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끌어갈 한국의 개척자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5.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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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의 세계화 특별기획/과학기술·컴퓨터·정치·경제·사회복지·문화예술 등 6개 분야 34인의 도전과 창조

미래는 여기로, 우리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젊음들에게 미래는 서서 기다려야 할 시간이 아니다.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는 젊음들이 달려가 누려야 할 시간이다. 이 때, 미래는 있다. 오늘의 창조적인 30대에게 미래는 이미 이들의 현재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래와 연결된 한 줄기 밧줄을 튼튼하게 거머쥐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 미래를 열어가는, 미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빛나는 젊음들이 있다. <시사저널>은 1995년 새해를 맞아, 2000년대의 첫 세기를 열어나가는 한국의 ‘개척자’ 34인을 선정했다. 55년부터 65년 사이에 태어난 30대 뉴 프론티어를 통해 5년 뒷면 막이 오르는 2000년대를 전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세기 말이 아니라, 세기의 앞이다.

폭발적 잠재력 갖춘 단절의 세대
 그렇다면 누가 21세기를 이끌어 갈 한국의 개척자인가. <시사저널>은 창조성·미래성·세계성이라는 3대 요건을 갖춘 각 분야의 30대를 찾아나섰다. 그렇다고 모든 분야를 망라할 수는 없었다. 그러할 필요도 없었다. 가능하면, 새 세기에 한국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해낼 수 있는 분야로 한정했다.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추천을 받아 그 분야의 또 다른 전문가에게 다시 추천을 받는 방식(크로스 체킹)을 택했다.

 다가오는 2000년대는 도전적인 창조성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창조성도 미래를 내다보는 시야·시력과 만나지 못한다면 현실적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 창조성과 미래성은, 또 국제 경쟁력을 가져야만 한다. 이제 세계는 하나의 경제 체제와 정보 체계로 통합된다. 국경·국민의 개념은 이제 하나의 경제·정보 논리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30대를 주목하는 까닭은 우선 오늘의 30대들이 2000년대의 첫 세기를 주도할 것이라는 단순한 계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의 30대는 그렇게 단순한 세대가 아니다. 세대론적 아이덴티티가 분명하며, 베이붐 시대에 태어나 현재 가장 많은 연령층을 이루고 있다. 개척자들은 오늘의 30대에게 짐지워진 역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30대는 출발과 끝의 낙차가 지나치게 큰 불행한 세대이기도 하다. 30대들이 태어날 때 인구의 80%가 농촌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30대가 된 지금 인구의 80%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성장한 ‘경계(境界) 위의 세대’인 것이다.

 이 땅의 30대는 전쟁의 그늘에서 태어났고, 근대화 계획과 군사 독재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달렸으며, 이들의 성년식은 곧 ‘아버지’를 부정하는 일이었으니, 심각한 단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정의 통과 제의를 30대 후반은 유신 반대로 치러냈다. 30대 중반은 5월 광주라는 ‘피의 세례’를 받아 어른이 되었다. 30대 초반은 87년 6월 항쟁의 근접 거리에서 성년식을 올렸다.

 경계 위의 존재인 30대들은 그만큼 이중적이다. 흙과 대가족제도, 공동체 문화를 어린 시절에 경험하면서 아버지 세대로부터 식민지와 전쟁 체험을 전수받았지만, 이들의 현재적 삶은 고향을 떠난 대도시에서 핵가족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공동체 문화의 마지막 자녀로 태어나 도시 핵가족 문화의 첫 부모가 되어 있는 것이니, 성적 역할에서부터 극심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무너진 공동체 문화 새롭게 건설할 듯
 다시, 경제 위의 존재라는 사실에 유의한다면 30대가 갖고 있는 잠재력은 적지 않다. 경제 위의 삶은 극도의 긴장을 요구한다. 위와 아래, 앞과 뒤를 끊임없이 주시하면서 살아온 이 세대들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인류가 오랫동안 유전시켜온 공동체 문화의 처음이자 마지막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문명의 진행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으로 원자화한 개인과 극도로 메마른 가족 공동체 문화를 열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환경·생태·생명 운동의 도착지는 바로 새로운 공동체 문화가 아니겠는가.

 이같은 시대적·문화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의 30대 개척자들이 포진한 분야는 과학·기술을 비롯해, 컴퓨터 소프트웨어, 정치, 경제·경영, 사회 복지, 문화 예술 영역이다.

 물론 <시사저널>의 그물이 그다지 촘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교육이나 생명 운동, 공동체 운동, 관계, 종교계 등에도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척자들이 있다고 확신한다.

 과학 기술 분야를 주목한 까닭은 21세기가 생명공학을 포함한 과학 기술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특히 리우 환경 회담 이후 중요성이 높아진 생물 다양성 문제는 그 한 징후이다. 한 나라가 보유한 종(種)의 다양성, 생태계 다양성, 생물 다양성이 곧 그 나라의 국력과 과학력을 재는 잣대로 등장할 것이다.

 지난해부터 국내에서도 부쩍 ‘접촉 빈도’가 높아진 카오스 이론은 상대성이론·양자역학과 더불어 20세기 물리학계의 3대 혁명으로 기록된다. 카오스 이론은 결정론적 예측 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라플라스의 환상을 깨버렸다. 그동안 소립자 연구에만 매달렸던 물리학계에 카오스 이론은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다. 예컨대 카오스 이론은 그동안 전문화라는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과학계의 연구 풍토를 통합과 활발한 소통의 관계로 뒤바꿀 것으로 보인다. 이 카오스 이론은 물리학이나 과학 분야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제품은 물론이고 사상에까지 일대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편, 자연과학·공학 분야는 성격상 상품화와는 얼마쯤 거리를 두고 있다. 빅뱅 이후 10-34초까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규명하는 연구는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과학자의 이러한 호기심과 탐구심이야말로 기초 과학의 기본적인 덕목일 뿐만 아니라 산업의 밑바탕을 한껏 다져주는 기반이 된다.

정보화 시대의 ‘컴퓨터 혈전’ 감지돼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는 21세기 한국을 이끌어나갈 전략 산업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살아남는 길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기능 별로 특화해 왔지만 당장 올해부터 종합적인 소프트웨어로 방향을 전환한다. 또한 지난해 방한한 빌 게이츠가 올해부터 한국 시장을 적극 공략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하여 앞으로 2~3년은 국내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계가 한바탕 혈전을 벌이면서 재편될 것으로 전망된다.

 컴퓨터 산업의 미래는 2010년대에 완공되는 정보 고속도로와, 현재 3백 개의 호스트(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가 연결되어 있는 인터네트에 달려 있다. 아울러 컴퓨터게임 산업도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할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 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의식과 생활과 사회의 모습을 뒤바꿀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인간에게 도움을 줄지, 아니면 폐해를 가져다 줄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 내려지지 않고 있다. 과학 기술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지만, 벌써부터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정보 과부하와 사무 자동화에 따른 업무량 증가는 비관론을 정당화한다.

 정치 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 그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체계가 본격 가동되면 정부의 관리와 간섭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앞으로의 정치는, 권위주의나 도덕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도덕성 위에 경영 개념이 녹아들어간 고도의 능력이 요구된다.

 경제 분야의 미래는 국제화 진전에 따른 증권·금융 시장의 다양한 변화로 드러날 것이다. 세계 12~13위에 이르는 무역량에 비해 주요 국제 기구에서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 경제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시사저널>은 국제통화기금(IMF) 이코노미스트를 선정했다. 다만 제조업 분야에서 의욕적인 30대 창업주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건전성에 한가닥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영 분야에서는 경영 아이디어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사상으로 자리잡는다는 뚜렷한 변화가 포착됐다. 지난해 영국의 권위있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10대 사상가에 경영이론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30대 경영 상담가를 만날 수 없었던 것도 적지 않은 아쉬움이었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개척 정신
 사회 복지 분야는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으나, 한국의 사회 복지 수준이 중진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만큼 열악하다는 현실을 주목했다. 창조성·미래성·국제성이 개개인의 삶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품과 다를 것이 없다는 취지에서 사회 복지 분야의 30대 개척자를 뽑았다.

 학술 및 문화 예술 분야는 어느 분야 못지 않게 다양하고 활발하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당대 문명에 간섭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지향하는 철학과 문화 비평, 그리고 사양 산업이 아니라 문화를 견인하는 미래 산업일 수 있는 출판에 주목했고, 세분화와 함께 통합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각 분야 예술가·전문인 들의 오늘과 내일을 들여다 보고자 했다.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공통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전문화와 더불어 통합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편집자·디자이너·기획자·감독·프로듀서 등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고 다시 배분하는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30대 개척자들이 전통적인 성실성(노동력)보다는 창조성(지적 능력)에 더 가치를 두고 있으며, 정보화·국제화 시대에 주체적으로 민첩하게 대응하면서 한반도 통일과,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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