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병’ 키운 건강 검진
  • 경남 거제ㆍ박성준 기자 ()
  • 승인 1995.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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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중공업 노조 “대우병원이 진폐 환자 정상 판정”…회사측 “오진 때문”



 경남 거제도에 자리잡은 대우중공업(전대우조선)은 근로자 수가 1만1천명이 넘는 대규모 사업장이다. 이 회사는 노조가 제2 노총에 소속한 강성 노조인데도 지난여름 노동판을 뜨겁게 달군 대기업 사업장 노조의 연대 파업 물결을 용케 피해나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뜻하지 않은 문제로 그동안 쌓아놓은 실적에 흠을 남기게 됐다. 회사측이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94년 건강 검진 작업이 노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기 직전까지 가는 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회사측이 예정한 건강검진 개시 일자는 12월7일이었다. 노조원들은 12월5일부터 대우중공업내 판금분원과 대우병원 두곳에 설치한 검진장 입구를 가로막고 회사측 작업을 방해했다. 노조간부 몇몇은 목에 쇠사슬을 감고 신나통까지 동원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으며 회사측 사람들의 검진장 접근을 막기도 했다. 대우중공업 노조의 이른바 ‘건강권 사수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회사측은 일방적으로 실시하려던 건강 검진 계획을 뒤로 미루고 노조와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밀 검사 결과 진폐 환자 9명 늘어
 양측은 몇 차례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몇 가지 주요 사항에 합의했다. 그중 하나는 건강 검진결과의 오진 여부를 노사 양측이 추천하는 의사 1명씩으로 구성하는 ‘판독위원회’로 하여금 판단케 한다는 것이었다. 즉 회사가 실시한 건강검진이 제대로 됐는지 여부를 근로자들이 직접 심사하겠다는 뜻이다. 노조는 이같은 합의를 이뤄놓고 “근로자의 건강 검진 참여권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뤘다”라고 외쳤다. 반면 회사는 굴복이나 다름없는 양보끝에 겨우 검진 실시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회사가 이처럼 노조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내력이 있다. 그것은 대우중공업에서 직업병 은폐 시비가 싹튼 89~90년 무렵으로 거슬러올라간다. 89년 대우중공업은 다른 해와 다름없이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자사 근로자 전체에 대한 정기 건강 검진을 실시했다. 검진 결과 조합원 가운데 37명이 진폐ㆍ소음성 난청 등 직업병 환자로 밝혀졌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사업장으로서 유달리 소음과 먼지가 많은 작업 환경에 비추어 이같은 결과는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듬해부터 건강 검진 때마다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환자가 줄어들기 시작한 데 있다. 90년 건강 검진 결과 직업병 환자가 20명으로 줄었다. 93년에는 직업병 환자 수가 8명으로 뚝 떨어졌다. 89ㆍ90년 건강 검진 때 직업병 판정을 받은 근로자들이 93년 건강 검진에서는 ‘정상 판정’으로 나오는 일도 벌어졌다. 대우중공업근로자들과 이들의 대표격인 노조는 회사측 건강 검진 결과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근로자들의 의심을 더 부추긴 요인은 건강 검진을 실시하는 의료 기관의 성격에도 있었다. 관련법상 회사측이 지정하기로 되어 있는 검진기관은 대우중공업 바로 옆에 있는 대우병원이었다. 근로자들은 대우중공업과 대우병원이 같은 그룹 계열사여서 음으로 양으로 협조 관계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건강 검진 과정에서도 어떤 ‘협조’ 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93년 노조는 의혹을 풀기 위해 검진 결과가 특히 의심스러운 조합원 2백명의 기록을 들고 부산 동아대를 찾아갔다. 대우병원이 아닌 검진 기관에서 검진 결과를 판독하면 회사와 병원이 협조를 했는지 여부가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조의 예측은 빗나갔다. 동아대가 노조에 통고한 검진 자료 판독 결과는 대우병원측 검진 내용과 대체로 일치했다.

 동아대 보고서로도 의심을 풀지 못한 노조는 이 문제를 들고 또 다른 기관을 찾았다. 한국노동보건직업병연구소(직업병연구소ㆍ소장 장임원)와 진폐 및 소음성 난청 의심자에 대한 역학 조사계약을 맺은 것이다. 노조가 재검진을 의뢰한 근로자수는 진폐 부문이 19명, 소음성 난청 부문이80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대우병원에서 실시한 건강 검진에서 정상으로 판정난 근로자들이었다. 직업병연구소는 의료진 4명을 현지에 보내 소음성 난청 의심자에 대해 94년 3월 1차 검진을 벌였고, 추가로 오디오그램이라는 특수 검사를 했다. 또 서울대병원 진단방사선과에 진폐증 환자인 듯한 노동자 19명에 대한 흉부 촬영을 의뢰하고, 그 결과(필름)를 대한방사선의학회와 흉부방사선연구회에 넘겨 판독을 요청했다.

 94년 8월 노조에 보고서 형식으로 통보된 직업병연구소의 최종 판독 결과는 진폐ㆍ난청 부문 모두 노조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고해상 컴퓨터 단층 촬영을 한 결과 조선업종사업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용접공 진폐’징후가 발견된 사람이 9명에 이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진폐의증으로 판정 받았다가 지난해 정상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대우중공업 탑재1부에 근무했던 강칠봉씨(46)는 그중 한 사람이다. 강씨는 단순 흉부X선 판독에서 진폐의증임이 밝혀졌고, 이보다 더 정밀하게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고해상 컴퓨터 단층 촬영 판독 결과에서는 용접공 진폐로 판정됐다. 강씨는 92년 대우병원 건강 검진에서 진폐의증으로 판정 났다가 지난해에 정상판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직업병 축소ㆍ은폐 소동 확대 조짐
 소음성 난청 판독에 대한 대우병원과 직업병연구소의 검진 결과는 진폐 쪽보다 더욱 심한 차이가 났다. 대우병원이 난청주의자로 판정한 근로자 38명 가운데 37명이 무더기로 소음성 난청판정을 받은 것이다. 또 대우병원 건강 검진에서 직업과는 상관없는 ‘전음성 난청’으로 진단됐던 근로자 12명 중 11명이 직업에 의한 소음성 난청인 것으로 밝혀졌다. 직업병연구소측이 노조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소음성 난청의 경우 대우병원 소견과 연구소 소견이 일치하는 비율이 7.1%에 불과했다. 노조측은 이같은 사실을 대우병원과 대우중공업이 직업병 발생 실태를 은폐한 증거라고 간주했다. '

 노조는 이같은 결과를 회사측에 들이대고 검진 기관을 대우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바꿀 것과, 건강 검진의 객관성을 보장할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측 반응은 노조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대우병원이 오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검진 과정의 신뢰성을 의심해 검진 기관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며 맞섰다. 최근의 노사간 합의는 바로 이같은 우여곡절끝에 나왔다. 노조는 건강 진단 결과를 판독하는데 참여하는 대신, 건강 진단은 지금까지 해온대로 대우병원측에 계속 맡기기로 한 것이다.

 합의를 이뤄 냈음에도 뒷맛은 여전히 개운치 않다. 노조측은 회사와 병원이 직업병 환자 수를 고의로 축소했다고 보는 반면, 회사측은 의사의 오진 가능성 또는 검사의 부정확성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대우중공업 안전연구부 정영춘 과장은 “건강 검진 내용은 검진 기관, 또는 의사들의 입장이나 소신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직업병연구소가 진폐를 판정하는 데 동원한 고해상 컴퓨터 단층 촬영은 일반 직업병검진에는 쓰지 않는 특수 장비이다”라고 말한다. 현행 법으로 정해진 건강 진단 방식은 돋보기로하는데 직업병연구소측은 돋보기 대신 현미경을 사용한 격이라는 것이다. 정과장은 “돋보기 대신 현미경을 들이 대는데 1년 전에 직업병을 앓았던 사람에 대한 판정이 정상으로 나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다.

 대우중공업 노사간 싸움은 회사측이 한 발짝 물러섬으로 일단 매듭지어 졌지만, 현행 건강 검진 과정이나 직업병 판정 과정에 근로자측 검증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우중공업에서 벌어진 직업병 은폐 소동은 다른 사업장으로 옮겨 붙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그같은 조짐이 엿보인다. 현대중공업ㆍ현대미포조선소ㆍ한진중공업ㆍ한라중공업 등 대우중공업 노조와 함께 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에 소속된 몇몇 노조는, 94년 11월 회사가 지정한 병원의 건강 검진에서 정상 판정을 받은 조합원 가운데 93명을 공동으로 추려 재검진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대우중공업 노조의 전례에 자극받은 것이다.

 직업병 판정 문제를 둘러싸고 최근 벌어지는 노사의 움직임은 95년 노동계가 해결할 과제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
경남 거제ㆍ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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