이 과정이 끝난 후 독일통일과 공산주의 종언을 동시에 이룩해냈다. 독일의 이런 역사과정은 한민족에게 큰 참고가 될 것이다.

 분단국으로서 공산주의 극복과 민족통일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것은 민족문제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당사자들 행위로 진전돼야만 하고 외국의 개입은 엄중히 배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뜻에서 일본의 일부 정치가가 한국의 머리 너머로 북한과 접촉을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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