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푸·유도 원조는 수벽치기
  • 제주·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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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7백년 무예 족보’ 복원한 육태안 씨 주장 … “삼별초 무사들이 전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송도(개성)의 수박(수벽치기)이 지나로 들어가 권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다’고 적고 ‘이조가 무풍을 천시한 이래 그 자취가 거의 전멸했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고려사>에 수박 또는 수박희로, <조선왕조실록>에 수벽·수벽타로 기록되어 있는 수벽치기는 손뼉치기와 밟기를 기본으로 하는 전통 무예이다. 특히 손과 발을 서로 부딪쳐 발생하는 기를 중시하며, 쌈수로 나아가면 실전 파괴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수벽치기가 인멸한 것을 가장 애석해 하는 사람은 陸泰安씨(41)일 것이다. 87년 스승 신한승씨(택견 중요무형문화재)로부터 “수벽치기를 복원하라”는 유언을 받은 육태안 씨는, 그 뒤로 수벽치기의 계보를 밝히고 이를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육씨는 어려서부터 무도의 길에 들어 고려대를 졸업할 때까지 합기도·태권도는 물론 기천문 등 각종 무술을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그 해 처음으로 중앙문화센터에 수벽치기 강좌를 개설하여 일반에 선보였는데, 이 강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통 예술에 전통 무예 녹아 있다”
그는 신씨가 “내가 주춧돌을 놓은 셈이니 자네는 제대로 된 집을 지어달라”고 당부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한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한다. 7백년 전 소멸되어간 몸짓을 되살리는 일을 한 개인에게 짐지운다는 사실도 그러려니와 택견 등 다른 전통 무예가 이미 자리를 잡은 뒤에야 세상에 처음 내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신한승씨는 “내가 수벽치기를 먼저 체계화할 수만 있었다면 택견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신한승 씨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수벽치기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한 것은, 수벽치기가 그만큼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몸놀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육씨는 “선생님께서 택견을 문화재라는 틀에 맞추다 보니 미처 담아내지 못한 것을 따로 완성해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태권도가 무도 스포츠로 지형이 짜인 마당에 수벽치기가 또 하나의 전통 무예로서 정통성을 확보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기도 하다. 현재 택견과 수벽치기가 혼동되거나 택견이 조선 이전의 역사를 수벽치기와 공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벽치기야말로 전통 무예의 근원을 여는 무예”라고 강조한다. 즉 택견은 수벽치기가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뒤 조선 중기 무렵부터 민속놀이 형태로 나타난 ‘변형된 무예’인 반면, 수벽치기는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민족의 가장 내력 깊은 정통 무예라는 것이다. 현재 수벽치기와 함께 얼버무려져 있는 택견의 역사를 재검토하는 것이 육태안 씨가 가장 주력하는 일이다.

그는 수벽치기의 맥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수벽치기가 전성을 구가하던 고려 왕조의 몰락과 함께 대부분 실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민속연희와 춤 놀이에서 얼마든지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 예술에 전통 무예의 모습이 녹아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 대표적 모습을 농악에서 찾는 그는, 사물놀이패의 김덕수 씨와 함께 사물의 리듬과 수벽치기의 몸놀림을 결합해 사물 체조를 창안하기도 했다(상자 기사 참조). 89년 우연찮게 진도 씻김굿 중요무형문화재인 박병천 씨로부터 남도 들노래를 배우면서 육씨는 수벽치기 족보를 완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손치기 손치기/손으로 친다고 손치기/발치기 발치기/발로 친다고 발치기’라는 가사를 가진 남도 들노래는 그 가사에서 수벽치기의 어원을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보법과 수법이 검만 들려주면 영락없는 수벽치기라고 할 정도로 수벽치기의 틀을 담고 있었다. 진도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사집단으로 알려진 고려 삼별초의 항몽 거점으로서, 진도 민요와 춤사위에 수벽치기 무예의 신법과 몸짓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계보를 찾아내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스승의 당부에 비로소 제대로 응답하게 된 셈이다.

육태안 씨 주장 뒷받침하는 일본 학자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진도 답사는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인 제주로 이어졌으며, 최근에는 아예 솔가하여 제주에 정착했다. 그는 살아 남은 삼별초 무사들이 제주서 오키나와·일본·중국 남쪽으로 탈출했으리라 추측하는데, 최근 수원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수벽치기의 역사와 기법’에서 이같은 사실을 처음 밝히고 있다. 한국의 무예를 일본 무예의 원조로 파악한 논문과 저술이 일본에서 출간되기 시작한 것도 신채호에서 육태안으로 이어지는 수벽치기의 족보 찾기에 뒷심이 되어준다.

일본의 대표적인 무예학자인 야마모토 기타이 교수(일본 천리대학)와 마쓰나미 겐시로 교수(일본 專修 대학)는 최근 ‘한국 고대의 수박(수벽치기)에 관하여’(<천리대학 학보> 154호)라는 논문과 <격투기의 문화사>에서 수벽치기의 근원을 밝히고 있으며, 일본 도인술 전문가인 하야시마 마사오 씨는 백제의 왕인이 4세기 말 <논어> <천자문>과 함께 일본에 전해준 무술 해설집 <평법학>이 일본 무술의 뿌리가 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어 수벽치기의 역사적 사료로 쓰이고 있다.

육태안 씨는 수벽치기가 일본의 스모, 유술, 아이키도(합기도), 가라테(공수)의 뿌리와 한국 고대 무술의 연관성을 풀 수 있는 관건이라고 전제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전통 무예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금 제주의 끝 모슬포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 무예 도장인 수벽치기 도장을 세우고 있다. “삼별초가 스러져간 곳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시작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제주·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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